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남자 친구만큼 낯선 나라, 우리의 동거

일상을 함께 시작해보다

by 따뜻한 선인장




눈을 뜨니 베를린. 거의 일주일 간격으로 나의 환경은 필리핀에서 한국으로, 그리도 다시 독일까지 마치 영화 속 장면들이 넘어가듯 참 별일도 아닌 듯 넘어갔다. 그러나 내 몸은 그동안 내가 전부 다른 세상에서 왔던 것을 그대로 기억하는 듯 했다. 같은 8월이고 같은 이름의 여름이라는데도 필리핀에서 온 나에게 독일의 여름은 스웨터를 꺼내입게 만들었다.


반팔과 스웨터마냥 다른 나라, 독일에 온 이유는 순전히 남자친구와 나의 미래 때문이었다. 우리는 헤어지기 전, 혹은 결혼하기 전 한번은 더 만나야 했고 서로의 일상에 대해 조금 더 알아야 했다. 그렇게 거의 일 년 만에 만난 남자 친구는 내가 기억했던 모습보단 조금 더 핼쑥해져 있었다. 나만큼 극적인 변화는 아니었지만, 남자 친구에게도 분명 새로운 환경이 찾아온 것이었다. 남자 친구도 내가 독일에 오기 바로 2주 전에 베를린에 이사를 와서 회사를 출근하기 시작했다. 독일의 남쪽 지역에서만 살다가 처음 북쪽으로 올라온 남자 친구에겐 나처럼 베를린이 낯선 듯했다.


그렇게 오랜만에 남자 친구만큼이나 학생이 아닌 회사를 다니는 남자 친구의 모습도 낯선 모습이었다. 생각해보니 장거리 연애 기간 동안 우리는 내내 학생이었다. 각자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해야 하는 시간들이 있긴 했지만, 특별히 대화를 원 없이 하지 못하거나 연락을 자주 못할 이유는 없었다. 그런데 남자 친구가 일을 하고 나니 아무래도 예전처럼 이야기를 하지 못했다. 내가 독일에, 그 옆에 바로 있었지만 그에겐 나 외에도 해야 하는 그의 일, 일상이 있었다. 일하는 중에는 연락을 아무래도 할 수 없었고, 아침에도 늦잠을 좋아하는 내가 일찍 잠에 드는 남자 친구의 시간을 맞추지 않는 이상 주중에는 저녁 외에는 딱히 함께 보낼 수 있는 시간이 없는 듯했다.





아침 6시 반에 일어나 간단한 아침식사를 하고 회사로 향하는 남자 친구. 창문 밖으로 아이를 보내는 걸 지켜보는 내가 정말 나인가. 함께 여행했던 것과는 달리 이 아이는 내가 한국에서 먼 길을 날아왔어도 회사에 가야 했고 그런 그에게 나는 잘 다녀오라 인사를 했고, 특별할 것 없는 이런 아침의 풍경이 내가 여행이 아니라 누군가의 일상에 들어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생각했던, 우리가 생각했던 동거의 풍경이 이런 모습이었구나. 우리가 여행에서 만나 나름 긴 시간을 장거리 연애로 관계를 이어온 것이 영화 속 이야기에 가까웠다면, 이렇게 누군가 일을 하고 집안일을 나누고 하루 24시간, 서로를 사랑하는 것과는 별개로 또 책임지고 이어가야 할 사회적 관계 속에서 균형을 맞춰다는 것은 현실에 가까운 일인 것 같았다. 연애와 결혼의 차이를 동거를 하니 월요일부터 바로 느낄 수 있을 것도 같았다. 나의 일상이, 우리 관계가 이렇게 또 새로운 챕터 하나를 넘기나 보다.





아직까지 상황 속에 있어도 상황이 내 것 같지 않은 낯 섬. 남자 친구를 회사에 보내고 가만히 집을 둘러본다. 오랜만에 보는 나무 바닥. 걸을 때마다 나무 바닥 위엔 희미한 발바닥 본이 떠지고, 내 무게만큼 삐그덕 거리는 소리가 나는 나무 바닥은 초등학교 이후로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은 바닥이었다.


창문 사이로 초록이 가득한 집. 밤엔 보이지 않던 햇살과 분위기까지, 이제야 정식으로 이 집, 공간과 인사하는 듯한 느낌이다. 사실 어디에 가나 그렇지만 특히 외국에 사는 사람들에게 이 낯선 타지에서 그나마 내가 나여도 괜찮은 곳, 내가 나일 수 있는 공간은 집이다.

그래서 타지에서 머물게 되는 집은 유난히 많은 의미가 깃들 곳이라서 특별히 더 오랜 시간, 교감의 시간이 필요하다.


사실 집이 이렇게 생겼을 것이라고 아무런 정보 없이 왔었다. 내가 필리핀에서 한국에 오고 나서야 남자 친구도 베를린에 일을 찾게 되었고, 내가 베를린에 오기 2 주 전에야 남자 친구도 이 집으로 이사를 왔었다. 내가 독일에 도착하고 나서도 인터넷이 없었으니 베를린에 오기 전까지 화상통화는 물론 집 사진도 제대로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우리가 함께 지낼 집이라는 곳에 대해선 아무런 정보가 없었고, 뭐... 어떤 집이든 하며 지금까지 살아왔던 하숙집, 기숙사, 오피스텔을 떠올리며 상상해보곤 했는데 막상 이렇게 만나고 나니 예쁜 집이었다.





그렇게 집안 구석구석을 찬찬히 살펴보다 집안 색깔이 문득 달라져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하늘이 그렇게 맑다가 또 금세 구름 잔뜩. 이런 우중충한 날씨가 독일의 전형적인 날씨인가? 언젠가는 이런 삶도 일상이 돼서 당연하게 되고 무뎌지는 날이 올까? 문득 궁금해졌다. 어찌 보면 일상이 된다는 것은 무언가를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그래서 그 소중함과 감사함을 잊어버리는 것을 포함하는 것도 같았다. 불행 중 다행인지 나는 몸은 베를린에 있으면서도 나의 일상은 아직 필리핀에 더 가까웠다. 그동안 고생하고 외로워했던 경험들이 꽤나 있어서인지 남자 친구와의 이런 평범한 24시간의 일상을 보내는 것이 충분히 얼떨떨하기에 오히려 감사하며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이 감정이 우리의 동거가 끝나는 시간까지 이어질 수 있을까. 연애 중에는 몰랐던 그의 일상 속 모습을, 혹은 나의 모습을 우리는 여전히 서로 좋아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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