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여객기의 조종사는 정상적인 장거리 순항 구간에서는 aviator라기보다는 manager나 monitor에 가까운 경우가 많다. 특히, 기상이 양호하고, 돌발변수가 없이 정시 출항했을 경우 그러하다. 다음 waypoint(항로 상의 특정 지점. 통상 위치 보고를 하는 기준점)이 200~300마일 간격으로 오는 시베리아나 고비사막, 타클라마칸 사막 같은 오지나 북극권과 태평양 같은 대양주에서는 계획된 시간에서 작은 오차 범위 내로 허용되는 연료 오차 범위 내에서 비행하는 가를 확인하고, 전방의 적란운이나 선행 항공기들의 기상보고를 청취해서 기상을 파악하는 작업을 수행한다. 이런 작업들은 매우 중요하고, 졸거나 딴짓을 할 수 없게 만들지만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갈 때는 정말로 무료한 작업이 된다.
왜냐면 항법 자체는 IRS(관성항법장치)와 GPS, NAVAID(전파를 발신해서 특정 무선국으로부터의 방위와 거리를 날려주는 시설 - VOR/BORTAC/TACAN/NDB/ADF 등)로부터 위치 정보와 항공기 자세와 현재 속도와 고도 등의 비행정보를 받은 FMC(비행관리 컴퓨터)가 조종사가 입력한 고도와 속도, 경로를 유지하면서 알아서 날아가기 때문이다.(물론 끊임없이 수정 입력을 해줘야 하는 건 기본이다.)
다음 항법 지점까지 한 시간 이상 걸리는 경우, 시스템을 모니터하고 항로와 비행 상태를 적절하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차리고 있어야 하는데, 졸음이나 멍 때림을 방지하기 위한 같은 편조 (부) 기장과의 수다도 한계에 봉착하는 경우가 있다.
어느 틈에 cockpit은 침묵에 휩싸이고, 두 명 다 PFID(Primary Flight Indication Display : 자세와 속도/고도/상승 강하율/자침 방위 등이 한 개에 융합 표시되는 계기)와 ND만 노려다 보고, 어쩌다 스피커에서 들려오는 다른 항공기와 관제소간의 교신 소리만이 정막을 깨트리는 경우도 있다. 환한 낮의 육상이나 해안에서는 그나마 지형지물도 보이고 해서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데, 깜깜한 밤이나 아무것도 없는 대양에서는 정말로 아차 하면 졸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된다.
나는 이럴 때 하늘의 별의 위치와 항로 지도, 그리고 미리 스캐닝한 중학교 사회과부도 등을 참조하면서 ND(Navigation Display) 상에 표시되는 비행기 위치의 거리 scale을 자주 바꾸어 가면서 나만의 위치를 파악하려 애쓴다.
아무 생각 없이 비행하면서 모니터만 하다가 어느 순간 FMC 3대가 다 고장 나는 경우 대책이 없기 때문이다.
조종실 유리창에 얼굴을 찰싹 붙이고 북극성, 남십자성, 화성, 금성, 목성, 토성 등의 저명하고 밝은 별들과 은하수 등의 위치를 살피며 방위를 파악하고, 제한적이나마 보이는 지형지물들과 공항들의 위치를 파악해서 비정상 상황 시 divert 해야 할 공항을 미리 점찍어 두기도 한다.(차가운 유리창에 얼굴을 맞대면 정신이 번쩍 드는 부수적 효과도 있다.)
북위 60도 이상으로 위도가 올라가면 오로라가 보일까 창밖을 내다보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다른 기장들에 비해 부기장들에게 관광 가이드/역사 가이드를 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바이칼 호수를 지날 때면 1919년 볼셰비키 정부의 적군의 추격을 피해 남으로 도망치던 백군과 귀족 그리고 그 가족 25만 명의 몰살에 바이칼 호에만 산다는 물고기 오물과 물개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이르크추크에서는 수호이 공장에 대해서,
예카테린부르크를 지날 때면 그곳이 동서양의 분기점이라는 사실과 19세기 러시아 청년 귀족들이 "민중속으로"를 외치며 브나로드 운동을 하다가 귀양을 가는 시베리아의 출발점이라는 사실과 총살당한 니콜라이 2세와 그 가족들 그리고 아나스타샤와 요승 라스푸틴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고,
상페쩨르부르크와 라도가 호수를 지날 때면 러시아 혁명의 주인공이었던 순양함 오로라와 호박 궁전, 2차 대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때의 참상과 라도가 호를 둘러싼 공방을 이야기한다.
어제처럼 북태평양을 건너올 때면 재팬알프스와 니이가타, 설국과 도호쿠 대지진을, 알루샨 열도에 들어서면 아투 섬에서의 일본군 옥쇄와 세미야 비행장과 OTH(초수평선) RADAR, 그리고 북태평양 항로를 개척한 린드버그에 대해서, 알래스카에 들어서면 알래스카를 러시아로부터 사들인 윌리엄 수어드 국무장관과 지명들에 남아있는 러시아의 잔재, 우리나라 최초로 에베레스트에 올랐던 고상돈 씨가 숨진 6194m의 디날리 봉이 왜 매킨리 봉에서 이름이 바뀌었는지, 화이트호스를 지날 때면 9.11 때 자칫 격추당할 뻔하다가 강제 착륙당한 KE 085편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이 빠르게 흘러간다.
나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부기장이야 죽을 맛이겠지만 어쩌랴!
이런 말 많은 기장을 만난 부기장님의 불운인 걸....
야간비행 중에 칠흑 같은 어둠 속에 흩뿌려진 보석 같은 별들 속에 한참이나 은하수를 바라보았던 어제 일이 떠올라 글을 적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