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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Dec 17. 2023

영상 14도

적당한

  겨울비가 장마처럼 내렸다. 출근하는 길 다리 위에서 누런 흙탕물이 되어 넘칠 듯 흐르는 전주천을 내려다봤다. 여름 장마 때나 보던 광경이다. 춥지 않으니 오히려 더 여름 장마 같았다. 세상에 한 겨울 아침 온도가 영상 14도라니. 기온이 이상한 날 연속이다. 대기가 불안정하기 때문에 날씨가 들쑥날쑥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불안정이란 단어는 인간이 정해놓은 영역에서 벗어날 때를 지칭하는 말일뿐, 자연 입장에서 보면 안정으로 가는 길인지도 모른다. 어쩌면 인간 자체가 불안정 요인일 수 있다.

  요즘 청소할 때면 같은 생각을 한다. 깔끔한 사람, 이 단어에서 나는 분명한 인간중심주의를 느낀다. 내가 깔끔하기 위해서는 청소를 해야 하고, 매일 씻고 닦아야 한다. 허름한 옷을 버리고, 새 옷을 입어야 한다. 헌 옷이라도 자주 빨아 입어야 한다. 여하튼 깨끗하고 깔끔하다는 것은 좋은 이미지인데, 그 좋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끝없이 쓰레기를 만들어낸다. 세제를 써서 세탁기를 돌리고, 락스로 화장실 청소를 하고, 자신을 가꾸기 위해 샴푸와 린스를 쓴다. 화학약품으로 오염된 물이 수챗구멍으로 흘러내려가 지구 어딘가에 스민다. 이런 일을 나열하면 끝이 없고, 그 많은 것은 너무 사소해서 오염이라고 생각하지 못한다. 그 많은 사소한 일이 자연이 만든 균형을 무너트린다.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지만 어느 시인의 말이 떠오른다.

  청소가 훼손일 수 있다는 말.

  청소 대신에 다른 많은 단어로 치환될 수 있다. 청소 대신이 인간 모든 활동을 넣어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든다. 환경보호라는 칭하는 활동마저도. 환경보호 강연을 위해 매연을 뿜으며 자동차를 타고 하루종일 강연장을 옮겨 다닌다. 서울에서부터 제주도까지. 물론, 환경보호 강연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줘 환경을 보호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는 한다. 하지만, 나는 잘 모르겠다.

  당연히 아주 조금 알 뿐이다. 다만, 내가 경험한 환경보호는 오염을 멈추기보다 덜 오염시키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쓰레기 덜 나오는 큰 마켓을 열고, 재활용을 통해서 새로운 제품을 만든다. 그것이 사업이 된다. 환경을 보호한다는 이미지는 사업을 더 크게 만들고, 전 세계로 그 제품을 판다. 나도 그런 제품을 좋아한다. 환경오염을 하면서 만들어내는 제품보다는 낫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자본이 만들어낸 그 질주에 새로운 이미지로 올라탔다는 생각은 떨쳐낼 수 없다.  

  환경운동을 하기 위해서는 돈을 벌어야 한다. 그래서 새로운 커리큘럼을 만들고,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그 사업을 통해서 더 큰 사업을 만들고. 그래서 성공한다. 하지만 성공은 자본 체제 안에서 성공이고, 그 성공은 필연적으로 자연을 훼손한다. 그러니 성공이란 단어를 이 문장에 넣어도 괜찮을 것 같다.

  성공이 훼손일 수 있다.

  하지만 인간으로 태어났으니 인간으로 살아야 하고, 돈을 버는 행위가 곧 오염이 되는 시대에 살고 있으니 이 틀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어쩔 수 없는 부조리 속에서 부조리하게 산다. 그래서 적당히 성공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하지만 치열한 경쟁 속에서 그게 가능할까? 성공보다 더 어려운 것이 적당함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적당히'라는 말을 좋아한다. 적당하다는 단어의 뜻은 '정도에 알맞게'이다. 적당히 살려면 먼저 정도가 무엇인지 알아야 하고 끝없이 생각해야 한다. 정도는 알맞은 한도를 뜻한다. 인간이 만든 사회에서 인간으로 살 수 있는 알맞은 한도. 딱 그만큼만 하면서 살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타협점이라는 생각이 든다.

  당연히 더 깔끔하고, 더 성공한 삶을 살고 싶은 욕망도 있지만, 그렇게 살 수도 없다. 그래서 오히려 그럴게 살 수 없는 부족한 내 능력에 감사한다. 이룰 수 없는 결핍을 절제하고 적당히 살게 되는 과정 속에서 두려움도 낮아진다. 적당히 산다는 뜻은 두려움도 적당하다는 뜻일 것이다. 얼음처럼 차가운 현실에서 적당히 두려워하는 것. 적당히 따뜻하고 적당히 추울 때, 머릿속에 차갑고도 맑은 생각이 가득 찬다. 넘치지 않을 정도로 적당히.  

  카프카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신다. 커피처럼 서점 안이 어둡다. 적당하다는 것은 과하지 않다는 말로도 느껴진다. 냉정하지 않고 따뜻하기를. 그리우면서 어둡지 않기를. 질투하면서 상대를 해하지 않기를. 슬프지만 우울하지 않기를.

  신발이 젖어 벗었다. 발가락 쪽 양말이 물기에 짙은 색으로 변했다. 양말도 벗으려다 말았다. 발의 온기로 말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차근차근. 천천히. 커피를 마시면서 사람의 온기에 대해 생각했다. 뜨겁지 않으면서 항상 적당한 온도를 유지하는 인간의 온기. 항상성은 생명의 원천이다. 나는 인간을 믿지 않지만 인간을 믿는 이유다. 인간이 가진 몸이 생명을 가졌기에,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려고 열심히 일하기에. 인간의 몸이 가진 자연 메커니즘을 믿는다. 내 손을 잡았던 당신의 그 따뜻함을 믿는다.


단풍잎 색 차이로 만든 작품
비그림자-비가 내릴 때 주인공이 누워서 그 자리에 젖지 않게 만든 작품


  앤디골드 워시라는 작가가 있다. 자연을 재배열, 또는 조립을 통해서 작품을 만든다. 미술계에서도 미술 작품을 만드는 과정 중에 나오는 쓰레기 처리에 대해 고민이 많았다. 자연의 아름다움을 이용해 만든 작품이 오히려 자연을 훼손했다.

  이런 문제의식에서 출발한 앤디골드 워시의 작품은 자연의 쇠퇴와 부패의 과정을 작품에 담았다. 작가가 예술에 사용하는 낙엽, 돌, 얼음, 솔방울 등은 자연 그대로의 오브제이다. 이것을 가져다가 가공하여 작품 속에 가두기보다 그것을 발견한 공간과 함께 작품을 만든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떨어지거나 부서진 자연물을 발견된 공간에 재배열을 통해서 새로움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그 작품은 자연과 함께 사라진다. 자연의 법칙 안에서 이뤄지는 작품이다.

  물론 작가도 미술관에 설치하는 작업을 한다. 자연물을 가져다 가공을 통해서 작품을 만들기도 하고, 자신이 자연을 통해 작업하는 과정을 영상으로 담거나 만들어 놓은 작품이 자연으로 돌아가기 전에 사진을 찍어 전시한다. 그 모든 과정은 과하지 않다. 대부분의 작품은 자연 속으로 다시 돌아간다. 후에 어떻게 평가될지는 알 수 없지만, 나는 이렇게 평가하고 싶다. 과하지 않은 작가의 적당함이 그 어떤 예술 작품보다 아릅답다라고.

  적당함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건, 우리가 시쳇말로 하듯 놀면서 적당히 해서가 아닐 것이다. 적당히 하기 위해 작가는 끝없이 사유하고 자신과 예술계를 가두고 있던 형식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한 것이다. 항상성 유지를 위해 태어났을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심장이 단 한 번도 쉬지 않고 뛰는 것처럼.    


  카프카 창유리에 붙어있다가 아래로 올챙이처럼 떨어지는 빗물을 봤다. 자연법칙에 따른 단순한 추락이지만, 저마다 다른 추락을 보여준다. 마치 꼬리로 헤엄치듯 물방울 뒤에 남긴 물길이 순간 빛난다. 그리고 곧 사라진다. 있다가 없고, 없다가 있는 그 모든 과정. 인간은 그 많은 과정 중에 하나일 텐데, 우리는 왜 그토록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자신의 삶이 특별하다면, 다른 생성과 소멸의 과정도 특별할 수밖에 없다.

  나는 깔끔한 인간보다 적당한 인간이기를 바란다. 적당한 인간이 된다는 것은 적당함의 기준, 즉 알맞은 한도의 기준이 되는 대상이 필요하고, 그 대상은 인간이 아닌 자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상이 인간이면 욕망 경쟁과 자본의 틀에서 아주 조금이라도 벗어나 방향을 틀기 힘들다. 물론 자연이라고 해서 벗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하지만, 적당한 예술이란? 적당한 문학이란? 이 질문을 향하는 대상은 자연이고, 이를 통해 얻은 답은 사람에게 내놓고 싶다. 결국 내가 눈치를 봐야 하는 건 사람이 아니라 자연이라는 생각이 든다.

  적당한 어둠 속에서 마시는 커피는 더 고소하다.

  당신은 알까? 커피를 내리면서 내가 이 고소함을 만들었다고 자주 착각한다. 이 집 커피 잘하네. 이 말은 자연이 우리에게 내어준 것 중에 하나를 잘 선택했다는 뜻일 뿐이다. 파괴하여 재조립하는 선택 능력을 창조 능력으로 착각하는 인간은 여전히 불균형을 만들어낸다. 인간은 끝없이 창조했다고 말하지만 끝없이 파괴해 왔다.

  그러니 우리가 그토록 찬양하는 창조는 그저 재구성이다. 앤디골드 워시의 작품은 자연의 큰 법칙 속에 속한 아주 작은 한도 안에서 일어나는 재구성이고 재구축이다. 작가 자신도 그 법칙에 속한 오브제가 된다. 그래서 그의 작품은 과하지 않고 적당하다.  

   

  과연 나는 창조하고 있는가, 파괴하고 있는가? 이 의문은 다시 나에게 돌아온다. 나의 적당한 예술이란? 적당한 문학이란? 나의 창조는 과연 적당했는가?

  벌써 커피를 다 마셨다. 하지만 커피가 더 간절해진다. 커피를 내리면서 생각한다. 내가 청소해야 할 대상이라는 것을. 내 마음을 닦아야 한다는 것을. 내가 자연의 재료라는 것을.

  아직 자연은 한 번도 깔끔히 청소하지 않았다. 자연은 항상성을 유지하고 있고 그 적강담 때문에 인간은 살 수 있다. 커피나무가 자랄 수 있는 기온을 자연이 알맞게 유지한 것이고, 그래서 열린 열매로 커피를 맛있게 내려 마시는 것이다.

  아, 맛있다.

  이 감탄사는 내가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자연이 우리에게 허락한 적당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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