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 책을 왜 읽지?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슬프게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이 준비되어 있었고, 그 답은 이제 유효기간이 지났다. 역시 슬프게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알 수 없지만, 나는 책을 읽는 행위가 구원이 아니라를 것을 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면 구원은 없다. 책 속에는 더더욱 없다.
서점 구석에서 책을 읽고 있는데 스피커에서 이별 노래가 흘러나온다.이별했지만 그 이별 속에는 다시 만나고 싶은 사랑의 욕구가 가득하다. 책을 읽을 때마다 나도 뭔가와 이별하게 되지만 사랑받고 싶은 욕구가 가득 치민다. 그래서 쓸쓸하게 슬프다. 없는 대상에게 뭔가를 갈구하는 못난 얼굴이 글 속에서 자꾸 튀어나온다.
참으로 구원이란 말처럼 미련하고 멍청한 단어가 없지만, 나는, 인간은 멍청하기에 가끔 이 말을 쓴다. 나도 예전에 책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쓴 적이 있다. 내가 멍청하다는 증거다.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느끼지만, 모른 척한다. 느끼는 것 그대로 아는 척하면 그 사람은 따돌림당한다. 사회화라고 명목으로 서로를 위해 느낌의 스위치를 내린다. 구원이 없다는 것을 느끼지만, 입으로 또는 글로 적어놓고 그 글을 읽으면서 나를, 독자를 속인다. 독자도 속아준다.
가끔은 진실보다는 모른 척이 세상을 만든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래서 여전히 믿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손님이 왔다 갔고, 손님이 구매한 책 내용이 무엇인지 커피를 마시며상상했다. 제목과 저자만 아는 책이 서점에 수두룩하다. 알지 못하는 내용을 아는 척하고, 손님도 내 말을 듣는 척한다. 나는 손님을 탐색하고 손님도 서점과 나를 탐색한다.
나는 자신 있게 내가 좋아하는 책을 추천한다. 손님은 내가 추천한 책을 살피는 척한다. 아, 마음에 들지 않는구나. 나는 눈치껏 자리를 피한다. 손님은 자신이 원래 사려고 했던 책을 산다. 나는 손님이 들고 온 책에 대해 칭찬한다. 우리는 서로를 모르지만 서로에게 충분히 좋은 인상을 주고받는다. 깊고 강한 연결보다 약한 연결의 다발들이 예의와 지성으로 표현된다. 강요하지 않으면서 서로의 취향을 공유한다.
책을 산 손님이 다시 서점을 찾을지는 알지 못한다. 다만, 나는 손님이 들고 간 책에서 없는 뭔가를 찾기를 바랐다. 역시 나는 멍청하다.
알지만 모른 척하는 경우도 많지만 모르기에 모른 척하는 경우가 더 많다. 느끼지만 우리는 그 느낌을 서서히 무감각하게 만들었기에 느낌을 믿지 않는다. 느낌의 스위치를 자꾸 꺼버릇해서 꺼져 있는 상태를 모른다. 그런 게 어른일까? 이성이란 카테고리 안에 넣지 않아야 할 느낌의 영역까지 넣고 이성적으로 판단하면서 오히려 배제한다. 생각보다 비논리적인 우리의 이성을 믿는 척하면서, 또는 믿어버리면서.
그래서 어른의 사랑은 항상 상대가 가지고 있는 것을 따지고, 서로의 급을 따지고, 서로의 집안을 따진다. 우리는 모두 안다. 사랑에는 그런 것이 필요 없다는 것을. 하지만 모른 척한다. 그리고 사실 모른다. 상대가 가진 것이 사랑의 매력이 되고, 우리는 그것을 사랑한다. 욕망 없이 오로지 타인을 위한 순수한 사랑이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것을 모른 척하면서 사랑을 한다. 모른 척하기에 사랑이 가능한지도 모르겠다.
이렇게 무의미한 이야기를 늘어놓는 이유는 우리 삶이 무의미한 것들로 이뤄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무의미한 이야기는 오히려 의미가 있다. 무의미한 삶에서 의미가 있는 이야기는 오로지 무의미한 이야기다. 공이 없이 축구를 하는 사람들처럼, 우리는 없는 공을 차고 받고 슛을 한다.
그리고 항상 외친다. 패스! 패스!
그것도 아주 열심히. 성심을 다해서. 그리고 어느 순간 골을 넣는다. 상대 팀도 골을 넣는다. 우리는 공이 없는데도 분명 골을 넣는다.
바보들이 하는 축구경기 같지만,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삶을 긍정한다.
책 속에는 구원이 없다. 공이 없다. 그런데도 우리는 열심을 공을 차고 골을 넣는다. 세상에서 가장 멋진 세리머니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