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연변이
생라면과 싸구려 와인을 마시며 침대에 앉아있다. 생라면은 살짝 눅눅했고, 술은 생각보다 달았다. 곧 휴가가 끝난다. 온몸을 이불로 뒤집어쓰고, 마치 동굴에서 겨울이 끝나기를 기다리는 원시인처럼 가만히 있다. 아무 할 일이 없는 원시인은 쟁여놓은 음식을 야금야금 먹으면서 다시 사냥할 날을 기다린다. 기다리다 지친 원시인은 벽에 그림을 그린다. 벽에 가득한 동물을 향해 창으로 찌르는 연습을 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은 동안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벽화를 그리든, 벽화를 향해 창을 찌르든 실제로 자신 앞에 떨어지는 음식은 없지만 그들은 그것을 열심히 한다. 자신 앞에 존재하지 않지만 분명 존재하는 것들을 향한 찌르기 연습을.
왠지 집 전체가 텅 빈 느낌이 든다. 내가 있지만 나라는 존재가 그냥 하나의 사물처럼 느껴지는 건, 내가 점점 희미해진다는 생각 때문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나는 희미해진다는 생각을 거부할 수 없다. 예전에는 지금 나이가 된다면, 삶에 대해 그리고 나에 대해, 더불어 나를 둘러싼 환경에 대해 대부분 이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감에 따라 더 많을 것을 잊어버린다는 생각이 든다. 아니, 적극적으로 삭제한다는. 그래야만 버틸 수 있다는 극명한 진실 때문에.
그래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산다는 것은 버티는 것이다.
예전에 읽었던 미셸 우엘벡의 <소립자>를 독서모임 때문에 다시 집어 들었다. 2-3번은 읽었을 텐데도 오래전이라 처음 읽는 느낌이다. 보이지 않던 것도 보인다. 형이상학적 돌연변이. 이 단어가 중요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진지하게 생각하지 않고 그냥 흘려보냈다. 그런데 이번에는 다르게 와닿는다. 형이상학 돌연변이,라는 단어에서 나는 한동안 멈춘다. 그다음 이야기와 내용을 습득하기 위해서 읽지 않아도 되니, 그러니까 숙제를 하듯 한 권을 끝내야 한다는 강박이 없으니, 이 단어를 읊조리는데 오늘 하루를 몽땅 써도 괜찮다.
이 단어에 멈춘 이유는 아마도 내가 어떤 침범을 느꼈기 때문일 것이다. 그전에 읽었을 때 느끼지 못했던 어느 한 부분이 불쑥 튀어나왔고, 그 돌발에 생경함과 동시에 보이지 않았던 부분을 보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 돌발을 우리는 그대로 습득하기 힘들다. 말 그대로 돌발이고 생경함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시간이 걸리고, 그건 귀찮은 일이다. 누군가 해석해 준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것이 지식이 되어 내가 깨달았다고 착각하는 것이 더 쉬운 일이다.
하지만 이런 돌발적 생경함에 집중하면 나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얻게 된다. 지식이 아닌 나를 아는 존재이해. 그리고 새로운 틀을 얻게 된다. 그것이 작가가 주어진 틀 안에서 찾든, 내가 스스로 작가의 틀을 부수며 얻은 틀이든, 기존에 있던 지평을 무너트리면서 나온다. 기존의 질서와 그 질서 외부와 섞이면서 확실했던 경계가 흐려지면서 사라지고, 나는 불안하다.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 어쩌면 새롭게 만들지 않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지만, 우리 인간은 그 상태를 버티지 못한다. 경계 없음의 불안은 때로는 인간을 죽게 만든다.
그래서 적극적인 경계 만들기가 이뤄진다. 주어진 경계에 자신을 집어넣는 소극적 노력이 아니라 흐려진 경계를 다시 세우기 위한 적극적인 노력. 그 에너지. 그 파장. 말 그대로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다. 새롭게 튀어나오는 것은 돌연변이일 수밖에 없다. 기존의 가치와 기준으로 재단할 수 없기 때문이다.
겨울이 왔고, 나는 새로움을 항상 생각한다. 허울뿐인 새해지만, 그래도 고맙다. 억지라도 출발선에 나를 가져다 놓는다. 출발선이 모두 다르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출발을 말한다. 총성이, 아니 밤 12시 폭죽이 울리고 출발한다. 총알처럼 달리는 사람도 있지만 출발선에서 안절부절못하는 사람도 있다.
물론 새로움은 출발선에서 나오지 않는다. 오히려 반복되는 그 순환고리를 깨트릴 때가 곧 새로움이고 새로운 출발이라는 생각이 든다. 반복된 이 과정을 와해시키는 힘이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기존의 것을 깨는 힘이 곧 새로움을 만들어내는 힘인 것이다. 하지만 기존의 것을 무시해서는 안된다. 기존의 있어야만 차이를 만들어낼 수 있다. 기존의 것 또한 차이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결국 차이에서 차이를 만들어낸다.
우리가 향유하는 예술 또한 그래왔고, 역시 그럴 것이다. 기존 예술을 깨트리고 새로운 예술이 나오고, 우리는 그 새로운 예술이 시간이 지난 후에 차이가 더 이상 차이가 아닐 때, 차이가 기존 질서가 되었을 때 배운다. 기존 질서가 된 예술은 그 전의 기존 질서를 깨트리면서 나왔고, 그 안에는 기존 질서를 깨트렸던 에너지를 품고 있다. 그 에너지는 그다음 차이를 만들어 낸다.
내가 지금 향유하고 있는 건 기존 질서이다. 그것을 알고 느껴야 한다. 그래야만 그 안에 숨어 있는 차이를 만들어 냈던 에너지를 함께 느낄 수 있다. 모든 예술가는 그 에너지를 느끼는 사람이다. 그들의 감탄은 예술 작품의 훌륭함보다는 차이를 만들어낸 열정과 에너지에 대한 감탄이다.
혹여, 당신이 예술품을 보고 감탄하고 싶다면 그 예술품이 얼마나 훌륭한지에 집중하기보다 그 예술이 어떤 규칙과 질서를 깨트리고 나왔는지, 그 탄생의 순간의 에너지에 집중했으면 한다. 감탄은 이미 만들어진 것에서 오지 않는다.
소립자는 형이상학적 돌연변이를 잉태한 그 에너지에 대한 소설이다. 당신은 이 소설을 읽고 그 에너지를 느꼈을까? 기존 질서에 대한 신랄한 비판보다는 그 비판과 비평을 가능케 한 에너지, 그리고 그 비판을 넘어서 돌연변이를 잉태한 탄생의 순간에 집중해야 한다.
내 삶의 지평을 깨는 순간이 결국 돌연변이를 만들어낸다. 과연 나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가? 어디에 존재하고 있는가?
우리는 어디서 왔는가?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내가 있는 곳은 내가 도착한 곳이면서 아니기도 하다. 도착한 곳은 어디로 향한 지 선택하는 출발지이다. 머물렀다면 떠나야 한다. 그 출발은 항상 지금 내가 서 있는 곳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그리고 위대한 예술은 내가 딛고 있는 발판을 깨면서 튕겨져 나간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폴고갱의 그림을 감상하는 백인들에게 묻는 것이다. 어디서 왔는가? 그런데 원주민이야.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백인이야. 이 세계의 지배자야. 우리가 중심이라고. 우리가 곧 세계야. 그런데 왜 우리가 없어? 우리는 어디로 갈 것인가? 여기에는 우리의 미래가 없군. 이 그림에서 원주민을 지워버리고 그림의 상징에 집중해야지. 어린 아기와 청년, 그리고 노파의 모습이 보이는군. 그래 이것이 인생이지. 그림 속에 가득한 야성미를 봐. 그래 이건 위대한 작품이야.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이렇게 해석하는 사람들이 지운 짙은 황토색 피부의 원주민 속에 가득하다. 우리는 이 그림을 해석할 때 원주민은 '야성미'로 대체된다. 무슨 일이 일어난 것일까? 뻔히 보이는데도 보지 않고 지워지고 가려진 것. '우리'라는 카테고리에 원주민을 넣기를 주저하는, 아니 파시스트 우생학처럼 삭제해 버린 당신의 지평, 그 지평을 깨트린다.
그 에너지가 향하는 곳에 차이가 있다. 새로움이 있다. 없는 곳을 향해, 가려져 사라진 곳에 끝없이 찌르기 연습을 한다.
겨울을 좋아하는 이유가 있다. 겨울은 끝을 말하면서 새로움을 말한다. 그 둘을 함께 품고 있다. 끝이면서 처음을 말한다. 추위에 떨면서 따뜻한 봄을 기다린다. 상반된 두 가지 의미를 품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아니, 그렇게 대상을 바라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결국 겨울은 내가 바라보는 대로 만들어진다. 두 가지 속성이 있다고 해도 한 가지 속성으로 보면 그냥 한 가지 속성이 가득한 무엇일 뿐이다. 위대한 예술은 항상 누군가의 끝에서 피어난다. 피어난 예술은 또 새로운 예술의 탄생을 예비하는 끝이 될 운명을 가지고 있다. 두 가지 속성이 겨울처럼 가득하다.
침대 안에 있는데도 이불 밖으로 튀어나온 어깨와 얼굴이 춥다. 겨울은 나에게 돌연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