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작년부터 포스터만 보고 끌리는 영화를 보는 습관이 생겼다. 웃기게도 이렇게 선택한 영화에서 등장인물들 중 꼭 한 명은 ‘글쓰기’를 하고 있다. 불륜이라도 아름다우면 괜찮다의 대명사 ‘화양연화’에서도 양조위가 소설을 쓰고, ‘오늘밤 세계에서 이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에서 남주인공의 누나가 성공한 소설작가로 나오더니, 이번엔 싱글이란 단어가 무색하게 갑분 로맨스를 보여준 ‘싱글 인 서울’ 마저 작가가 되고 싶은 남주와 출판사 편집자인 여주가 나온 것이다.
“어떤 사람이 무언가 강렬히 바라는 게 있으면 그걸 위해 인생이 자꾸 그걸 그 사람 앞에 가져다줘요.”
어떤 유명 강연자가 말한 끌어당기는 알고리즘이 바로 이건가? 맞다면, 굳이 의도하지 않아도 온 세상이 게으른 내게 글 쓰라고 등 떠미는 상황 아닌지. 이렇게라도 글을 쓰라고 자각을 주는 건 아닌지.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는 아직 한참 부족하네…’ 스스로에 대해 강한 의심이 들어 몸부림칠 때마다 영화를 선택했다는 걸. 타이밍 좋게도 영화 속 인물들은 에세이 작가든 소설작가든 어떤 작가가 되어 나에게 위로와 조언을 건넸다. 말해봤자 해결은커녕 공감도 얻기 힘든 혼자 머리 싸매며 괴로워하는 이 고독한 시간에 대해 영화 속 인물들은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며 말했다. 그 눈이 꼭 날 보는 것 같았다. 기분이 이상했다.
글을 맛있게 쓰는 사람들에 대해 옹졸한 마음이 들다가, 내 비루한 현실을 깨달아 한탄하며 이불밑으로 숨어들다가, 이렇게 주저앉을 수 없지! 키보드와 볼펜을 붙잡다가, 다시 주변을 돌아보며 입을 삐죽 내밀고 나는 왜 저렇게 못살아. 또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나는 왜 작가가 되고 싶은 거지? 이게 내 길이 맞나? 내가 원하는 게 맞아? 답답한 마음에 필사만 해보다가. 그러다가 계속 그러다가.
잠으로 회피하려는 내게 영화 속 남자주인공의 누나가 말했다.
(정확히는 작중 아버지에게 말할 때였다.)
“처음엔 현실의 나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썼어요.
그런데 어느 때부터 변했어요. 글을 쓰면서 내가 쓴 언어를 통해 누군가와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작년부터 내내 불안하고 허하던 마음 한 구석이 일부분 채워지는 느낌. 다른 어떤 것보다 글을 쓰고 싶은 이유를 찾을 수 없어 괴로웠다. 돈, 명예 좋지. 그런데 더 근본적인 이유말이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내가 계속 글을 쓸 수 있는 원동력이 필요했다. 카페일에 미친 듯이 매달렸던 것처럼. 가족이나 지인에게 물어봤지만, 아쉽게도 글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뿐이었기에 나는 심히 외로웠다. 결국 스스로 답을 찾아야 했다. 답답했다. 그렇게 찾아 헤매던 답을 우연히 본 영화 속 인물에게 얻을 줄이야.
2)
그렇게 나름 만족하며 지내다가 달이 바뀌고 나는 여전히 책상 앞에 앉아 끄적이고 있었다. 또 문득 출판업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해졌다. 갑자기 많은 정보를 머릿속에 집어넣은 탓일까.
온라인 검색하다 피로해진 눈과 머리를 식힐 겸 튼 ‘싱글 인 서울’에서 생각지도 못한 출판의 뒷 이야기를 보게 되었다. 어떻게든 책을 잘 출판하고픈 편집자와 소수의 직원들 그리고 원고 의뢰를 받은 작가들의 엉뚱한 성격과 사생활.
그 모든 것들이 내겐 다른 의미로 설렜다.
작가 지망생 박영호와 출판사 편집자 주현진이 썸 타는 것보다 박영호가 자신의 신념을 고집 있게 주장하며 글 쓰는 모습이. 어떤 남자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헛된 망상하는 것보다 작가의 글을 보며 편집자로서 지적하며 글을 고치는 주현진의 모습이. 그 모습들이 내게 현실적인 꿈으로 다가왔다.
이런 말 하기 부끄럽지만, 공장에서 갓 나온 따끈따끈한 새 책 냄새를 맡는 편집자 주현진이 나는 부러웠다. 부러워하다 못해 영화 속 캐릭터일 뿐인 주현진을 질투했다. 그리고 능력 있는 편집자 주현진을 동경했다.
동시에 출판사의 현실적인 어려움을 본 것 같아 마음이 복잡해졌다. 내가 과연 할 수 있을까. 글로써 대단치는 못해도 근근이 벌어먹고 살 수 있을까. 영화가 끝나갈 때쯤 나는 내 실력으론 그럴 수 없을 거야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혀 급격히 침울해졌다.
한순간에 땅에 곤두박질친 내 마음처럼 생애 처음으로 출간한 책을 거하게 말아먹은 박영호가 인쇄물을 들고 강을 낀 다리에서 주현진을 만난다.
박영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던 주현진이 흘러가는 일상처럼 질문했다.
“글을 계속 쓰나?”
나는 조금 불편한 마음으로 그들을 보았다.
괴연 박영호는 어떤 대답을 할까.
“어렵지.”
박영호는 씩 웃었다.
그 햇살 같은 미소에 나는 맥이 탁. 풀렸다.
그래, 맞아. 글쟁이에겐 이건 당연한 거야.
나는 불편한 마음을 여전히 끌어안은채
박영호와 함께 주현진에게 대답했다.
“어려워도 어쩌겠어, 써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