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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폐인작가 Apr 15. 2024

낯선 곳에서 알게 된 건


불안을 피해 거센 눈보라를 뚫고 12월의 함덕에 왔다. 십오 분마다 변하는 함덕 날씨. 안개가 뒤덮였다, 잠시 바다가 보이고, 다시 눈보라가 휘몰아친다.


예약한 호텔 입구에 도착할 때까지 나는 눈보라와 싸웠다. 눈보라는 앞으로 걸어가고자 하는 날 붙잡고, 손을 얼게 하고, 발을 젖게 하고, 눈을 가렸다. 앞이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오 분만에 도착했을 곳을 장장 이십 분 걸렸다.


생전 겪어보지 못한 자연의 힘을 마주하고 호텔 로비에 겨우 들어선 나는 아무 생각이 들지 않았다. 계속 날 괴롭히던 불안, 실망, 서러움, 죄책감 등 날 지배하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은 눈보라가 쓸어 가버렸다. 나는 생존했다.


웃으며 날 맞이하는 데스크 직원들이 반가웠다.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따스한 방이 날 반겼다.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었음에도 창문 밖에 눈보라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제주는 내가 이곳에 온 지 스무날 만에 글쓰기를 허락했다.


나는 내가 추구하는 인간관계 성향을 잘 몰랐다. 나와 다른 사람들과 잘 섞일 줄 알았다. 아니었다.


그건 내 착각이었다. 일할 때 내 모습과 사적인 내 모습은 너무 다르다는 걸 제주에 와서 알았다.


나와 결이 맞지 않는 사람들과 한 공간에 있기 힘들었다. 어색한 공기가 사람들과 나 사이에 벽이 되었고, 자신에 대한 실망감이 목을 조였다. 나는 글을 쓰는 것도 힘겨워 이대로 인생이 망할까 무서웠다.


나는 후회했다.

지난날 내가 선택한 것과 행동을.


억울했다. 어떤 이들은 결이 달라도 장난치며 야, 너 하던데. 나에겐 그런 순간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내가 잘하려 애쓸수록 사람들은 멀어졌다.


스펀지처럼  질긴 식빵을 생크림에 찍어 입에 넣었다. 푸석한 질감이 녹아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순간이 썩 나쁘지 않았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식빵이었는데, 나와 같이 눈보라를 견디다 차게 식었다. 와중에도 나는 아이스 아메를 포기할 수 없었다. 로비에 들어오기 직전에 근처에 있던 카페에 들렀다. 카페 직원들은 나를 살아 움직이는 눈사람을 보는 것처럼 신기하게 쳐다봤다. 패딩 위에 잔뜩 쌓인 얼음 같은 눈을 털어냈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얼음 가득 주세요.’ 나는 굳은 입술을 열심히 움직였다. 그렇게 얼음 가득 담은 일회용 컵은 어느새 빈 컵이 되었다.


웃기지, 한 달 동안 묵을 곳 보다 하루만 묵을 이 방이 나에겐 최고라는 게.


외롭지만 외롭지 않았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방, 바람 소리, 따뜻한 온도, 어둡게 가라앉은 주황빛 가득한 방이 마음 어딘가 계속 날뛰던 불안을 잠재웠다.


삶에 대한 억울함을 담은 일기를 쓰다 말고 침대에 누웠다. 부드러운 시트가 몸에 닿는 감촉이 좋아 눈밭에서 하면 좋았을 나비 모양을 그렸다.


일어나 커튼을 걷고 잠시 창문 밖을 보니 함덕 날씨는 내 마음처럼 변덕스러웠다. 잠시 밤바다를 보여줬다가 이내 눈보라로 바다를 감췄다.


다시 침대에 누워 아이패드로 여러 영상을 멍하니 쳐다보다 어느새 방으로 숨는 2030 청년들의 서글픈 사연이 담긴 영상 알고리즘에 끌려갔다. 비슷한 처지로 보이지만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가진 청년들 옆에 또 다른 사연으로 소개되어도 전혀 이상할 것 없는 나.


까맣게 꺼진 화면에 담긴 내 얼굴이 낯설게 느껴졌다. 까만 화면 속 나는 내가 아닌 듯했다.


처음부터 너는 잘못된 선택을 했어, 안타깝게도 선택한 건 되돌릴 수 없으니 이제라도 깨닫고 다시 돌아가. 돌아가서 선택하는 것들은 지금보다 더 좋은 방향으로 선택할 수 있을 거야. 아마도.


제주라는 낯선 곳에 오지 않았다면 영원히 몰랐을 나란 사람이 썩 마음에 들지 않으면서도, 한편으론 나란 사람을 정의한 것 같아 좋았다. 이게 나다.


바꿀 수 없으니 나는 이런 날 계속 데리고 살아야 한다. 아직 내 앞에 수많은 날들이 남았다. 새로운 날들은 지난날과는 다르게 흘러갈 것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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