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은 창백한 틈이다.
책방 문을 닫고 집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깨닫는다. 어제도 문득 깨달았지만, 오늘도 문득이다. 겨울이 묽어지고 있다. 따뜻해진 바람이 모든 사물을 휘감고, 햇볕이 차곡차곡 쌓인다. 이제 겨울은 숨어야 한다. 녹아서 땅속에 스미고, 그 길에 따라 새싹이 돋아난다. 그렇다고 겨울이 꽁꽁 언 것처럼 흐르지 않고 계속 묶여 있는 건 아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해야 할까?
이번 겨울에 내가 쓴 모든 글은 그것을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겨울은 ( )이다.
올해 겨울을 보내는 동안 내가 한 노력은 모두 괄호 안에 알맞은 단어 하나를 쓰기 위해서다. 그런데 알맞은 단어라니? 글을 조금이라도 쓴 사람은 알 것이다. 알맞은 단어는 존재하는 것 같지만 결국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알맞다고 우기는 것이고, 그 우김이 가끔 여러 사람에게 공감을 표한다. 때로는 감탄한다. 아, 나도 저렇게 쓰고 싶다. 알맞다기보다 욕망한다.
하지만 우리는 찾고 찾았던 단어를 괄호 안에 넣은 순간 의미는 너무도 다양해서 사라져 버린다. 알맞은 단어보다는 가끔은 알맞지 않은 단어가 괄호 안에 적합할 수 있다. 중심이 아닌 곁가지가. 그런 곁가지를 찾아내는 것이 작가의 몫이다. 먼 것과 먼 것을 연결하여 중심이 되게 하는 것. 글 쓰는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고 의지다.
그런데 내가 중심이라고 믿었던 것이 중심이 아닌 것들이 연결된 것이라니! 우리는 그것을 모르기에 처음부터 먼 것을 찾지 않고 곧바로 중심이 되기를 원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항상 곁가지이기에, 곁가지가 아니라고 우기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나답게 살겠다는 마법 같은 말이 유행하는 이유라는 생각도 든다.
내가 나답게 살다니? 나 답다라는 것을 알다니? 숱한 철학자가 기술했듯이, 내가 어떤 존재인지 알고 있는 사람은 사실 내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모르는 존재이다. 대부분 나라고 착각하는 것은 내가 하기 싫은 것에 대한 반발에 의해 생긴 하나의 허상인 경우가 많다. 나를 힘들게 하는 것을 걷어내면 나 다운 내가 된다는 허상. 또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하면 나 다운 내가 된다는 허상.
그토록 원하던 나답게 산다고 외치며 그렇게 살았다고 책은 낸 작가들은 지금도 나답게 살고 있을까? 봄이 왔다고 착각하는 순간, 여름이 오고 가을이 지나가고 다시 겨울이다. 내가 나답게 살고 있다고 말하는 순간 나는 나답게 살고 있는 현재가 흘러가 버린다. 결국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고백일 뿐이다. 어떤 똑똑한 작가는 나는 나답게 살고 있다고 말하면서, 나는 나답게 살고 있지 않다고 고백한다.
어쩌자는 것인지?
어쩌면 나답게 살고 싶다는 말은 타인에게 당신은 당신답게 살고 있지 않다는 지적이고 고발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는 요즘 매일 누군가에게 고발당한다. 너답게 살라고. 너의 삶을 찾으라고. 고발당한 나는 정확히 어떤 죄를 지었는지 모른다. 다만 고발당해서 마음이 아프다. 슬프다.
파울 클레의 <구름다리의 혁명>이라는 그림이 있다. 구름다리의 다리가 일직선으로 굳건히 서 있는 것이 아니라 살짝 어긋나 있다. 한쪽 발이 앞으로 나와 있다. 이럴 수가, 구름다리는 걷고 있다. 구름다리는 양쪽을 이어주는 역할을 한다. 양쪽을 연결해야 하니 스스로 움직이면 안 된다. 움직이면 양쪽을 이어 줄 수 없고 이어진 연결이 끊어진다. 그럼 의미에서 구름다리는 이어진 양쪽에 속박되어 있다. 그런데 구름다리가 걷기 시작한 것이다. 이어진 것이 끊어졌다. 그런데 어디로 이동하지. 그것은 모른다.
혁명은 혁명을 이뤄낸 순간이 아니다. 양쪽에 이어진 구름다리의 역할을 끊어낸 순간이 아니다. 순간과 그다음 순간이 어디론가 가는 행위다. 지루하고 지난한 행위다. 혼자 가서도 안된다. 그러면 길이 되지 않는다. 각자 자신의 욕망을 따라 움직이겠지만, 여럿이 모여서 함께 걷는다. 일치의 문제가 아니라 함께 가는 행위의 문제다. 도착지가 달라도 된다. 향하는 방향이 중요하다.
나 다운 것은 나 혼자 만드는 것 같지만, 사실 아니다. '나'라는 존재 자체를 혼자 만들지 못하고 수많은 관계를 통해 만들어지는데, 어떻게 나 다운 것을 혼자 만들 수 있겠는가. 혹여나 다운 것을 찾았다면, 그 사람은 모든 관계를 찾고, 그 관계를 하나하나 정의했다는 뜻일 것이다.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구름다리의 양쪽에 연결된 것에 의해 구름다리라는 정체성을 갖게 된다. 구름다리가 걷기 시작해 양쪽이 떨어져 그 유용성을 잃어버렸고, 어쩌면 나 다운 것을 읽어버렸는데도 여전히 구름다리는 구름다리다. 구름다리는 나 다운 것에 집착하지 않고 그냥 앞으로 걷는다. 혁명은 그렇게 온다. 끊어내는 행위 다음에 더 지루한 삶을 견디며 걷는 것을 통해서.
구름다리의 혁명은 걷는 행위에 있다.
그것도 함께!
나 다운 것은 혼자 만들지 못한다. 나답게 살라는 무수히 들리는 마법 같은 그 말이야 말로 시대가 만들어낸 강요의 산물이다. 오히려 나답게 산다는 것은 나답게 살라는 강요와 비난이 만들어낸 허상에서 벗어나는 노력이다. 나답게 산다는 말에는 우리 모두는 다르다는 뜻이 깊이 침투해 있다. 모두 다르니 강요하지 말라, 또는 모두 다르니 네가 하는 것도, 내가 하는 것도 모두 맞아. 그런데, 당신은 정말 다를까? 모두가 똑같아야 한다는 전체주의의 강요도 문제지만, 모두 다르다는 극단적 다양성 또한 도망의 한 형태다.
모두가 다르다는 허상에서 벗어나면 주위에 누가 있는지 보인다. 우리는 대부분 같다. 같은 시대에 살고,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는다. 똑같은 나라에 살고, 똑같은 질서를 지킨다. 우리는 우리가 사는 시대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하지만 아주 조금 다르다. 그 조금 다름이 나 다운 것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 모양은 똑같지만 조금 다른 구름다리가 각자의 색을 가지고 걷는 것처럼. 어쩌면 나 다운 것은 지루한 삶의 진행 방향이다.
나와 당신이 함께 걷는다. 우리는 색이 다르고, 걷는 폼도 다르다. 하지만 당신은 내가 바로 옆이 아니더라도 근처 어딘가에서 나와 닮은 누군가 걷는 것을 믿는다. 그래서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그리고 발견한다. 우리는 같다. 그렇지만 아주 조금 다르다는 것을 끝없이 확인한다. 그래서 나는 나답게 걸을 수 있다. 나답지 못하다는 비난과 강요가 아닌, 그것을 이겨낼 정도의 두려움과 떨림을 가지고.
그 두려움과 떨림이 예술을 만들어 낸다. 아주 작은 차이를 민감하게 느낄 때, 감히 말하면 그 좁은 공간이 우주가 된다. 우리는 그 작은 우주를 끝없이 탐색한다.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날 때 예술을 예술답게 만든다.
혼자 자주 걷던 거리가 혼자가 아니라는 걸 느낄 때가 많다. 혼자지만 주위를 둘러보면 누군가 걷고 있고, 아주 가끔이지만 집 앞에 나와 있는 어르신이 나에게 인사를 하기도 한다. 아마 누군가와 착각해서 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냥 평범한 인사!
오늘은 겨울 치고는 햇빛이 좋아. 이렇게 대문 앞 의자에 앉아 햇볕을 쬐고 있으니 기분이 좋아. 너도 혼자 걷고 있지만 햇볕이 등을 천천히 밀어주고 있지.
혼자만의 착각일 수도 있지만, 이렇게 말을 걸어주는 것만 같았다. 나는 이렇게 자주 거리를 걷다가 불현듯 여기저기에 삶이 가득하다는 것을 깨달을 때가 있다. 정말 문득. 단 한 발을 내딛는 것만으로도 누군가의 삶을 불쑥 들어가고 있다는 느낌. 내 앞마당이야. 내가 어렸을 때 뛰놀던 골목이야. 여자친구와 처음으로 키스를 했던 곳이야. 아, 그리고 누군가의 죽음과 불행도 가득하다. 친적과 갈등이 있고, 부부 싸움의 앙칼진 외침도 가득하다. 밤의 작은 창에서 우윳빛으로 뿜어져 나오는 화목함도 있다. 갈등과 따듯함. 죽음과 탄생이. 인간의 눈으로는 쉽게 알아챌 수 없는 조화로움이 가득한 거리. 그렇게 너무도 인간적으로 부조리한 삶이 조화롭게 가득하다.
내 경험이 아니지만, 누군가의 경험이 가득한 거리에서 문득 따스한 충만함을 느낀다. 혼자 걷지만 혼자 걷지 않는다고 느끼는 이유이다. 보이지 않지만 함께 걷고 있다.
한겨울 그토록 추웠던 겨울날, 새벽 산책을 하면서 나는 내가 흐른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제 시작이구나. 겨울이 왔고, 그동안 나를 굳게 만들었던 것들은 이제야 생각하게 되는구나. 봄, 여름, 가을은 나에게 내 안에 가득한 굳어 있는 것이 어디에 자리하고 있는지 깨닫게 한다. 숨을 쉴 때마다 폐 속으로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와 만났을 때 깨닫는다. 어제 새벽 산책은 춥지 않았다. 기온을 확인해 보니 영하로 떨어지지 않았다. 바람도 순풍이다. 곧 봄이 오겠구나. 나도 모르게 읊조렸다.
그렇게 겨울은 흐른다. 흐름의 시작은 봄이 아니다. 겨울이 흘러야만 봄이 뿌리내리고 꽃을 피우는 것이다. 언제나 시작은 처참히 무너졌을 때이다. 자신이 꽁꽁 얼어붙었다고 깨닫는 순간이 시작이고, 그때가 흐리는 순간이다.
겨울이 지나가고 있고 이미 시작했다. 겨울 동안 내가 썼던 글이 아마도 그 출발일 것이다. 그래서 다음 겨울이 내 안에서 이미 시작되었다. 겨울이 지나가자 내 안에서는 다시 겨울이 자라고 있다. 창백하지만 밝디 밝은 빛이 안갯속에서 빛난다. 멀지만 가깝게. 가깝지만 멀게.
나에게 겨울은 창백한 빛이고, 그건 창백한 틈이다. 틈에 숨어서 숨 고르기를 한다. 매년 똑같은 겨울이 왔고, 아주 조금 다른 겨울이 지났다. 창백한 빛을 향해 뚜벅뚜벅 걷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