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구 사투리를 구사하고 있다. 어르신들처럼 사투리가 그렇게 심하지 않다 생각했기에, 내 말투에 별 다른 문제를 못 느끼고 살아왔다. 지금도 그런 편이다. 어딜 가나 당당히 내 말투를 쓴다. 하지만 이런 나를 딱 한번 의기소침하게 만든 일이 있었다.
몇 년 전 지인을 만나러 서울에 갔을 때였다.
서울 지하철은 노선이 복잡하고 길다. 우리의 목적지인 공원은 멀어서 지하철 안에서 꽤 긴 시간을 보내야 했다. 그래서 나는 지인과 소소한 대화를 이어나가며 지루한 시간을 때웠다. 앉을자리가 없어 서서 가야 했지만 그리 힘들지는 않았다.
그런데 옆에서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왼쪽을 쳐다봤다. 짙은 파란 셔츠에 긴 머리의 여성이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치자 미간을 찡그렸다. 순간 나는 결례를 범했다는 생각에 반대쪽으로 비켜섰다. 하지만 여성의 눈길은 날 따라왔다.
처음엔 기분 탓인가 했는데, 내 말이 길어질수록 그녀의 구겨진 인상은 펴지지 않았다. 목소리가 컸나 싶었지만 나는 사람이 빼곡히 들어선 지하철 칸 안에서 큰 목소리를 낼 만큼 관종은 아니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나는 말을 아끼고 지인의 말을 듣기만 했다. 얼마 남지 않은 몇 코스를 찜찜한 기분으로 가고 싶지 않았다. 목적지까지 한 코스가 남았다.
그때 지인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곧 내릴 거니까 신경 쓰지 말자”
그때 알았다.
내 말투가 상대방에게 불편할 수 있다는 걸.
내가 예민한 줄 알았어요. 나는 한껏 풀 죽은 목소리로 말했다. 지인은 웃으며 그런 사람 가끔 있는데, 그렇게 노골적인 건 처음 봤다 했다. 그러면서 괜찮다며 내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지만 지인도 알았다는 건 그 칸에 있던 사람들 전부 그 상황을 알아챘다는 거 아냐? 그 사 십 분을? 특히 경상도는 목청 큰 걸로 인식하지 않아? 목소리 낮춘다고 낮췄는데 아니었던 건가. 부정적인 감정에 갇혀버린 나는 즐거워야 할 시간을 불편함과 눈치의 시간으로 보내야 했다.
태어나서 내 말투 때문에 남한테 그런 따가운 눈총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창피했다. 그래서 식당이든 카페든 어딜 가든 내 말투와 목소리를 신경 썼다. 전혀 쓸모없는 일이었지만.
그 이후로 나는 내 말투를 사투리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내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더 강해져서 그랬다고 해야 하나…(내 마음을 정확히 표현하는 게 아직 내 글솜씨가 모자라서 그런 거니 양해 바란다. ) 뭐랄까 부산이나 제주도에 가도 그 지역의 사투리가 있지 않은가.
그래서 그 지역 사람이 ‘오리지널 사투리’로 말하면 참 독특하게 들려서 매력 있다. 그렇다. 매력 있다. 내가 서울 말투에 매력을 느끼는 것처럼.
특히 화면에서만 보던 광주 사투리를 ‘본토 발음’으로 들었을 때의 그 재미란. 최근에 광주에 갔다.
버스터미널에서 내리자 할머니 두 분이 얘길 하며 지나갔다. 그 순간 내가 정말 이 지역에 왔구나를 체감시켜 주었다. 같은 나라에 살고 있지만 다른 세상에 온 것 같았다. (몇 년 전 서울처럼.)
광주 사람들은 친절했고, 음식은 맛있었으며 곳곳에서 서울, 경상도, 충청도 사투리를 들었다. 다양한 말투가 섞여도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일상에서 다양한 외국인을 마주치는 것처럼말이다. 우리는 이런 세상에 살고 있다.
그리고 만약 다른 곳에서 내 말투를 불편해하는 사람을 만난다면 나는 담담히 그 불쾌함을 지하철과 함께 떠나보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