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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Feb 18. 2024

영상 18도

망설임

  봄이 온 것 같지만, 겨울이다. 몽글몽글한 따뜻한 바람이 불면 아 봄이구나, 싶다가도 바로 다음날 날카로운 칼바람이 불면 여전히 시린 겨울임을 실감한다. 추울 때는 겨울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따뜻한 봄바람을 맞고 있으면 벌써 지나간 겨울에 대한 아쉬움이 몰려온다. 항상 이런 경계는 떠나고 만나는 그리움과 설렘이 가득하다.

  그리고 경계에는 망설임도 가득하다. 정확히 겨울이라고 부르기 힘들고 봄이라고 부르기 힘든 계절이 스스로 뿜어내는 망설임이다. 사실 겨울과 봄은 인간이 붙인 단어에 불과하므로, 겨울의 망설임은 나의 감정을 대입한 느낌의 표현일 뿐이다.  

  그렇게 겨울이 망설인다. 실제 자연이 망설이는 게 아니라 인간이 붙인 겨울이 망설인다. 올해의 겨울이 다른 해보다 더 간절히 망설인다.  

  좋은 징조다.

  나는 망설임을 좋아한다. 망설임 없이 빨리 겨울이 지나가기를 바란 적도 많기에, 올해 겨울이 망설인다고 느낀 이유는 내가 겨울이 빨리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서일 것이다. 이번 겨울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장필립 뚜생의 <망설임>이란 소설이 있다. 오래전에 절판된 책이다.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망설임에 대해 이야기한다. 어떤 주제도, 우리가 흔히 소설에서 원하는 구성도 없다. 등장인물도 중요하지 않다. 굳이 주제를 고른다면 망설임 그 자체다. 오로지 누군가를 찾아가는 동안의 망설임에 대한 서술뿐이다.

  그래서 기승전결 같은 오르락내리락하는 기복이 없는 지루한 소설일 수도 있다. 그런데도 끝까지 읽게 만드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망설임에 대한 망설임이라는 생각이 든다. 소설은 이래야 한다는 규정에 대한 부정이고, 그 부정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모르는 읽는이의 망설임 말이다. 뭐가 정해져 있단 말인가! 망설이는 사람은 '정확한 것이 없다'와 '정확한 것이 있다',라는 두 가지 서술 사이에서 갈팡질팡한다.

  이 두 서술 중 어느 곳에 도착하든, 끝까지 밀고 나간다면 인생 자체가 환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현실에 발을 딛고 인생을 산다. 그래서 환상이라고 치부할 수도 없다. 망설임은 환상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는 망설임이기도 하다. 망설임 자체가 인생인 것이다.   


 

 나도 자주 망설인다. 망설이는 이유를 아마도 내가 정확히 해야 할 일이 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반문이 생긴다. 망설임이 없는 사람들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정확히 알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내가 하고자 하는 일을 안다고 착각하는 것. 그래서 의심 자체를 삭제하는 것이 어쩌면 망설임을 없애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이다. 과연 내가 하고자 하는 일, 그러니까 자신을 정확히 아는 이는 누가 있을까?

 너 자신을 알라!

 이 말의 진의는 너를 확실히 알라는 뜻이 아니라, 자신을 확실히 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니, 네가 스스로 자신을 알고 있다고 착각하지 말라는 뜻이다. 산파술은 자신을 알고 있다고 믿는, 자신이 가진 지식과 신념을 몽땅 무너트리는 기술이다. 그래서 너는 너를 알고 있어?라고 되묻는다. 소크라테스 산파술을 겪은 사람들은 자신의 무지를 숨기기 위해 버럭 화를 내거나 자신의 무지함을 깨닫고 처참히 무너진다. 아, 나는 나를 모르는구나. 갑자기 말을 더듬는다. 방향을 잃어버린다.

  그러니 망설임은 어쩌면 내가 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지는 무지의 자각이다.

  간혹 당당한 사람들 중에 자신이 자신을 모른다는 것을 숨기기 위해 사회적 지위를 내세울 때가 있다. 일류대학을 다니면 괜히 어깨가 펴지고, 호주머니에 돈이 두둑이 있으면 발걸음에 힘이 실린다. 어쩔 수 없기는 하다. 내가 사회와 연결되어 있고, 그 연결과 시선이 나를 정의하는 또 다른 나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시 '하지만'이란 단어가 붙는다. 산파술은 그것에만 의지해 자신을 표현하는 기반을 깨트린다. 당신이 얼마나 사회적 지위에 매여있는지를 알게 한다. 사회적 지위가 자신의 정체성을 오히려 가리고 있다는 것을 반대로 알게 해 준다.

  물론 사회적 지위 또한 그 사람이 이뤄놓은 그 사람의 조각 중에 하나다. 그리고 그것은 그 자신을 많은 부분 정의한다. 다시 말하지만, 일부분이다.  그 일부분이 자신 전체를 정의한다면 나를 사회에 끼워 맞추는 꼴이 된다. 그게 편하기는 한다. 나 대신에 사회가 나를 정의해 주고, 타인도 그렇게 곧바로 인식한다. 사회생활을 하기에는 그것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게 훨씬 유리하다.

  이 끼워 맞춤에는 틈이 없기에 흔들림이 없다. 그런 사람에게는 망설임이 존재할 수 없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존재를 망설이기 시작했다면, 망설임은 잘 끼워진 사회적 지위에 틈을 만들어낸다. 자신이 딛고 서 있던 기반이 순식간에 무너진다. 그때가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생의 위기일 수도 있다.  산파술은 그렇게 무너지기 전에 무지를 자각하고 무지에서 다시 자신의 삶을 재건하라는 명령이다.   



  서점 카프카에 가득한 책도 망설임의 증거이다. 이 책을 들여놓을까, 고민하고 고민한다. 그 고민의 흔적이 책장에 꽂힌다. 만족할만한 선택이 항상 이뤄지지 않으니 후회도 가득하다. 가끔 카프카에 오는 사람도 망설임이 가득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든다. 책방지기인 나에게 말을 거는 것도 망설이는 사람도 있고, 책을 사주는 사람이 책을 계산하는 나보다 더 망설이며 책을 내밀 때도 있다. 서점에는 책 한 권 고르기 위해 고심하고 고심하면서 책장 사이를 거니는 사람들의 망설임이 가득하다.

  그냥 사진만 찍고 가는 사람들에게서는 망설임을 볼 수 없다. 그들의 목적은 사진을 찍는 것이고, 그것을 완성했다. 오히려 책을 사려고 왔지만 책을 사지 못하고 가는 사람들의 조심스러운 발걸음에서 미안함과 망설임을 본다.

  며칠 전에는 오랫동안 카프카에 들리던 손님에게서 대화를 나누는 게 많이 서툴러 글로 책방에 대한 감사 마음을 전하는 쪽지를 받았다. 나는 그 망설임이 너무나 소중하다. 당당하게 정말 멋지군요,라고 감탄하는 사람들도 당연히 고맙지만, 그들은 기억에 많이 남지 않는다.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감탄은 대상에 대한 감탄일 뿐, 관계에 대한 감탄이 아니다. 나와 대상, 또는 사람과의 관계가 얽히고 섥켜 정확한 구분이 흐려질 때 망설임이 나온다. 혹시 오해하는 건 아니지, 나는 내 마음을 정확히 전달하기 힘들어. 그래도 전달하려고 노력하고 싶은 의지가 망설임을 만들어낸다. 즉, 망설임은 전달받는 사람에 대한 망설임이다. 그런 면에서 타인에 대한 두려움에서 나오는 거리두기인 주춤과 구분되는 것이기도 하다. 나와 당신, 당신과 서점, 이 관계가 서로를 망설이게 한다.  망설임은 나와 당신이 도무지 알 수 없는 세상에서 함께 살아있다는 두근거림, 심장박동소리다.

  망설임의 끝은 망설임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망설임과 함께 전달되는 무엇이다. 그래서 전달받은 망설임 끝에 매달린 감정이 소중하다. 망설이면서 전하려는 용기와, 정확히 전달하고 싶은 의지가 향하는 방향. 망설인다고 방향을 모르는 건 아니다. 오히려 끝없이 수정하며 방향을 찾아간다.  


 

 글은 글과 글 사이의 틈이 넓기에 망설임을 유발한다. 단어를 이루는 기표와 기의 사이에도 틈이 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도 틈이 있다. 작가와 독자 사이에도 쉽게 정의할 수 없는 틈이 존재한다. 그 틈을 채우는 행위 자체가 망설임을 불러온다. 내가 해석한 것이 맞나. 혹시 잘못 해석한 것은 아닌가? 아니야, 독자인 내가 해석하는 것이 정답이야. 그래도 나와 당신의 해석이 이렇게 다른 이유는 있을 거야. 글과 글 사이에는 망설임이 있고, 그 망설임을 해석하고 내놓기까지의 의지와 용기가 필요하다.

  반대로 나를 해석하고, 나를 당신에게 내보이는 의지와 용기들.  내가 글을 쓰는 이유이기도 하다. 나는 오늘도 이 글을 쓰면서 망설인다. 고치고 또 고친다. 이 글을 올리고 나서 시간이 흐른 뒤에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도 다시 고치고 또 고칠 것이다. 감히 말하면 진정한 문학은 스스로에게 행하는 산파술이다. 읽기, 쓰기 모두 해당되는 것 같다. 문학적 행위는 내가 나를 모른다는 고백이다.



  겨울이 망설이고 있다. 올해 겨울이 만들어낸 나는 어떤 모습일까? 서점에 앉아 커피를 홀짝이며 수없이 망설였다. 나와 당신의 망설임이 만나는 지점을 생각한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를 쉽게 규정하지 않는, 날카로운 경계가 흐려진 곳에서 망설이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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