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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Jan 21. 2024

영상 4도

  비가 봄비처럼 내린다. 문득,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매번 헤드셋을 쓰고 음악이나 강의를 들으며 걷는데, 오늘은 헤드셋 충전이 되어 있지 않아 그냥 걸었다. 그러니 빗소리가 아름답게 느낀 건 우연이다. 우연히 헤드셋 배터리를 다 사용했고, 우연히 비가 내렸고, 그리고 쉬는 날이다. 급한 마음이 없다. 평소와 다르게 아주 천천히 걸었다. 당장 카프카에 가서 할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커피를 마시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런데, 툭툭, 약하게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두런두런한 대화 같았고, 그 소리는 옛날 일을 떠올리게 했다. 이모 집에 갔을 때다. 우리 집 식구뿐만 아니라 이모 집 식구들도 모두 모여서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거실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잤다. 그때 이모와 엄마가 내 옆에 누웠다. 그 둘은 아주 작은 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나는 잠결에 들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느낌은 알고 있다. 아주 작은 소리의 단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둘 사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뭔가 따뜻한 기운처럼 말이다. 옆에 누워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연히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빗소리에 엄마와 이모의 대화, 그리고 나와 당신과의 대화로까지. 이 연결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놀라울 만큼 특별하다. 아, 그랬지. 서로에게 상처 따위는 하나도 주지 않는 아주 작고 소중한 단위의 소리로만 가득한 대화.


  문득 나는 반성한다. 자주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우연이지만, 우연으로 가득한 삶에서 우연과 우연이 부딪히는 그 많은 우연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햇볕이 가득한 어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야 어제의 햇볕을 떠올리면서 따뜻함과 연결된 과거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과거 언젠가 있었을 환한 경험을. 하지만 이미 지났고, 꾸역꾸역 떠올려도 그건 빛바랜 흐릿한 이미지일 뿐이다.  

  왜 그럴까? 왜 놓쳤을까? 또는 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까?

  너무 가득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다. 그 강의가 끝나면 비슷한 강의가 저절로 제공된다. 내가 관심이 있는 강의니 클릭을 한다. 강의뿐만 아니라 음악도 그렇다. 재미있는 예능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내가 관심이 있어서 듣고 보는 것인지, 반대로 알고리즘에 의해 제공되어 듣고 보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하지만 끊을 수 없다. 알고리즘은 그런 것까지 계산한다. 수많은 데이터로 적당히 수위를 조절한다. 미끼처럼 내 관심사와 연관이 되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정보를 툭 던진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문다.

  와, 이런 세계도 있어.

  나는 또다시 그 세계에 빠져든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많은 정보와 지식을 알게 되어 충만해진다.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게 된다. 나는 꽤 전문가처럼 알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들 모두 그 분야의 해박한 전문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탐한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세상을 평가하고 제단 하는 나름의 시선을 갖게 된다.

  그렇게 나는 더 세분된 제단 방식을 알게 되고, 더 자세하게 지식과 정보를 갈구한다. 커피에 대해, 와인에 대해, 책에 대해. 그렇게 나는 정보과 지식으로 꽉 채워진다. 모두 알고리즘 덕분이다.



   그렇게 알고리즘은 틈을 없앤다. 틈이 존재할 시간도, 여유도 주지 않는다. 혹여 틈이 보이면 알고리즘은 그 틈을 귀신같이 찾아내 새로운 것을 슬쩍 제공한다. 슬쩍이지만 덫은 너무나 적절하고 강력해 벗어나기 힘들다.

  한병철 교수님의 책 <서사의 위기>에 보면 이런 내용은 나온다. 기록에는 틈이 없다. 정보는 설명하는 수식만 가득하고 서사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정보가 덜 제공될수록 더 많은 틈이 만들어지고, 그 틈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제 틈이 없다. 모든 것이 알아서 제공되고, 나 자신도 틈 없이 세상에 자신을 전시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나열되고, 그 정보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탈신비화한다.

   내가 어머니와 이모의 대화를 통해 얻는 건 정보가 아니다. 신비화다. 그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까? 정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둘은 나란히 누워 나눈 대화의 분위기는 정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은 정보 제공이 아니다. 문학이야말로 신비화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유치환 시인의 시 <깃발>에 나온 '소리 없는 아우성'은 시험지 답안지에 쓸 설명으로 읽고 배우는 순간 그 시의 신비는 사라진다. 우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이상을 향한 간절함을 역설법이란 수사법으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배웠다. 여기에는 단 1%의 신비도 없다. 시의 의미마저 퇴색한다.  

 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아우성이 들리지? 소리가 없다. 아우성. 이 둘 사이에는 무한한 틈이 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그 사이에 각자의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아, 그래, 예전에 너무 억울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가 나지 않았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억울한데도 설명할 수 없었을 때 입은 열리지 않지만 표정은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어. 나는 그랬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극한의 억울함과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소리를 낼 수 없지만 내 억울함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강한 외침이기도 했다. 깃발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나는 깃발의 강한 외침을 듣는다. 내 말을 들어줘.

  틈을 이루는 두 단어가 멀면 멀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하지만 아무 단어를 붙여놓고 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멀리 있는 두 단어의 연결이 틈이 되게 하는 건 힘든 일이다.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단어 자체가 흩어져 버린다. 먼 두 단어를 연결하여 그 사이에 틈을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능력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많은 지식은 그 틈을 억지로 메우는 작업이었다. 신비화를 제거하는 능력을 길러준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를 죽이면서 시를 배웠다.




  15일 동안 서점 카프카를 쉰다. 반복되는 일상에서 벌어진 이 틈에서 나는 무엇을 할까? 물리적인 시간이 15일밖에 되지 않지만, 나는 가득 채워야만 할 것 같은 강박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 친다. 더 멀리 두 틈을 벌리려고 한다. 가만히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15일 동안 몇 권의 책을 읽었어? 많은 정보를 얻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한 권의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 틈을 벌리는 작업이다. 읽은 것을 곱씹고 곱씹어서 책 속에 숨은 틈을 발견하는 것. 책 속에 말하지 않는, 또는 말할 수 없는 침묵 속에서 발하는 신비를 느끼는 것. 틈은 숨겨지고 가려진 곳에 자리를 튼다. 틈은 숨김으로써 들어난다.

  그래서 틈은 틈을 발견한 사람에게 다가온다. 그랬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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