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친구만으로 그 나라가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어

해외생활의 낯선 풍경이 익숙해질 즈음 찾아오는 손님

by 따뜻한 선인장




처음 독일에 와서 교통수단을 혼자 타본 날이었다. 일부러 누군가와 약속을 잡았고 행여 약속 시간에 늦을까봐 일찌감치 준비해서 나왔다. 꽃보다 할배의 베를린 편을 보니 이서진 님이 무척 당황하시길래 나도 마음을 단단히 준비하고 베를린 지하철을 침착하게 탔고, 결국 생각보다 한 번에 잘 도착하게 돼서 한 시간이나 일찍 도착해버리고 말았다.


베를린의 상징들이 곳곳에 붙어 있는, 그래서 아무 말 없이 사진만 보내도 외국인 친구들이 내가 베를린에 있는지 알 수 있는 풍경들이 있다. 처음 보는 베를린 돔과 브란덴베르그 문과 티비타워가 어찌나 이국적으로 느껴지던지 처음 몇 주 동안은 내가 베를린에 있다는 것이 놀랍고 꿈꾸는 기분이었다. 참 신기한건, 처음엔 이렇게 모든 게 신기해서 하나하나 매번 사진으로 찍어두기까지 했던 특별해보이는 것들이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아무런 감흥이 없이 지나가는 풍경 속의 일부가 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여전히 가보지 않은 곳도 많고 해보지 않은 것도 많은 베를린에서의 3주, 정말 뜬금없이 우울한 기분이 밀려왔다. 날씨는 이리나 맑은데, 그나마 아마 가장 맑은 날들이 많은 달인 것 같은데 내 마음은 우울한 구름이 끼었다.


첫째 주는 나도 너무 정신없이 오게 돼서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판단하느라 한 주를 보냈고, 둘째 주는 여기저기 하루에 하나씩 작은 것이라도 새로운 것들을 해보자는 약속을 지키느라 신나게 다니다가, 셋째 주가 되던 이번 주, 후폭풍으로 남은 건 우울한 기분이었다. 뜬금없는 우울함에 나는 그 이유를 찾고 싶었다. 생각보다 어려운 질문이 아니었다. 그동안 이렇게 오래 쉬어본 적도 없고, 아무것도 안 해본 적도 없었다. 무언가 기간이 정해져서 쉬는 것이라면 오히려 편할까 싶었다. 지금의 쉼이 잠시라면 감사하겠지만 이게 앞으로의 미래가 된다면..이라는 생각이 들자 뭔가 답답해지고 우울한 기분이 멈춰지지 않았다.







그래서 뭔가 다시 새로운 것들을 시작해야 하나라는 생각이 들자 문득 처음으로 내가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남자 친구를 만나기 전까지만 해도, 우리가 동거를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생각했던 것을, 하고 싶던 것을 그대로 실행하면 그만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내가 어디를 가고 싶다면 혹은 남자 친구가 어디에서 일을 하고 싶은지에 따라 우리의 연애가 다시 장거리 연애로 돌아갈 것인지, 혹은 함께 살게 될 것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다시 친구로 남게 될 것인지 커다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정을 내리는 데 있어 남자 친구와 나는 무척 다른 생각의 틀과 계획 방법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건 우리 둘 모두에게 무척 낯선 세상의 생각들이었다.


남자 친구는 현실을 바탕으로 살아오고 계획하는 아이였고, 나는 꿈과 희망을 따라 흘러가는 대로 살아오던 아이였다. 이건 독일인인 남자 친구와 한국인인 나의 차이도 있겠지만 그것보단 오히려 서로 다른 생각과 가치관의 차이가 큰 부분인 것 같았다. 우리가 닿고자 하는 목표는 비슷할 수 있을지언정 그곳에 닿는 방법도 이를 위해 서로를 설득하는 방법도 달라서 우리는 처음 거의 매일같이 논쟁을 이어갔다.


한 공간에서 자주 얼굴을 보며 지낼 수 있는 커플들은 모를 수도 있겠지만, 거의 일 년 동안을 얼굴도 언제나 화상통화로 보고 대화도 온라인 상으로만 했던 나에겐 핸드폰이나 인터넷이라는 거름망 없이 이렇게 코 앞에서 논쟁을 이어가게 만든 동거라는 경험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장거리, 롱디 커플일 때는 삶이 아닌 여행 중의 좋은 기억만 그 사람의 모습으로 남아 알지 못했던 상대방의 삶의 공간 속 실제 모습을 마주하게 만드는 경험은 동거가 주는 결혼 전 가장 중요한 난제인 것 같았다. 동거라는 단어가 낯설었던 나라서 처음엔 동거를 해보는 것이 맞다는 남자 친구의 말에 반신반의했지만 일상생활 속에서 함께 살아보는 경험, 대화해보는 경험을 통해 이제 남자 친구가 아니더라도 내 생각에도 중요한 과정이 된 것 같았다.


문자 상으론 이런 상황에선 이렇게, 이런 이모티콘으로, 이런 목소리톤으로, 이런 엔딩으로 상황을 마무리 지었던 것 같은데 실제 같은 공간에서 둘이 함께 마주했을 때, 이 아이는 이런 목소리였구나, 눈빛이었구나, 행동이었구나가 갑자기 3D 입체로 흘러나오니 신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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