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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Oct 30. 2023

잃어버린 사이를 찾아서

목표와 사이



  밤 9시, 서점 문을 닫고 지친 몸을 끌며 집으로 향한다. 집까지 빨리 걸으면 20분, 천천히 걸으면 30분 정도 걸린다. 집에 도착해 특별히 할 일이 있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발걸음이 빨라지고, 결국 20분 만에 집에 도착한다. 2층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를 때 신발 속 발이 두꺼워진 느낌이다. 딱 발목까지 무겁고 축축한 진흙탕에 빠진 듯하다.

  가끔은 의도적으로 바로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집 근처 놀이터에 가만히 앉아 있는다. 하루종일 깨진 조각 같은 생각을 이어 붙이고, 몽당연필로 쓴 일기처럼 하루를 짧고 단순하게 정리한다. 가끔은 가방에 넣어온 책을 펼쳐 가로등불 아래서 낭독하기도 하고, 근처 편의점에서 산 캔맥주를 천천히 마시며 내가 망각한 것들을 생각한다. 망각을 생각하다니! 그래도 생각하면 망각한 것 중에 슬프고 기뻐했어야 할 소중한 것들이 떠오른다. 10월 29일 참사. 오랜만에 찾아온 반가운 얼굴.

  내 가방에는 몸에 뿌리는 모기약이 있는데, 이럴 때 유용하게 쓰인다. 실제로 그런지는 모르지만, 가을 모기는 여름 모기보다 더 억세다. 수시로 모기약을 뿌리면서 어수선하게 생각을 정리한다.  

  그렇게 30분 정도 놀이터에 있다가 동네 한 바퀴 천천히 돌고 집에 들어간다. 한 시간은 가만히 앉아 있고 싶어도 조바심에 그러지 못한다. 조바심의 대상이 없는데도 심장 쪽부터 조여 오는 안달은 도대제 무엇인지. 그래도 자주 놀이터에 앉아 있으려고 노력하고, 그 노력은 빨라진 발걸음에 대한 숙고로 이어진다.

  천천히 걷자. 이 다짐은 우울하지 말자. 또는 여유를 갖자와 비슷한 울림을 다.

  그래서 내가 말하고 싶은 결론은 이거다. 천천히 걸어야 하는 이유는 잃어버린 사이를 찾기 위해서다.

  천천히 걷는 행위는 사이를 찾는 행위다. 천천히 걸을 때 알아챌 수 있는 보도블록의 색과 무늬, 가로등불 주위로 퍼지는 무지개와 자동차 헤드라이트에 춤추는 나무 그림자, 그리고 오래 봤지만 새롭게 보이는 간판 글씨체에서 느껴지는 묘한 낯섦과 푸근함.

  잃어버린 사이 속에는 익숙하면서 발견하지 못한 새로움이, 이 모든 것을 연결하는 서사적인 자극이 가득하다.    

  


  서점과 집, 그 사이의 길은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역할 말고도 길거리 그 자체의 정체성을 가진다. 어쩌면 시작과 끝을 이어주는 역할이란 건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시작과 끝은 내가 정한 것이기에 시작과 끝을 정하지 않는다면 길거리는 그냥 길거리로 존재할 수 있다. 내가 시작과 끝을 만들었기에 이어주는 역할이 생긴 것이고, 길거리는 그 역할에 갇히게 된다. 그리고 그 역할을 다 한 후에는 바로 사라진다.

  그러다 문득 뒤돌아 보면 내가 걸어온 길에 놀이터가 있다는 것이 보이고, 가로등불 아래 벤치가 노랗게 빛나고 있다는 게 보인다. 고개 돌리는 행위가 없다면, 내가 봤던 모든 것들은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이미지일 뿐이다. 내가 잠깐 머물고 쉬고, 뒤죽박죽인 하루를 재창조하는 여유를 가질 수 있는 공간이 아니다. 왜냐하면 나는 누구보다 빨리 목표를 달성해야 했다. 어렸을 때부터 목표에 갇혀있었고, 목표 달성이야말로 삶의 목표였다.  

 잃어버린 사이를 찾는 행위는 목표에 의해 잘려나간 망각에 대한 저항이기도 하다.


  아무 생각 없이 놀이터에서 놀던 때가 있었다. 그것도 목표를 잊어버리고 신나게. 초등학교 때였다. 집에 가는 길에, 친구들이 공원에서 축구공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그날은 분명 어머니가 학원 끝나고 일찍 집에 오라고 한 날이었다. 누군가 집에 온다는 했고, 집에서 예배를 드린다고 했다. 분명 친구들이 축구공을 놀고 있는 모습을 보기 전까지 나는 엄마와의 약속을 기억하고 있었다. 바쁘게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축구공이 친구의 발아래서 굴러가는 모습을 보는 순간, 나는 잊어버렸다. 그리고 가방을 벗어던지고 친구에게 외쳤다.

  “패스, 패스”

  저녁이 다 되어서 집에 도착했을 때 어머니와의 약속이 떠올랐다. 물론 등짝을 세게 맞았지만, 어쩌면 어리기 때문에 용서가 되는 행동이었을 것이다. 나는 순간 집으로 가야 한다는 목적을 잊어버렸다. 목적을 잊어버려야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다. 그것도 재미있게! 축구공을 차면서도 어머니와의 약속이 계속 떠올랐다면, 나는 축구공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공을 찰 때마다 잔소리와 등짝을 맞는 상황이 떠올랐을 것이다.  

  목표가 사라지는 순간, 사이가 나타났다.

  목표를 이루는 게 목표가 되는 삶을 살아왔고 그렇게 훈련되었다. 분명 이유는 있다. 두말할 것 없이 삶에서 목표는 중요하다. 다만, 목표에 재단되지 않은 삶, 목표와 목표 중간에 있는 사이의 삶도 중요하다. 사이 속에는 우리가 원하는지도 몰랐던 새로운 관계의 교차가 있다. 나와 당신, 나와 사물, 나와 책, 그리고 나와 새로운 꿈....

  집으로 가야 하는데, 그것도 밤늦게 집으로 향하다 갑자기 중간에 있는 놀이터에 앉아 한 시간을 죽치고 앉아 있는 여유를 배워본 적이 없다. 그건 여유가 아니라 방황이라고 불렸고, 시간 허비로 인식했다.

  내 인생과도 닮았다. 목표를 가진 삶을 살지 않기로 다짐하면서 살아왔는데, 가끔 보면 그건 허황된 구호에 지나지 않았다. 큰 목표는 아니더라도 아주 작은 목표를 세우고, 그 작은 목표를 이루지 못해 안달하면서 중간에 있는 수많은 사이를 버리면서 살아왔다.  

 


  서점에서도 일터라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많은 중간이 존재한다. 하지만 그 중간은 어떻게 사라지는지도 모르게 사라진다. 우리는 바로 사라지는 그 중간에 항상 머물면서도 말이다. 출근과 퇴근 사이. 첫 번째 책 판매와 마지막 책 판매 사이. 책을 얼마 팔았냐는 결과 값이 아닌 그 사이에 나는 존재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목표와 목표 그 사이, 찰나의 쌓임을 흘려보낸다. 인식하지 못한다. 매일 똑같은 일상이란 결과만 남는다. 그 다채로운 사이를 버리는 순간 우리는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일부러 여행을 통해 그 빈 공간을 찾고 새로움을 인식한다. 하지만 여행도 똑같이 일상을 탈출하기 위한 목표가 되어버렸다. 더 이상 여행은 방황이 아니다. 삶의 사이가 아니다. 여행 자체가 목표가 되어버렸다.

  목표와 목표로만 꽉 메워진, 그래서 더욱 똑같이 되어버린  삶에서 뛰쳐나간다. 아닌 사이 속으로 풍덩 빠진다.

  잃어버린 사이를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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