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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Nov 19. 2023

영하 1도

삶의 이동

1.

  샤워하고 나오자 드라이아이스처럼 몸에서 김이 피어오른다. 수건으로 재빨리 닦았지만 팔꿈치, 무릎 등의 꺾인 관절 끝과 머리카락 끝에 매달린 물방울이 뚝뚝 떨어진다. 물방울이 추락해 으깨진 건지, 바닥에 안착한 건지 알 수 없다. 얕은 경험이지만 세상일이 추락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라는 걸 안다.

  추락. 오래전부터 이 단어에 붙잡혀 있었고, 쓸데없는 것들에 추락이란 단어를 붙였다.

  추락하는 지식. 추락하는 에스프레소, 추락하는 낙엽, 추락하는 슬픔, 추락하는 연필. 그리고 나.



  존 쿳시의 작품 중에 <추락>이란 소설이 있다.  <추락> 속 주인공은 교수에서 성범죄자로 추락한 후 감춰졌던, 또는 외면했던 진실을 보게 된다. 그가 본 세상은 추락하기 전과 후로 나뉜다. 그의 추락은 세상을 보는 시선을 변화시켰다. 부서진 것이 아니라 재구축이 일어난 것이다.

  추락한 주인공은 다시 원래 위치로 올라가려고 하지 않는다. 그래서 주인공의 추락은 추락이 아니라 삶의 이동이다. 낙엽은 추락해서 땅에 짓이겨지는 것이 아니라 땅의 양분으로 이동한 것이다. 떨어진 낙엽은 다시 나뭇가지에 붙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런 면에서 추락을 경험하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는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오히려 추락의 경험이 소중할 수 있다.

 

  전기포트에서 틱 소리가 났다. 물이 다 끓었다. 전기포트 주둥이에서 김이 거침없이 피어오른다. 차가운 머그잔에 뜨거운 물을 붓고 옥수수수염차 티백을 넣는다. 수수수. 옥수수수염차를 발음할 때마다 수수수, 이 소리가 좋다. 헤어드라이어기로 머리를 말리고, 옷을 입는 중간중간 옥수수수엽차를 마셨다. 역시 좋다. 수수수. 몸이 데워졌다. 구수수수하게.

  옷을 다 입고 거울 앞에 섰다. 몸무게가 늘어 몸이 커졌는데 팔다리가 가느다랗게 변했다. 걷는 것 말고 운동을 하지 않아 온몸의 근육이 점점 빠지고 있다. 그래서 자주 지치나? 몸에 응축된 힘이 없다는 생각이 든다.

  옷깃을 매만지다, 거울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부스스한 얼굴이 낯설다. 언제 이렇게 늙었지. 매일 보는 거울 앞에서 매일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늙고 싶지 않은 욕망이 내뱉는 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욕망 뒤에 숨은 내가 권태로 위장해 시큰둥하게 나를 바라본다. 삶이 다 그렇지. 이런 말을 하면서, 그렇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참 아이러니하다. 시간을 거슬러 가고자 하는 욕망에도 추락이 숨어있다.

 옥수수수염차를 다 마신 후 컵을 싱크대에 넣는다. 로션을 바른 손을 다시 물에 적시고 싶지 않아 컵에 물만 채워 놓는다. 형광등과 보일러, 전기장판이 잘 꺼졌는지 확인한다. 확인했는데도 현관문을 열 때면 확인했는지 정확하지 않아 다시 확인한다. 가끔, 정말 가끔 전기장판을 켜놓고 출근하고, 하루 종일 보일러가 아무도 없는 집을 뜨겁게 달구기도 한다. 그래서 그런지도 모르겠다. 나는 나를 믿을 수 없다.

 


<Borken fall>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W0mpVdt5aa0>

 

  거리로 나오자 신경 하나하나가 바싹 오그라드는 느낌이다. 휙, 소리가 난다. 골목을 휘감으면서 내는 바람 소리지만, 내면에서 뭔가가 빠지는 소리 같다. 기온은 영하 1도다. 숫자가 가을과 겨울을 가르는 판단 기준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하 1도여도 나는 여전히 가을이라고 믿는다. 길가에 서 있는 은행나무 잎에 푸른빛이 남아있다. 나는 숫자보다 은행나무의 생육 리듬을 믿는다.

  떨어지는 낙엽을 보면 '바스 얀 아더르'라는 작가가 떠오른다. 울고 있는 작가의 사진을 접하고, 유튜브에 있는 그의 작품 영상을 찾아봤다. 뭐지? 먼저 이 의문이 들었고, 사실 이 의문이 들지 않는다면 어쩌면 실패한 예술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의문을 쫓다 보면 작가가 표현한 예술에 다가가고, 그 이면에 펼쳐진 새로운 영역을 본다. 어느새 우는 작가를 따라 나도 같이 울고 있다.

  바스 얀 아더르 작품 중에 'Broken Fall'이 있다. '부러진 추락' 쯤으로 번역될 수 있을 것 같다. 작품 영상에서 작가는 나뭇가지가 부러지지 않자 부러지기를 바라면서 나뭇가지 얇은 부분으로 이동한다. 그런데 나뭇가지는 꺾이지 않는다. 결국 작가는 손을 놓는다. 부러진 추락이라기보다 부러지지 않은 추락이 더 정확한 제목 같다.

  부서졌든, 부서지지 않았든 중요한 것은 추락이다. 그리고 작가의 추락은 직접 손을 놓는 능동적인 행위가 있다고 말할 수도 있지만, 힘이 빠진 척, 또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어서 추락한 것일 수도 있다. 그런 의미에서는 그 자체가 부서진 추락일 수도 있다.

  작가는 왜 추락하기 위해 나뭇가지 끝으로 갔을까? 왜 추락하기를 원했을까? 추락은 급격한 힘의 변화이고, 큰 에너지가 숨겨져 있다. 자의든, 타의든 기존 질서에서 떨어져 나가는 강렬한 에너지이다. 추락은 기존 질서와 다른 새로운 삶으로의 이동이다.   

  

2


 카프카의 <변신>도 변신이기도 하지만 추락이기도 하다. 기존 삶에서 다른 삶으로의 이동. 그것도 더 급격한 이동. 단순히 추락이 아니라 정체성 따위가 아닌 종 자체가 변하는 완벽한 변화. 마치 낙엽이 땅 속에 스며서 다른 형태로 변하는 것 같은 이동이다.

 우리 삶은 변신으로 가득하고 이동으로 가득한데 인간만이 자기가 생각하는 자신으로만 남으려고 한다. 종국에는 인간도 죽음으로 변한다. 죽음은 이동이다. 다른 형태로 완벽한 변신이다. 그런데 카프카 소설 속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는 살아있으면서 완벽한 변신을 했다. 감히 혁명보다 더 혁명적인 일이다.

 그레고르 잠자의 변신은 단순히 삶의 이동을 넘어선다. 완벽한 탈주이다. 이 탈주가 무엇을 만들어낼까?


 <변신>의 첫 문장이다.

 ‘어느 날 그레고르 잠자가 불안한 꿈에서 깨어났을 때, 그는 자신이 침대 속에 한 마리의 커다란 벌레로 변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변신> 100쪽. 프란츠 카프카, 솔 출판사.


 나에게 가장 충격적이고 가장 탁월하고 가장 비범한 문장이다. 누구나에게 비범한 문장이 되지 않겠지만 나에게는 절대적으로 그렇다. 카프카의 문장으로 인해 내 안에 가득했던 문장이 송두리째 폭발했다. 내가 만들어낸 문장이 얼마나 과대포장되었는지 말이다. 수소만 가득 차 있고, 내용이 부실한 과자봉지 같은지 깨닫게 한다.

 사랑하는 작가를 만난다는 건, 그 작가가 세상을 보던 시선을 내 안에 들여놓는다는 말이기도 하다. 카프카의 시선은 변신의 첫 문장만으로도 내 안에 넘치게 찼다. 이곳에 쓰는 글은 모두 그의 시선을 빌려 쓴 글이다. 내가 사랑하는 작가가 세상을 봤던 시선으로 내 삶을, 나를 둘러싼 세계를 보는 것이다.

 필연적으로, 비범한 문장은 맥락 속에서 이뤄진다. 다른 말로 하면 비범한 문장 앞뒤에 또 다른 비범한 문장이 있다. 항상 거대한 덩어리로 굴러온다. 그래서 위대한 작가는 문장이 아닌 작품으로 말한다.

 그레고르 잠자는 벌레가 된 자신을 보고 크게 놀라지 않는다(개인적으로는 해충보다는 벌레로 번역하는 것을 좋아한다. 해충은 인간의 생활에 해를 끼치는 벌레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레고르 잠자는 인간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다. ). 심지어 자신이 벌레가 된 것이 행복하다고 느끼기도 한다. 어쩌면 잠자는 벌레가 될 것을 미리 알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스스로 벌레가 되기를 선택한 것일 수도 있다.

 그는 벌레가 되면서 가족으로부터 방에 감금당하고, 나중에는 죽고 버려진다. 벌레가 된 그는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그러니까 필요한 존재였을 때만 환영받던 존재였다. 그렇다면 ‘필요’는 무엇일까? ‘필요’와 ‘불필요’라는 구분은 누가 한 것일까? 나에게 필요하냐, 아니냐의 구분은 아니다.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조금 깊게 생각해 보면 우리가 속한 사회가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을 정하는 것 같다. 우리는 필요와 불필요를 배우고, 필요가 되기 위해 노력한다.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는 그레고르 잠자처럼 버려진다. 그것을 잠자가 몰랐던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는 가족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기 위해서만 필사적으로 살아왔기 때문이다. 누구보다 필요한 존재가 어떤 존재인지 잘 알았다. 하지만 더는 그렇게 살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변신한다.

 그런데 그 변신이 하찮은 벌레다.

 그는 그 많은 변신체 중에서 왜 벌레가 된 것일까? 그럴싸한 영웅의 모습이 아닌 하찮은 존재로 말이다. 다시 여기에서 경계가 생긴다. 누가 벌레가 하찮은 존재라고 했을까? 벌레도 그 자체로 하나의 생명체인 완벽한 존재다. 사회에서 요구한 모습이 아닐 뿐, 벌레도 자신만의 세계가 있고 자신의 법칙에 따라 살아간다.

 삶을 버리지 않고, 사회의 구속과 구조에서 벗어나는 길은 오직 하나다. 사회가 그를 필요하지 않아야 한다. 필요의 강요로부터 벗어나야 한다. 멀쩡한 상태로는 사회의 구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잠자가 벌레로 변한 것은 자신의 의지라고 말하고 싶다. 그것도 아주 강렬한, 혁명적인 의지다. 적당히 사회적으로 환영받는 강아지로 변했다면, 집을 지키거나 애완동물이 되어 사회적으로 요구된 존재가 됐을 것이다. 이 모든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존재가 바로 벌레인 것이다.

 잠자가 불필요한 존재로 변신하는 순간, 가족은 잠자를 버린다. 우리는 필요 없는 존재에 가하는 폭력을 목도하게 된다. 그 폭력은 벌레여서가 아니라 그것을 구분하던 필요와 불필요의 기준에  따른 것이다.  그 기준은 사회가 만들었고, 우리가 용인하고 있다는 것을. 그래서 누군가 불필요한 존재가 되었을 때 우리는 알게 모르게 가차 없이 폭력을 행사해 왔다는 것을.

 자, 여기 우리가 만든 기준이 얼마나 폭력적인지 알게 해 주는 혁명적인 존재가 있다. 그것은 벌레다. 우리는 벌레를 쉽게 밟아 죽인다. 벌레 죽이기는 사회가 우리에게 죽이라고 명령한 것이고, 우리는 그것을 따른다. 죽이는 편에 서서 자신이 필요한 사람임을 증명한다.  


 위대한 작품은 읽는 사람을 해체시킨다. 현실 세계에서 내 위치가 어디인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무리 감싸고 합리화하고 포장한다고 해도, 발가벗긴다. 벗겨진 나는 그때서야 내가 누구인지 깨닫는다. 벌레와 가족 그 중간 어디쯤에 있는지를 말이다. 어느 때는 가족이었고, 그러니까 함부로 폭력을 휘둘렀고, 어느 때는 벌레가 되어 스스로를 하찮게 여겼다. 내 처지와 이익에 따라 나에게 이로운 감투를 썼던 것이다. 변신이 아닌 가면 말이다.

 물론 다시 사회 구조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 합리화하고 나름 멋진 감투를 쓰지만, 그 짧은 자각만으로도 나의 선택 방향이 바뀌고 내가 바라보는 세상이 달라진다. 내가 한 선택이 혹여 벌레로 변한 타인을 죽이는 선택인지 이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가끔 외칠 수밖에 없다.  

 "변신"

 마치 어렸을 때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외치면 아주 짧은 순간 변신로봇이 되어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처럼 나는 조금 강해진다. 세상에 대항할 힘을 얻는다. 벌레처럼 혁명적인 존재가 될 수 없지만, 나도 아주 작은 변신을 한다고 착각한다. 그래, 착각도 가끔 힘이 된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는 것도, 서점 카프카를 운영하는 것도 착각한 변신체가 하는 일이다.  이 변신체는 벌레에 가까운가? 가족에 가까운가?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끝없이 사회적 관계가 재편성되기에,  끝없이 이 질문을 할 수밖에 없다.  


3.

 우리는 감히 그레고르 잠자처럼 완벽한 변신을 하지 못한다. 그런 완벽한 추락도, 그런 절단면이 확실한 이동도 없다.  다만, 연약한 우리는 가끔 추락한다. 우리는 매일 추락하지만 추락을 모르기도 한다. 추락할 만큼 높아져 본 적이 없다고 할 수도 있지만, 추락은 높이의 문제가 아니다. 더 높다고 해서 더 깊이 추락을 하는 건 아니다. 어떤 삶은 한 발자국만 아래로 내려가도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질 수 있다.

  알싸한 경유 냄새를 피우며 내 옆으로 파란색 트럭이 지나간다. 멀어지는 트럭 배기구에서도 흰 김이 피어난다. 그 길 끝으로 어스름한 아침에 쨍하게 켜진 광고판이 묘하게 아름답다. 여기에요. 이곳에 있어요. 아무도 없는 거리에서 외치고 싶은 욕구는 뭘까? 누군가 나를 알아봐 주기를 바라는 욕망에도 추락이 가득하다. 인정욕구에 함몰된 사람이야 말로 가지 끝에 매달린 추락하기 전의  상태다.

  연한 먹구름이 하늘을 가로지른다. 서서히, 그렇지만 아마도 빠를 것이다. 멀리 있는 건 빠르기를 가늠하기 힘들다. 그래서 우리는 먼 미래를 가늠할 수 없다. 이미 왔을 때야, 그 빠르기에 현기증을 일으킨다. 어쩌려고 항상 뒤늦게 느끼고, 그런 자신에게 짐을 지우는지. 어느새 없던 짐을 머리와 어깨에 높이 쌓았다. 시간이 지났다면 지난 것일 텐데, 시간을 허투루 썼다고 자책하며 내가 해야 했지만 하지 못한 일들이 짐이 되어 싸이는 걸까!  원래 없던 짐을 스스로 만들고 있는 나는 더 무겁게 추락한다. 객과적으로 보면 나의 추락은 사소하다. 가을이 오면 누구나 느끼는 어떤 멜랑콜리함을 유난하게 추락으로 사칭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소함이 삶을 지배하지 않던가.

  찰싹.

  뺨을 때리는 거센 바람이 분다. 나뭇가지가 춤추듯 흔들린다. 낙엽이 동시에 추락한다. 그리고 나도. 잠시 넋이 나간 채 낙엽이 하늘을 뒤덮은 풍경을 응시한다. 거대한 풍경 속에서 나는 너무 작고 연약하다. 회초리 같은 겨울이 온다. 올해도 나는 창백한 매를 맞을 준비를 한다.

  여름에서부터 전력질주로 달려온 가을이 추락한다. 삶이 이동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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