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Dec 31. 2023

영하 4도

메리크리스마스

  화이트크리스마스다. 눈이 많이 내려서 하얀 정적 속에 있는 듯하다. 잠에서 깨자마자 맨 먼저 창문을 열었고, 그리고 목격했다. 하얀 정적. 그리고 그 속에 숨은 공포를. 세상을 두껍게 덮고 있는 눈을 멀리서 보면 포근함을 느끼지만 차가운 눈 속에 파 묻힌다면 하얀 공포다. 소리마저 다 잡아먹는 공포다. 포근과 공포가 어떻게 함께 있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지만 반대로 왜 함께 있지 못할까,라는 의문도 든다. 그래, 어울릴 수 있어. 내 삶도 똑같다. 포근한 삶을 살면서, 공포를 느낀다. 반대로 공포를 느끼면서 포근한 삶을 산다.


  여유에서 오는 평화로움보다는 외로움에서 온 포근함을 나는 더 좋아한다. 아마도 내가 그렇게 여유가 많은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것일 수도 있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을 보면 이상하게 움츠려 들고, 그 사람이 부럽기보다 부담스럽기 때문일 수도 있다. 어떻게 여유로울 수 있지? 그 의문이 떠나지 않는다. 내가 그렇지 못하니, 마치 그가 연극하는 사람처럼, 또는 그렇게 훈련받은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내가 느끼는 부담감과 상관없이 그가 풍기는 여유는 상대에게 왠지 모를 평화로움을 준다. 삶 자체가 평온해 보이고 함께 있으면 나도 덩달아 그렇게 될 것만 같다. 누구나 여유를 가지려고 한다고 해서 쉽게 가져지는 건 아닐 것이다. 여유를 만들기 위해 그들의 한 노력은 누구보다 치열할 수 있다. 그걸 부정할 수는 없다.  

  그러니,

  삶을 대하는 성향의 차이일 수 있다. 여유보다는 외롭고 고독한 사람이 만들어낸 따뜻함을 좋아한다. 모든 관계가 그렇듯 집착이 과하면 따뜻함이 존재할 수 없다. 여유가 과하면 평화로움이 아니라 신기루 같은 관계로 변할 수 있다. 왠지 더 거리감을 느낀다. 외로움도 마찬가지다. 과하면 관계 자체를 파괴한다.


  그런데도 굳이 외로움이 만들어낸 따뜻함을 좋아한다니! 외로움과 따뜻함, 이런 대비를 만들어내는 것은 나의 병일 수도 있다. 양 끝단에 있는 두 대비는 멀수록, 그렇지만 적절할수록 더 강한 의미와 새로움을 만들어낸다. 감히 말하면 시인의 마음이다. 모든 것이 한쪽에 치우졌다면 다시 치우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간절함에서 배어 나오는 삶의 빛을 나는 믿는다. 전혀 관계없는 대비가 관계있게 되어버린, 그렇지만 하나가 될 수 없는 관계의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빛, 창백하지만 반짝이는 그 빛을.  

  그런 것이다.

  힘들고 지친 삶이지만 일상의 틈으로 빛이 나는 사람, 또는 대비된 문장의 사이로 비집고 나온 새로운 의미를 만나면 나도 모르게 빠지고 만다. 상대에게 자신의 마음을 잘 표현 못하지만, 표현하려고 노력하거나 버벅거리는 그 순간을 나도 모르게 사랑한다. 딱 부러진 사람보다는 딱 부러지고 싶지만 그렇지 못한 사람. 그래서 결국 망설임으로 더 짖게 전해지는 마음. 외로움에 상처받은 적이 있기에 혹여 상대가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면서 더 조심스럽게 다가가는 마음.

  여유가 넘치는 사람보다 여유가 넘치지 않는 사람이 좋고, 외롭더라도 그것이 결핍이 되어 삶과 타인을 파괴히지 않는 선에서 따뜻함을 발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부족함에서 오는 절실함이 타인에 대한 존중이 되면 그것으로 됐다. 나 또한 그러고 싶은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 힘들다.

  아주 가끔, 부족함이 아닌 다 말라버린 바닥을 볼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이 시를 읽는다. 최근에 발견한 시다.

 


 그러나 만약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이


그러나 만약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이

어째서,그건 사랑이다:그러나 가장 이른 태양의

작살에서 완벽하게 사라져야 하나

달의 최고의 마술,또는 돌들이 말하거나 또는 이름

하나가 우리의 한낱 우주보다 더 대단한

장관을 제어하거나 사랑은 거기에도 있다:

그리고 여기서 감옥에 갇히고,여기서 고문을 당하면서,

사랑은 모든 곳에서 폭박하며 불구로 만들고 눈멀게 하고

(그러나 분명 잊거나, 소멸하지 않고, 잠은

사진 찍히거나,측정될 수 없다:다만 무시할 뿐

정확한 두뇌의 하찮은 꼬리표들...

-누가 무덤보다도 거대한 시를 휘두르는가?

오직 누구로부터 시간이 피난처가 되지 않아야 하나

이상한 세상 모두가 공개되어야 하는데도?

                                                         )사랑

 

    -<내 심장이 항상 열려 있기를> E.E. 커밍스 시선집1, 미행. 64쪽.

  

  나를 치료하기 위한 읽기가 아니다. 개인적으로 시는 치료제가 아니다,라고 생각한다. 문장은 삶의 바닥에서 쓰러지지 않게 부실하지만 딱딱한 목발이 되어 준다.

  내 죽은 마음속을 다시 봐야 하고, 그 안에서 살아 있는 춤을 춰야 한다. 사회구조에 갇히고,  타인과의 관계에서 고문을 당하더라도, 그 모든 곳에서 사랑은 폭발하여야 한다. 불구로 만들고 눈멀게 한 나를 발견한다. 그리고 사랑.

  나는 다시 시를 읽는다.

  죽은 마음속에 살아 있는 춤을 출 것이다. 죽음 마음속에서는 엉거주춤 일어서는 것 자체가 춤이다. 멋진 춤일 필요도 없다. 쩔뚝이더라도 그건 살아있는 춤이고, 어째서 그건 사랑이다.


  출근하기 위해 옷을 차려입고 밖으로 나왔다. 눈이 온 크리스마스 아침이라 동네 길목에는 사람이 없다. 슬쩍 눈치를 보며 춤을 춘다. 격렬한 춤이 아니다. 마치 흐느끼듯 내리는 눈처럼 몸을 움직인다.

  하얀 공포 속에서 살아 있는 춤을 춘다. 몸이 뜨거워진다. 부족함이 따뜻함으로 변하는 춤이다. 크리스마스는 그렇게 지나갈 것이다. 솜사탕 같은 눈을 뜨거운 혀로 받아먹는다. 입안에서 차가움이 폭발한다.

  서점에 도착하면 뜨거운 커피를 마실 거야. 행운처럼 부족한 마음이 따뜻해 질지도 몰라. 그리고 서점에 찾은 부족한 당신에게 이렇게 물을지도 몰라.

  메리크리스마스!

  당신에게도 따뜻한 마음이 깃들기를.


이전 07화 영하 12도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