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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1인 우주 06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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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임풍 Jul 01. 2023

사적 영역의 이탈


탈영이나 근무지 이탈이란 말이 있다.  어떤 공적인 임무를 수행하는 사람이 공적 영역을 허가 없이 떠나는 경우를 말한다. 군대에서 제대를 하거나 회사에서 퇴근을 하면, 사적 영역이 시작된다. 누구도 나의 삶을 간섭하지 않고, 나의 행동이 윤리적 기준을 지키는 한 아무런 책임을 질 일도 없다. 공적인 일을 하는 동안에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감정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많다. 깨어나면 꿈에서 있었던 일들이 잊히는 것과도 비슷하다. 그런데 다시 퇴근하고 사적 영역으로 돌아오면, 기다렸다는 듯이 많은 기억과 걱정, 그에 따른 감정들이 커튼 뒤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처럼 살며시 다가온다.

하나의 생각이 떠오른다. 사람이 사적 영역에서도 탈영을 하거나 근무지 이탈을 할 수 있나? 쉬지 않고 떠오르는 개인적인 생각이나 기억, 감정이나 상상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느냐를 말한다. 사실 퇴근을 하면 쉬고 싶은 것이 인간의 마음이 다. 공적인 업무에서는 벗어났는데, 눈에 보이지 않는 생각이나 감정들이 나의 귀중한 사적인 시간을 잠식한다. 도대체 어디에 가야만,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멍 때리고 있을 수 있나? 어떤 사람들은 사적인 시간을 침범하는 생각을 피하려고, 주말에도 사무실에 가서 일하는 사람이 있다. 흔히 일벌레나 워크홀릭이라고 불리지만, 이들은 공적인 업무에 파묻혀서라도 계속 반복되는 머릿속의 속삭임으로부터 도망가고 싶어 한다. 인간은 언제부터인가 마음속의 속삭임을 이길 수 없다고 단정해오고 있다. 머리를 마비시키려고 술도 마시고, 노래도 듣고, 담배도 피우고, 과식도 하고, 여행도 하고, 산속에서 수양도 한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나 잘 안다. 어떤 방법도 영원히 술 취한 생각이나 감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 줄 수 없다는 것을.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감정과 친구가 돼라고도 한다. 감정을 억누르거나 억압하지 말고, 품어주고 면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달래라고 한다. 심지어 자신을 두 팔로 꼭 안아 주라고도한다.

일면 그럴듯한 말이고, 또한 단기간은 효과도 있어 보인다. 그런데 며칠 지나면, 억눌렸던 생각이나 감정이 더욱 큰 강도로 다가온다. 집 나간 귀신 하나가 나중에 친구 귀신 여러 명을 데리고 오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이다. 차라리 일시적인 회피책을 쓰지 말 것을 하고 스스로 후회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사람은 영영 이 지구상에서는 지속 가능한 마음의 평화를 이룰 수 없는가? 모든 것을 내려놓으면 가능하다는 말도 있다. 그러나 생각과 감정이라는 문제는 내 몸 밖에 있는 모든 것과 무관하게 내면에서 피어나는 매우 강한 구름이다. 하늘에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간혹 있기는 하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에는 구름이 둥둥 떠다닌다. 머릿속 생각과 감정을 없애려고 하는 것은 마치 하늘에 구름을 몽땅 없애려는 시도와 비슷하다. 수십 년 전에 영화배우 남진이 출연한 <지구여 멈춰라 내리고 싶다>라는 영화가 있었다. 영화 내용 자체는 제목과 큰 상관이 없었지만, 영화 제목이 필자에게 준 인상은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마치 실존주의 철학자들이, 인간이 자신의 의사와 무관하게 지구에 던져진 공과 같은 존재라고 여기면서, 탈출구 없는 현실을 아파하는 것과도 같은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들이 지배하는 사적 영역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은 것이다.

우주의 원리인 사랑과 질서를 지키면, 마음의 평화를 이룬다는 말도 있다. 그런데 사람이란 존재는 기본적으로 숭고한 사랑을 할 수도 없고, 세상의 질서를 잘 지키기도 어렵게 느낀다. 내일 아침에 7시에 일어나서 조깅하러 가야지 하고 결심을 해도 막상 아침이 되면 조금 더 자야지 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다. 파스칼은 인간을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지만, 필자가 보기에 오늘날 한국인은 '살짝만 건드려도 툭하고 터지는 봉선화 같은 존재'라고 느껴진다. 조금만 불편해도 참지 못하고, 사소한 일에도 쉽게 화를 내고, 조금만 늦어도 참지를 못한다. 사적인 영역에서 생각 감정의 노예상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법은 자신이라는 자동차의 운전자에서 승객이라는 관찰자로 변하는 것이다. 즉, 나라는 존재의 사적인 영역에서 근무지 이탈을 하는 것이다. 나라는 존재의 운전대를 나를 있게 하고 끌고 가는 절대자에게 맡기고, 조수석에 앉아서 그저 관찰만 한다. 나라는 몸과 마음이 행하는 행위들에 대해 판단도 할 필요가 없다. 어떤 우주적인 존재가 그의 하부구조인 나의 몸과 마음을 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과 감정이 떠올라도 이는 인생행로라는 도로 위에 나타나는 장애물일 뿐이다. 운전자가 알아서 할 일이다.

조수인 나라는 의식은 그저 영화를 보는 것처럼 관찰할 뿐이다. 노자가 말한 무위의 개념도 의식의 관찰과 비슷하게 여겨진다. 그러다가 혹시 사고라도 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나라는 존재에 대한 운전은 모든 책임은 그분에게 있다.  차량에 탑승한 조수라는 의식의 책임은 아니다. "신은 감당할 수 있는 만큼만의 시련을 준다"라고 한다. 신이 운전하는 나라는 자동차의 여행을 마치 제3자 처럼 그저 함께 경험하고 관찰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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