틈
1.
비가 봄비처럼 내렸다. 비 오는 서점은 눅눅하지만 포근한 책냄새로 가득하다. 사람은 없고, 책만 가득한 공간에서 나는 묘한 차분함, 그리고 덮인 책 사이에 숨어있는 흥분. 그렇다고 책을 펼쳤을 때 예상했던 흥분이 찬란하게 뿜어져 나오는 건 아니다. 펼치면 대부분 차갑게 식고 숨어버린다. 그래도 분명 어딘가에 남아있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숨어서 결국 누군가를 흥분시키기 위해 번개처럼, 또는 암살자처럼 튀어나온다. 가끔은 사랑처럼.
나는 내 개인 책장에서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 책을 펼쳤다. 실비 제르맹이 쓴 소설이다.
이미 읽은 소설이지만, 오늘 펼치기에 딱 맞는 책이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다시 펼쳤고, 일이 끝날 때까지 다시 읽었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그 여자가 책 속으로 들어왔다. 그 여자는 떠돌이가 빈집으로, 버려진 정원으로 들어서듯 책의 페이지 속으로 들어왔다.'
여자는 책 속으로 들어갔다, 가 아니다. 들어왔다,라고 말한다. 그러니, 여자를 서술하는 책 속에 나는 이미 들어와 있고, 여자는 책 밖에 있다가 들어온 것이다. 아, 나는 이 소설을 읽고 있으니, 첫 문장을 읽는 순간 이미 책 속에 있었구나.
내가 읽는 책 속에 여자가 들어왔다. 여자는 책 주위를 몇 해 배회했고, 아직 쓰이지 않은 페이지를 들춰보았고, 넘겨보았다. 그리고 들어왔다.
'그녀의 발자국마다 잉크 맛이 솟아났다.'
이 소설은 여자가 발자국으로 쓰는 소설이다. 여자가 도시를 유령처럼 배회하는 것만으로도 소설은 완성된다. 사실, 여자는 유령처럼, 그러니까 유령처럼 보였다가 안 보였다가 한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는 존재. 그렇지만 소설은 이어지기에 존재할 수밖에 없다. 중요하지도 않고, 보이지도 않는 존재가 완성하는 소설. 아무리 내가 중요하다고 외쳐도, 어찌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게 치워지고 잊힐 존재가 나이고, 그런 사람들과의 관계가 우리를 만든다. 잊힌 존재지만, 엄연히 다수를 차지하고 세상의 모든 질서를 만들어내는 존재이다. 문학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다. 그러니 여자는 문학이라고 감히 칭할 수도 있고, 예술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영리하게도 실비 제르맹은 보이지 않는 뭔가를 거대한 울고 있는 여자로 형상화했고, 책 페이지에 끼워 넣었다. 우리가 책 속으로 들어가면 만날 수 있도록. 책 밖으로 나와도 잊을 수 없도록.
소설은 이렇게 끝난다.
'그 여자는 책에서 밖으로 나갔다. 이제 그녀를 위한 페이지는 없다. 잉크는 지워져 투명해진다. 그러나 그 여자, 프라하의 거리에서, 이 세상의 모든 길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가 여기 있다. 그 여자가 여기 있다.'
소설 속 여자는 인간의 역사에서 지워진 비루한 존재 같다. 하지만 그런 존재도 살아가는 이유가 있고, 상처와 치유가 있고, 사랑과 상실이 가득하다. 그러니, 어디든 여자는 있다. 나는 책을 덮어도 그 여자를 만난다. 어제도 만났고, 오늘도 만났다. 다만, 내가 그 여자를 볼 더듬이가 존재하지 않을 뿐이다. 카프카의 변신에서 변신체의 더듬이가 나온다. 이제 변신한 존재는 세상을 눈으로 보기보다 더듬이로 본다. 새로운 지각이다. 중요한 것은 없다는 것이 아니라 내 눈이 보지 못했을 뿐이고, 보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더듬이가 필요하다. 누구나 스스로 터득한 더듬이가.
어느 순간 나에게도 더듬이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포착한다. 또는 만나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다니는 여자지만, 그 여자는 지금 내가 사는 도시에서도 만날 수 있다. 그 사람은 내가 될 수도 있고, 오늘 책을 사러온 손님일 수도 있다. 대부분 모르고 지나치지만, 불쑥 튀어나온 더듬이가 지각하는 순간 슬픔이 찾아온다. 때로는 분노와 허기로 찾아온다. 가끔은 지나친 고독으로 찾아온다. 없는 것이 보일 때, 보였지만 역시나 없을 때, 나는 그것을 만났다고 해야 하는지 모를 때, 나는 책을 펼치고 덮는다. 울고 다니는 여자를 또 만난다.
간혹 그림 속에서도 만난다. 때로는 노래를 듣다가 흥얼거리는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렇게, 틈이 존재하는 곳에서 그녀는 자주 목격된다.
어느새 나는 이 만남에 중독되었다.
2.
서점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문득, 우산에 부딪히는 소리가 아름답게 느껴졌다. 매번 헤드셋을 쓰고 음악이나 강의를 들으며 걷는데, 오늘은 베터리가 다 되어 헤드셋을 가방에 넣고 그냥 걸었다.그러니 빗소리를 아름답게 느낀 건 우연이다. 우연히 헤드셋 배터리를 다 사용했고, 우연히 비가 내렸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일은 쉬는 날이다. 평소와 다르게 나도 모르게 아주 천천히 걸었다. 당장 내일 카프카에서 할 일을 생각하지 않아도 된다. 집 침대에 걸터앉아 맥주 한캔을 마시고 싶은 마음만 간절했다.
그런데, 툭툭, 약하게 우산을 때리는 빗소리가 두런두런한 대화 같았고, 그 소리는 옛날 일을 떠올리게 했다. 어렸을 때, 이모 집에 갔을 때다. 우리 집 식구뿐만 아니라 이모 집 식구들도 모두 모여서 잠잘 곳이 마땅치 않았다. 거실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누워서 잠을 잤다. 그때 이모와 엄마가 내 옆에 누웠다. 그 둘은 아주 작은 소리로 두런두런 이야기했다. 나는 잠결에 들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느낌은 알고 있다. 아주 작은 소리의 단위들이 서로 부딪히지 않게 둘 사이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뭔가 따뜻한 기운처럼 말이다. 옆에 누워 있는 나에게까지 전해졌다.
당연히 나도 그런 적이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이어지는 것이다. 빗소리에 엄마와 이모의 대화, 그리고 나와 당신과의 대화로까지. 이 연결은 자연스러우면서도 놀라울 만큼 특별하다. 아, 그랬지. 서로에게 상처 따위는 하나도 주지 않는 아주 작고 소중한 단위의 소리로만 가득한 대화.
그래서, 우연으로 나는 반성한다. 자주 이런 경험을 할 수 없었다는 것에 대한 반성이다. 우연이지만, 우연으로 가득한 삶에서 우연과 우연이 부딪히는 그 많은 우연을 나는 알아채지 못했다. 햇볕이 가득한 어제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제야 어제의 햇볕을 떠올리면서 따뜻함과 연결된 과거를 떠올리려고 노력한다. 과거 언젠가 있었을 환한 경험을. 하지만 이미 지났고, 꾸역꾸역 떠올려도 그건 빛바랜 흐릿한 이미지일 뿐이다.
왜 그럴까? 왜 놓쳤을까? 또는 왜 떠올리지 못하는 사람이 됐을까?
너무 가득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유튜브로 강의를 듣는다. 그 강의가 끝나면 비슷한 강의가 저절로 제공된다. 내가 관심있는 강의다보니 거부할 수 없어 클릭한다. 강의뿐만 아니라 음악도 그렇다. 재미있는 예능도 마찬가지다. 가끔은 내가 관심이 있어서 듣고 보는 것인지, 반대로 알고리즘에 의해 제공되어 듣고 보는지 헷갈릴 때가 있다.
그렇기에 더 끊을 수 없다. 알고리즘은 그런 것까지 계산한다. 수많은 데이터로 적당히 수위를 조절한다. 미끼처럼 내 관심사와 연관이 되었지만 잘 알지 못하는 분야의 정보를 툭 던진다. 나는 그것을 제대로 문다.
와, 이런 세계도 있어.
나는 또다시 그 세계에 빠져든다. 내가 알지 못했던 그 많은 정보와 지식을 알게 되어 충만해진다. 뒤떨어진 사람이 아니게 된다. 나는 꽤 전문가처럼 알게 된다. 왜냐하면 나에게 정보와 지식을 제공하는 사람들 모두 그 분야의 해박한 전문가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나는 더 탐한다. 더 많은 것을 알게 되고, 더 깊은 취향을 갖게 되고, 세상을 평가하고 제단하는 나름의 시선을 갖게 된다. 이제 역으로 내가 전문가를 평가한다.
그렇게 나는 더 세분된 제단 방식을 알게 되고, 더 자세하게 지식과 정보를 갈구한다. 커피에 대해, 와인에 대해, 책에 대해. 그렇게 나는 정보과 지식으로 꽉 채워진다. 모두 알고리즘 덕분이다.
그렇게 알고리즘은 틈을 없앤다. 틈이 존재할 시간도, 여유도 주지 않는다. 혹여 틈이 보이면 알고리즘은 그 틈을 귀신같이 찾아내 새로운 것을 슬쩍 제공한다. 슬쩍이지만 덫은 너무나 적절하고 강력해 벗어나기 힘들다.
그렇게 알게 된 정보가 무슨 가치가 있을까? 고작 타인과 세상을 평가하는 하나의 시선? 날카로울 수는 있겠지만, 진정 나의 삶에 도움이 되지는 않는다. 내가 세상에 대해 알고자 하는 이유는 전문가가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내 삶을 소중히 여기고 영위하고 싶어서이다.
한병철 교수님의 책 <서사의 위기>에 보면 이런 내용은 나온다. 기록에는 틈이 없다. 정보는 설명하는 수식만 가득하고 서사가 없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정보가 덜 제공될수록 더 많은 틈이 만들어지고, 그 틈을 통해 이야기가 만들어진다. 그런데 이제 틈이 없다. 모든 것이 알아서 제공되고, 나 자신도 틈 없이 세상에 자신을 전시한다. 모든 것이 투명하게 나열되고, 그 정보는 모든 것을 해체하고 탈신비화한다.
내가 어머니와 이모의 대화를 통해 얻는 건 정보가 아니다. 신비화다. 그 둘은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을까? 정보는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 둘은 나란히 누워 나눈 대화의 분위기는 정보보다 더 많은 것을 말한다. 그리고 그 기억은 내가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기준이 된다.
우리는 과연 그런 대화를 하고 있을까? 특히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대화를 할 때!
문학도 마찬가지다. 문학은 정보 제공이 아니다. 문학이야말로 신비화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유치환 시인의 시 <깃발>에 나온 '소리 없는 아우성'은 시험지 답안지에 쓸 설명으로 읽고 배우는 순간 그 시의 신비는 사라진다. 우리는 소리 없는 아우성을 이상을 향한 간절함을 역설법이란 수사법으로 표현한 문장이라고 배웠다. 여기에는 단 1%의 신비도 없다. 시의 의미마저 퇴색한다.
소리가 없는데 어떻게 아우성이 들리지? 소리가 없다. 아우성. 이 둘 사이에는 무한한 틈이 있다. 그것도 아주 넓은. 그 사이에 각자의 시선에 따라 다양한 이야기가 존재한다.
아, 그래, 예전에 너무 억울해서 소리를 지르고 싶은데 소리가 나지 않았어. 화가 나고 분노가 치밀고, 억울한데도 설명할 수 없었을 때 입은 열리지 않지만 표정은 아우성을 지르고 있었어. 나는 그랬다. 소리 없는 아우성은 극한의 억울함과 관계되어 있다. 그래서 누군가 소리를 낼 수 없지만 내 억울함을 들어줬으면 좋겠다는 강한 외침이기도 했다. 깃발이 소리 없는 아우성을 칠 때, 나는 깃발의 강한 외침을 듣는다.
내 말을 들어줘.
틈을 이루는 두 단어가 멀면 멀수록 더 많은 이야기가 담긴다. 하지만 아무 단어를 붙여놓고 틈이라고 말할 수 없다. 멀리 있는 두 단어의 연결이 틈이 되게 하는 건 힘든 일이다. 대부분 성공하지 못하고 연결 자체가 흩어져 버린다. 먼 두 단어를 연결하여 그 사이에 틈을 만드는 능력이야말로 시인의 능력이다. 사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그 많은 지식은 그 틈을 억지로 메우는 작업이었다. 신비화를 제거하는 능력을 길러준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시를 죽이면서 시를 배웠다.
3.
틈을 생각하는데 갑자기 발이 떠올랐다. 프라하 거리에서 울고 다니는 여자도 왜 울고 다니는지 조금 알것 같다. 발과 신발이. 굳이 연결점이 찾는다면 발과 신발이 틈을 만들어낸다고 말하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다가가 틈을 좁히기도 하고, 멀어져 틈을 벌리기도 한다. 아무리 가까이 다가가도 틈이 존재하고, 아무리 멀리 떨어지더라도 틈은 둘 사이의 연결을 전제로 말한다. 즉, 틈이란 거리가 가깝고 멀고의 문제가 아니다. 어쩌면 발걸음의 문제다. 스스로 발을 떼고 내딛고 방향을 정하는 의지의 문제이고, 의지를 갖게 한 에너지의 문제이고, 가깝고 멀고 이동하는 거리에 따라 관계에서 생기는 긴장감의 문제다.
그 유명한 고흐의 신발 그림이 떠올랐다. 당장 인터넷에 쳐 보더라도 신발 그림이 많이 나온다. 그리고 그 신발에 대한 해석도 많이 나온다. 생각보다 다양하다. 누군가는 슬픔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삶의 고단함을 이야기하고, 누군가는 가장의 무게를 이야기한다. 얼토당토하지 않은 해석을 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 틈이 가장 많이 존재하는 예술은 그림이다. 틈이 없은 것 같은 정물화도 조금만 삐딱하게 보면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실제로 고개를 살짝만 꺾어도 그림이 다르게 보인다.
대체로 유명한 평론가의 해석을 따라 그림을 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건 그냥 유명한 평론가의 해석이고, 그 해석이 유명할 수록 틈이 좁아지고, 결국에는 사라진다. 작가의 해석 또한 그렇다. 이해의 출발점이 될 수는 있지만 종착점은 될 수 없다. 작가가 그림을 그린 이유에 대해 말하면, 아, 그렇구나 하고 이해하면 된다. 작가의 의도를 안다는 것은 누구보다 틈을 빨리 알아차릴 수 있는 기회일 뿐이다. 왜냐하면 작가의 해석은 자신이 다른 작품과 어떻게 다른지에 관한 이야기니까! 바로 틈에 관한 이야기이다.
다시 말하지만 그렇다고 종착지는 될 수 없다. 작가의 의도와 그림을 보는 사람 사이에도 틈이 있다. 그 틈을 상상하고 사유하고, 그 틈에서 새로움을 끌어올려야 한다. 그런 사람이 다음의 예술가가 되고, 자신만의 그림을 소유하는 사람이 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예술가가 될 수도 없고 되어서도 안 된다. 틈을 벌리는 능력과 그 틈을 헤집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내는 능력의 차이가 존재하고, 그 능력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평론가가 되고 예술가가 되고, 예술을 사랑하는 향유자가 된다.
신발은 발과 연결되어 있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고 감추는 도구다. 걷는 건 어쩌면 부착적이다. 보호가 목적이고 보호 카테로리 안에 걷는 것, 뛰는 것, 때로는 가만히 서 있는 것이 포함된다. 아무꺼리낌 없이 일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 신발이고, 그래서 신발은 노력과 고단함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신발이 그림의 주인공이라면, 맨발은 거려진 얼굴이다. 헤진 신발에서 힘들고 지친 고단함을 본다면, 맨발은 뒤에서 울고 있는 얼굴이다. 신발은 발을 보호하기에 둘 사이의 틈은 가깝지만, 정작 발을 가리는 관계이기에 멀다.
나는 상상을 한다. 문간에 기대어 앉아 힘들게 신발을 벗는다. 발가락은 땀으로 허옇게 퉁퉁 불었다. 그는 바로 일어날 힘이 없다. 그래서 그냥 신발 앞에서 꾸벅 졸듯이 잠깐 고개를 숙이고 앉이 있다. 다시 일하러 가야 한다. 힘을 내 일어나 간단히 요기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다시 신발을 신는다. 불쑥 나왔던 고독한 맨발이 가려진다.
벗고 신고, 걷어내고 덮고. 그 모든 과정의 어디 쯤에 들어난 발바닥이 있고, 오래되고 허름한 신발이 있다. 발바닥은 삶의 무게를 그대로 지탱하는 가장 낮은 자리다. 지친 얼굴은 타인에게 보이지만, 부르트고 물집이 잡히고, 살갗이 갈라진 발바닥은 누구도 쉽게 볼 수 없다. 신발이 가린다. 아니 보호한다.
신발 그림에서 사라진 발은? 나에게 다가오는 건 신발보다는 사라진 발이다. 신발을 신은 발이 다가오기도 하고, 신발을 벗은 발이 다가오기도 한다. 때로는 멀어진다. 신발이 신었을 때는 보이지 않기에 완벽히 그 거리를 알 수 없지만, 느낄 수는 있다. 또한 신발을 벗은 발은 사라졌기에 그 거리를 알 수 없지만, 느낄 수 있다. 신발과 발바닥 사이의 공간. 그 틈을 나는 느낀다.
가만히 앉아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많은 정보를 얻었다는 건 중요하지 않다. 당신과 나의 관계가 밀착되어 더한나위 없이 가깝다고 해서 좋은 건 아니다. 우리 둘 사이에 신선한 바람이 드나들 공간이 필요하고, 가끔은 혼자 울 공간이 필요하다. 혼자 운다고 해서 혼자 있는 건 아니다. 당신과 나 틈 어디쯤에서 울고 있는 것이다. 내가 당신의 발을 꼭 쥐고 있을 때는 내가 당신을 사랑했다고 착각한 순간이다. 내가 당신을 더 많이 사랑하기에, 내 사랑이 진실하다고 착각한 순간이다. 내 손아귀에서 당신이 발이 떠났을 때, 나는 배신을 당했다고 생각한 이유다. 배신은 없다. 가깝고 멀고만 있다. 틈이 존재할 때, 틈을 없애려고 하는 순간 배신이 틈 속에 가득찬다. 사랑이라고 착각한 칩작이 가득찬다. 사랑에는 틈이 존재하는데, 그 틈에 어떻게 바라보느냐가 사랑의 본질일 것이다. 그렇게 내 욕망만 가득 채우면 그 욕망이 부풀면서 오히려 틈 자체를 없앤다. 나와 당신 사이에 더이상 틈 자체가 없다면, 그건 관계가 사라졌다는 뜻이다.
당신과 나, 그리고 나와 책 사이에는 침묵처럼 말하지 않아도 발하는 신비가 있다. 틈은 숨겨지고 가려진 곳에 자리를 튼다. 틈은 숨김으로써 들어난다.
그래서 틈은 틈을 발견한 사람에게 다가온다. 그랬으면 한다. 틈은 그렇게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