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임풍 Sep 29. 2024

생명의 신비와 신앙의 비유


대부분의 현대인들은 많이 아프다. 몸만 아픈 것이 아니라 마음도 아프다. 다만 자신이 아프다는 사실을 남에게만 감출뿐 아니라, 이렇게 바쁘게 돌아가는 세상에서 이 정도 아픈 것은 괜찮다고 스스로를 달래며 살아가고 있다. 특히 우리나라 사람들이 외국인들에 비해 더 많이 아프다. 그 이유는 누구나 알고 있다. 2차 대전 이후에 수많은 신생 국가들이 등장하였지만, 우리나라처럼 짧은 시기에 산업화의 과정을 마치고 정보화 시대에 선두국가에 진입한 나라는 없기 때문이다. 60년대 이후, 치열한 경쟁과 잘 살아 보자는 일념 속에서 모든 사람들이 살아오고 있다. 그 결과 총체적으로 우리나라 사람들의 대부분이 성인병에 시달리거나 정신적 우울감을 맛보며 살아가고 있다. 더 잘 살고, 경제적으로 더욱 성장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다른 사람 앞에서 아프다는 소리를 하면 안 된다. 듣는 사람들도 말은 하지 않지만 모두 아프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는 모든 면이 풍선처럼 부풀어져 있다. 언어의 사용 측면에서도 인플레이션 속에서 살고 있다. 과거에 사용하였던 단어의 원래 의미가 일정 부분 상실됨에 따라, 한 단계 높은 단어로 대체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슈퍼마켓이나 세탁소의 운영자를 주인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세탁소 사장님 또는 슈퍼마켓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따라서 과거에 큰 회사의 사장님이었던 사람들은 사장님과의 혼동을 피하려고 이제는 회장님이라고 불린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는 여기저기에서 회장님이나 사장님이란 소리를 자주 듣게 된다. 단어 의미의 인플레이션과 관련해서 마음과 정신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믿음이란 단어이다. 이 믿음이란 단어가 신앙이란 단어와 종종 같이 쓰기도 하고, 혼동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리고 사람들은 믿음이나 신앙이란 단어가 마치 종교의 전유물처럼 이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특정 종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믿음이라는 단어 대신 자신의 신념, 확신이나 가치관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영어로는 믿음을 belief라 하고, 신앙은 faith라고 구분한다. 믿음과 신앙은 서로 관련은 있지만 구별되는 개념이다. 사전적 의미에 따르면, 믿음은 일반적으로 어떤 것이 사실이거나 존재한다고 받아들이는 것으로, 증거가 있는 구체적인 사실, 과학적 법칙이나 역사적 사실 등말한다. 반면 신앙은 증거가 없는 상황에서도 깊은 신뢰나 확신을 나타내는 경우이다. 즉 믿음은 증거에 기반할 수 있지만, 신앙은 종종 증거를 초월하며 신뢰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글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의 목적상, 믿음이나 신앙이란 단어를 종교의 전유물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모든 사람의 삶 속에서도 사용할 수 있다고 전제를 한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이나 신앙이란 단어를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 보통 우리는 살아가면서 무언가를 믿거나 혹은 반대로 의심한다. 어떤 사실에 대한 증거가 우리의 오감을 만족시켜 주는 증거를 제시해 주면, 그 사실을 믿게 된다. 그런데 살다 보면 우리가 한때 확실하다고 믿었던 증거들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보통 사람들에게 믿음이라는 단어는 100% 영원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는 볼 수 없다. 즉 오감에 따른 증거는 언제든지 바뀔 수 있기 때문에 증거에 따른 믿음 자체도 바뀔 수 있다. 그렇다면 종교가 없는 보통 사람들에게 신앙이란 단어는 어떤 것이 해당될까? 초월적인 현상뿐만 아니라, 언제나 100% 증거가 있는 현상은 변적인 믿음과는 다르게 신앙의 대상이 될 수가 있다.


바로 우리의 생명이 그 대상이다. 우리가 생명을 가지고 살아있는 한, 우리는 어느 한순간도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 없다. 내가 계속해서 숨을 쉬고 있고, 나와 내 주변을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은 내 생명이 시작에서 끝날 때까지 추호도 의심할 수 없는 100% 증거이다. 따라서 우리는 생명 자체를 신앙의 대상으로 대할 수도 있다. 세상사에 대해 사람은 잘못된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그러나 나의 생명이라는 진실만큼은 잘못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너무 세상사라는 믿음의 대상에 의지해서 산다. 어떤 사람이나 사실을 믿었다가, 나중에 후회하기도 한다. 어떤 가치를 믿었다가, 나중에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하기도 한다. 이처럼 믿음이라는 것은 일정 시간 동안은 그럴듯하지만, 원래 세상이 상대적인 가치를 가지고 있는 관계로 언제든지 변할 수 있다. 심지어 과학적인 사실도 변한다.  천동설이 지동설로, 절대적 우주관이 상대적 우주관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가 살아가는 원동력인 생명 자체는 이 세상을 태어나 하직하기 전까지는 확실하게 믿을 수 있는 현상이다. 살아있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엉뚱한 곳에서 불변의 대상을 추구한다. 진시황이 영원히 살기 위해서 불로초를 구하고, 진흙으로 만든 병사들을 그와 함께 매장했다. 비싼 도자기를 집에 보관하고, 100층 이상의 건물을 짓는다. 그러나 솔로몬 왕이 전도서에서 탄식하였듯이 하늘 아래 모든 것은 헛되고 헛된 것이다. 이 세상에 영원한 것은 없다는 말이다. 그런데 우리의 생명은 아있는 동안에는 영원하다. 오늘 숨을 쉬었다가 내일 피곤하다고 심장이 숨을 멈추지 않는다. 힘들다고 폐가 호흡을 중단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사람들은 우리의 생명 현상을 너무나 당연하게 생각하고, 별로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우리의 생명이 100% 확실하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생명은 불변하고 고귀하다는 뜻이며, 생명 속에 모든 해답이 들어 있다는 의미다. 복잡한 세상사에서 눈을 돌리고, 내면의 생명 현상을 바라볼 때, 지금까지 몰랐던 새로운 의식이 깨어날 수도 있다는 말이다. 생명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외부 세상이나 외부적인 가치에서만 삶의 해답을 찾으려 하면, 결국 불행하고 고통스러운 삶이 우리를 기다릴 뿐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내면에 깃든 불변의 생명을 느끼지 못하고, 가변적인 외적인 가치를 추구하면서 힘들게 살아가고 있다. 자연뿐만 아니라, 인간의 생명 속에는 영원한 편안함과 무한한 지혜가 깃들어 있다. 매일매일 자신의 생명 현상을 신앙의 수준으로 받아들이고, 그 속에서 지혜와 안식을 구할 수 있다. 외국여행이나 멋진 친구를 만나서 일시적인 평화를 느낄 수 있지만, 이내 다른 대상으로 관심이 바뀐다. 그러나 우리 속의 생명을 만나면, 전혀 다른 인생관이 싹트게 된다.

작가의 이전글 시간이 뺐을 수 없는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