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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Dec 03. 2023

영상 2도

독자의 힘


  겨울비가 왔고 집에 들어가기 전에 소주와 라면을 샀다. 나는 내가 무엇을 꿈꾸는지 모를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불행하고, 가끔 편안하고, 자주 의문이 든다. 뭔가에 휩싸인 듯한 이 감정은 내 것이 아닌 것 같으면서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한다. 어제는 3시간 동안 산책을 했고 그 시간 동안 행복했다. 물론 가끔 우울해 먹먹하게 하늘을 보기도 했다. 먹구름을 뚫고 햇볕이 내리는 사진을 찍었고, 바람에 흐느끼듯 떨어지는 낙엽을 보며 겨울이 왔다는 것을 실감했다. 겨울은 춥지만 포근한 느낌이 있다. 나를 뭔가로 꽁꽁 감쌀 수 있는 시기다.

  따뜻한 이불로 나를 감싸고, 뜨거운 커피로 나를 감싼다. 전기난로 옆 소파에 누워 읽는 책이 나를 감싼다. 길을 걸으며 듣는 헤드셋의 음악이 귀와 마음을 감싼다. 무엇보다 새벽에 깼을 때 눈이 세상을 감싸고 있으면 추우면서도 따뜻하다. 이 묘한 대비된 감정에 빠질 때면 나를 탁 놓고만 싶어 진다. 어쩌자는 것인지. 무엇을 놓아야 할지 모르면서 그냥 마음이 탁 풀려버린다. 내가 꼭 쥐고 있던 모든 것들에 대해서.

  이 마음이 우스꽝스럽지만, 삶에 대해 조금 넉넉해진다. 감싼다는 것과 쥔다는 것은 분명 다르고, 나는 스스로를 감싸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안다. 나는 그것이 한없이 감사하다.  

 

  라면에 계란도 넣었다. 소주 뚜껑을 땄다. 라면 한 젓가락을 먹고 소주 한 잔을 마셨다. 턴테이블 위에 LP판을 올려놓았다.. 오래된 턴테이블을 중고로 구입했지만 여전히 정확한 속도로 돌아간다. 턴테이블에서 중요한 것은 정확한 속도와 그 속도 위에 올려진 바늘과 적절한 중력이다. 속도에 맞춰 LP판 홈을 따라 바늘이 중심을 잡으며 춤을 춘다. 바늘의 춤에서 음악이 나온다.

  나는 자주 떨림이 음악이라는 생각이 든다. 문장의 떨림이 가사가 되고, 소리의 떨림이 음이 되고, 사람의 떨림이 예술이 된다고.

  지금 내 마음이 떨린다. 떨리는 내 마음은 무엇이 될까? 항상 그것이 의문이다. 나는 내가 꾼 꿈이 될 수 있을까? 이제 와서? 여전히 꿈을 생각하면 마음이 떨린다. 라면 국물에 소주 주를 다시 들이킨다. 피아노 선율이 아름답다. 불쑥 찾아온 떨림은 곧 절망감으로 변한다. 그렇지만, 절망감이 꿈을 이루는 퇴비가 된다고 믿는다. 꿈은 절망 위에 세워진 비석 같은 거다. 절망 없이 이뤄진 것은 꿈이 아니라 목표일 뿐. 술이 달콤한 이유다.  졸음처럼 의식이 몽롱해졌고 속이 핫핫해졌다. 바닥에 엎어져 있는 책을 들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쓴 <지하생활자의 수기>다.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나는 병적인 인간이다……나는 심술궂은 인간이다. 나는 남의 호감을 사지 못하는 인간이다.’

 소설 속 주인공은 스스로를 병적인 인간으로 취급한다. 그의 병은 사회에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지만, 스스로 선택한 병이기도 하다. 윤리적인 합리주의자들도 잔인함이 가득한 현실에서 그 잔인함을 적극적으로 이용하고, 그것을 활용해 이익을 챙긴다. 통통하고 매끈하고 둥그스름한 진실 뒤에 숨은 인간 본성이다. 모두 병적인 인간이다.

  그래서 주인공은 세상에 적응하지 않은 것을 선택한다. 세상과 적대하면서, 세상의 가치라고 내세우는 진실을 깡그리 무시한다. 그렇게 자신을 주장하고 존재를 입증하며 산다. 그래서 주인공의 수기는 그 자체로 인간 내면, 그 깊은 지하에 가라앉아 있는 인간의 어두운 심연이다. 삶이 참 살만하다,라고 포장하지 않는다. 대신 아름답기만 포장지를 찢고, 그 안의 내용물, 인간의 이중성과 부조리가 무엇인지 보여준다.


   병든 영혼이 나오는 부정적인 소설을 왜 쓰냐고 나무라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위대한 작가는 자신 앞에 직면한 세상을 외면하지 못한다. 세상과 자신의 관계를 끊임없이 관찰하고, 객관화하고, 조작하고, 왜 조작했는지 반성하고, 그 반성 때문에 괴로워한다. 그렇게 자신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글로 해체한다. 그렇게 작가를 닮았지만 닮지 않은, 아집과 고집으로 주위사람들과 잘 지내지 못하는 괴팍한 지하생활자가 탄생한다. 비겁한 우리가 없다고 믿고, 외면한 진실이 만들어낸 인간이다. 지하생활자는 뭔가가 결여된 인간이 아닌 뭔가가 더 많은 인간이다. 비합리적인 사회에서 비합리적인 인간이 없다는 것이 오히려 비합리적인 것이 아니던가. 그 사람은 우리 주위에 있다. 주위에 있다는 데 누군지?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우리 내면에도 있다. 지하생활자는 바로 우리다. 당신이 아니라고 하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런 당신은 뭔가가 더 있는 인간이 아니라 뭔가가 없는 인간일 수 있다. 나는 내면을 깊게 관찰할 수 있는 여러 안경 중에 토스트엡스키의 안경을 장착했다. 당신은 그 안경이 없는 것을 수도.


  밖이 어두워졌다. 비는 그쳤다. 기온은 영상 2도다. 이대로 잠들면 안 될 것 같아 옷을 주섬주섬 입고 밖으로 나갔다. 나는 내가 왜 음침한 악몽 같은 글을 좋아하는지 안다. 감춰졌던 것들을 스스로 볼 용기가 없다. 스스로 나를 깨부수기 힘드니 책의 도움으로 나를 살짝 옆보고, 살짝 나를 직시한다. 얼음처럼 차가운 진실을 직접 만질 용기가 없다. 오, 차가운 진실이라니! 그런 게 있기나 한 것일까?

   중요한 건 찾는 행위다. 찾는 행위 중에 내가 아는 방법은 독서다. 작가는 가장 훌륭한 독자 중에 하나다. 찾는 행위를 하지 않는 작가는 좋은 작가가 되기 힘들다. 작가의 작품은 찾는 행위의 결과물이다. 그리고 그것을 읽는 독자는 독자 스스로 독자의 힘을 만들어낸다. 시대정신은 작가가 아닌 독자가 만들어낸다.

 '절망 속에도 불덩어리처럼 강렬한 쾌감이 있는 법이다.'

  이렇게 말할 수도 있겠다. 절망 속에서 느끼는 독서의 쾌감이다. 내가 지하생활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절망 속에서 느끼는 비하의 쾌감이다. 삶의 진실을 알수록 자신이 얼마나 하찮은 인간인지 고백할 수밖에 없다.

  

  밖은 얕은 안개가 끼어있다. 보이지만 보이지 않은 것, 가려진 것들을 감싼 축축함과 뿌연 겨울 안개는 오래된 도시가 만들어낸 낡음을 닮았다. 낡았지만 오히려 서서히 스민 세월을 그대로 드러내는 도시의 거리를 걷는다. 부조리한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기 위해 오히려 부조리한 삶을 꼭 잡고 천천히 걷는다. 내 삶의 축축함은 측은함으로 변하고, 차가운 안개는 아직 남은 술기운에 뜨거워진다.

  컹컹.

  풍경을 찢는 늙은 개소리가 들린다. 흐릿한 안개를 뚫고 모퉁이 뒤에 숨은 나를 보고 싶다. 첫 번째로 나온 골목길 코너에서 재빠르게 돈다. 아무 의미 없이, 아니 찾을 수 없는 걸 찾는 듯 발걸음이 빨라진다. 안개 같은 거친 숨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거의 뛰듯이 걸으면서 개를 따라 짖는다.  

  컹컹컹. 얼어붙은 삶을 깨는 소리, 컹컹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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