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크리스마스
1.
화이트크리스마스다. 눈이 많이 내려서 하얀 정적 속에 있는 듯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맨 먼저 창문을 열었고, 그리고 목격했다. 하얀 정적. 그리고 그 속에 숨은 공포를. 세상을 두껍게 덮고 있는 눈을 멀리서 바라보면 포근함을 느끼지만, 가까이 차가운 눈 속에 파 묻힌다면 하얀 공포다. 소리마저 다 잡아먹는 공포다. 포근과 공포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왜 함께 있지 못할까,라는 의문도 든다. 그래, 어울릴 수 있어. 내 삶도 똑같다. 포근한 삶을 살면서, 공포를 느낀다. 반대로 공포를 느끼면서 포근한 삶을 산다. 생각해 보니 너무 많다. 사랑도 그렇고, 돈도 그렇다. 무엇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 존재 자체가 그렇다.
차가운 바람이 창으로 들어오니 머리가 맑아졌다. 방안의 뜨거운 공기와 어울리면서 공포보다는 포근함이 나를 감싼다. 드러난 피부가 오소소 일어난다. 나는 부르르 떨면서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여유에서 오는 평화로움보다는 외로움에서 온 포근함을 나는 더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움츠려 들고, 그 사람이 부럽기보다 부담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게 여유로울 수 있지? 그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내가 그렇지 못하니, 마치 그가 연극하는 사람처럼, 또는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부담감과 상관없이 그가 풍기는 여유는 상대에게 왠지 모를 평화로움을 준다. 삶 자체가 평온해 보이고 함께 있으면 나도 덩달아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누구나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고 해서 쉽게 가져지는 건 아닐 것이다. 여유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누구보다 치열할 수 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삶을 대하는 성향의 차이일 수 있다. 나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자신을 위해 만든 포근한 둥지를 좋아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집착이 과하면 따뜻함이 존재할 수 없다. 여유가 과하면 평화로움이 아니라 신기루 같은 관계로 변할 수 있다. 왠지 더 거리감을 느낀다.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과하면 관계 자체를 파괴한다.
그런데도 굳이 외로움이 만들어낸 포근함을 좋아한다니! 외로움과 포근함, 양 끝단에 있는 두 대비는 멀수록, 그렇지만 적절할수록 더 강한 의미와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감히 말하면 시인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한쪽에 치우쳤다면 다시 치우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간절함을 믿고, 그 간절함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의지를 믿는다. 전혀 관계없는 대비가 관계있게 되어버린, 그렇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의 벽 사이로 새어 나오는 의지, 창백하지만 반짝이는 그 빛을.
그런 것이다.
힘들고 지친 일상의 반복 속에서도 빛이 나는 사람, 또는 대비된 문장의 사이를 기어코 비집고 나와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는 사람을 만나면 나도 모르게 빠지고 만다.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 못하지만,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나 버벅거리는 그 순간을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 딱 부러진 사람보다는 딱 부러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 그래서 결국 망설임으로 더 짖게 전해지는 마음. 외로움에 상처받은 적이 있기에 혹여 상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마음.
여유가 넘치는 사람보다 여유가 넘치지 않는 사람이 좋고, 외롭더라도 그것이 결핍이 되어 삶과 타인을 파괴히지 않는 선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족함에서 오는 절실함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 되면 그것으로 됐다. 나 또한 그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힘들다.
아주 가끔, 부족함이 아닌 다 말라버린 바닥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시를 읽는다.
그러나 만약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이
그러나 만약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이
어째서, 그건 사랑이다:그러나 가장 이른 태양의
작살에서 완벽하게 사라져야 하나
달의 최고의 마술, 또는 돌들이 말하거나 또는 이름
하나가 우리의 한낱 우주보다 더 대단한
장관을 제어하거나 사랑은 거기에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감옥에 갇히고, 여기서 고문을 당하면서,
사랑은 모든 곳에서 폭박하며 불구로 만들고 눈멀게 하고
(그러나 분명 잊거나, 소멸하지 않고, 잠은
사진 찍히거나, 측정될 수 없다:다만 무시할 뿐
정확한 두뇌의 하찮은 꼬리표들...
-누가 무덤보다도 거대한 시를 휘두르는가?
오직 누구로부터 시간이 피난처가 되지 않아야 하나
이상한 세상 모두가 공개되어야 하는데도?
) 사랑
-<내 심장이 항상 열려 있기를> E.E. 커밍스 시선집 1, 미행. 64쪽.
나를 치료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시는 치료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다만, 빛나는 문장은 삶의 바닥에서 쓰러지지 않게 부실하지만 딱딱한 목발이 되어 준다.
이 시는 '그러나'로 시작한다. 시가 시작하기 전, 그러나 앞에 뭐가 있었을까? 추측해 보면, 마음이 죽는 사건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죽은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춤이 피어나다니! 그리고 그것은 사랑이다,라고 단정 내린다.
마치 내 마음이 죽었고, 그래서 죽은 내 마음속을 다시 봐야 하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춤을 춰야 할 것 같다. 사회구조에 갇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문을 당하더라도, 그 모든 곳에서 사랑은 폭발하여야 한다. 불구로 만들고 눈멀게 한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랑.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을 출 것이다. 죽은 마음속에서는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 자체가 춤이다. 멋진 춤일 필요도 없다. 쩔뚝이더라도 그건 살아있는 춤이고, 어째서 그건 사랑이다.
2.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이라는 소설이 있다. 사실 재미있지도 않고, 새로운 형식을 가지고 있지도 않아 형식적인 재미도 없다. 읽을 때는 왜 이런 이야기를 썼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별할 것 없는 지질한 삶을 묘사하는 것이 작품이 될 수 있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난 후에 계속 주인공 주디스 헌이 떠올랐다.
상대를 통해서 구원 얻기를 원한다면, 구원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외로움은 상대가 없다는 단순한 사실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외로움을 없애줄 상대가 있어야 한다는 결핍의 착각에서 온다. 상대가 필요하다는 강도에 따라 외로움의 강도가 높아진다.
외로움은 자기 자신을 타인에게 의탁하면서 더 짙어진다. 가족에게, 연애 상대에게, 때로는 신에게. 하지만 누가 의지하지 않으면서 살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독립적인 사람이라 해도 누군가에, 또는 무언가에 의지하며 산다. 삶은 혼자 이뤄질 수 없다. 나와 닿아 있는 수많은 접속을 통해서 이뤄진다. 지금 내가 숨을 쉬는 것도 자연의 산소와 접속하기 때문에 가능하고, 그 산소도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산소도 식물에 의지한다.
여기 외로운 열정을 지닌 주디스 헌이라는 여자가 있다. ‘외롭다’와 ‘열정’이 하나로 묶여 있는 삶이다. 외롭다, 그 표현은 내가 타인과 접속하려는 욕망이고 열정이다. 아기일 때 부모님의 품에서 살듯이, 접속은 인간이 원초적인 본능 중의 하나이다.
주디스 헌은 누군가와 접속하기를 원하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한다. 주디스 헌은 이제 아무도 없다고 말한다. 상대가 없기에 그 빈 공간은 더 넓어져만 가고, 주디스 헌의 외침은 공허하고 쓸쓸하게 들리다. 하지만 그 외침은 자신이 인간이라는 증명처럼 들린다.
나는 인간입니다, 나도 접속하는 삶을 살 당연한 권리가 있습니다,라고. 마치 당신이 숨 쉬듯이.
‘오, 하느님, 제가 하느님께 죄를 지었는데 왜 저를 벌하지 않으시나요? 전 하느님을 버렸어요. 듣고 계시나요, 제가 하느님을 버렸다고요. 왜냐하면, 오, 하느님 아버지, 하느님이 절 버렸으니까요. 신부님, 전 신부님이 필요했는데 신부님은 절 외면했어요. 전 하느님께도, 신부님께도 기도했는데, 아무도 답을 주지 않았어요. 모든 남자가 제게서 돌아섰어요. 예수님과 신부님, 당신들 두 분도 포함해서요.’
주디스 헌은 하나님에게조차 외면받았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하나님을 버리고 욕보였는데, 하나님은 주디스 헌에게 죄를 내리지 않는다. 죄를 지었는데, 죄에 대한 벌조차 받지 못하는 삶. 그렇기에 더욱 광녀처럼 악을 쓴다. 외로움에 뚫린 삶의 구멍에서 피어나는 외침이다.
이 모든 악다구니는 그녀가 살아있다는 증거다. 살아있기에 외로움을 느끼고, 그것을 표현하기에 주저하지 않는다. 이 소설은 주디스 헌의 외로움을 어루만져주는 상대가 나타나 자신을 알아주는 한 사람만 있어도 삶이 아름답다고 끝나는 허구의 희망 따위는 없다. 홀로 외로움을 이겨내는 주인공의 극복기도 아니다. 그렇기에 오히려 이 소설은 진정으로 현실을 살아가는 한 사람의 이야기다. 외롭고 보잘것없지만, 삶이 여기 있다는 증거를 온몸으로 보여주는 소설이다.
주디스 헌은 그렇게 죽은 마음속에서 살아있는 춤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건 사랑이다. 그녀의 고독은 외로움이 사무친 만큼 따뜻함을 넘어선 뜨거움이다. 그것도 삶을 향한 열정이 가득한. 소설을 읽고 한참 후에나 왜 <주디스 헌의 외로운 열정>이라고 제목을 지었는지 깨달았다. 왜 외로운 뒤에 열정을 붙였는지 말이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온 크리스마스 아침이라 동네 길목에는 사람이 없다. 슬쩍 눈치를 보며 춤을 춘다. 격렬한 춤이 아니다. 마치 흐느끼듯 내리는 눈처럼 몸을 움직인다. 삶을 고백하는 춤이다. 그리고 이건 사랑이다.
하얀 공포 속에서 살아 있는 춤을 춘다. 몸이 뜨거워진다. 부족함이 따뜻함으로 변하는 춤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솜사탕 같은 눈을 뜨거운 혀로 받아먹는다. 입안에서 차가움이 폭발한다.
서점에 도착하면 뜨거운 커피를 마실 거야. 행운처럼 부족한 마음이 따뜻해 질지도 몰라. 손끝으로 책장을 만지면서, 그 안에 숨어있는 단어를 상상할 거야. 문장이 만들어지는 조합을 사랑할 거야. 삶이 그렇게 그려진다는 것을 깨달을 거야. 오늘은 조금 추운 사랑을 해도 괜찮아. 손님이 없다면 몰래 순 한잔 마실지도 몰라.
서점 문이 열리면 깜짝 놀라겠지. 그리고 서점에 찾은 부족한 당신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몰라.
메리크리스마스!
당신에게도 포근함이 깃들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