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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Nov 12. 2023

프롤로그- 창백한 빛


1.

  온풍기에  콧속이 메말라 갑갑하다. 눈꺼풀도 뻑뻑해진 느낌이다. 여러 번 눈을 깜박였다. 눈물이 날 것 같지만, 눈물은 나지 않았다. 우울하지만 슬프지 않은 상태가 며칠 지속되고 있다. 우울이 슬픔을 불러올 것 같지만, 우울은 슬픔보다는 무감각, 또는 무기력을 불러온다. 그래서 뭔가에서 떨어져 나갔다는 기분이 든다. 툭, 그렇게 덩그러니. 마치 낙엽처럼. 뜨거운 커피에서 피어나는 김에 얼굴을 가져다 대고 손으로 박박 비볐다. 몸을 잔뜩 움츠렸다 폈다. 그러면 이상하게 잠깐 씩씩해진다. 일부러 더 크게 몸을 쭉 늘인다. 주먹까지 꽉 쥐고.

  가을이 왔다 싶었는데, 겨울이 왔다. 계절도 삶도 나를 기다려준 적이 없었다. 원하는 삶을 꽉 붙잡고 싶은 사람을 바보로 만든다. 아니, 아니지. 기다리는 건 없다. 기다림은 원래 있었지만 사라진 것이 다시 오기를 바라는 마음일 텐데, 내가 원하는 건 없었던 무엇이고 있었다고 착각한 무엇이다. 그래서 글을 쓰는지도 모르겠다. 없는 것을 있게 만드는 힘은 내가 아는 것 중에서 글쓰기가 유일하다. 흘러가는 것을 단어와 문장으로 가두는 힘, 그 힘에 의지해 현실에서 그런대로 버티고 서 있다.   

  며칠 전에 핸드폰이 망가졌다. 꼭 자영업자라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할 수 없고 받을 수 없다는 건 상당한 공포였다. 새 핸드폰을 곧바로 샀는데 하루종일 만지작거린다. 핸드폰 구조와 형식은 정해져 있으니 나를 기기에 맞추는 작업을 열심히 하는 것이다. 그 과정은 재미있다. 유튜브에는 어떻게 하면 그 과정을 잘할 수 있는지에 대한 정보가 넘쳐난다.

  세상에 맙소사. 어떻게 이렇게 오랫동안 집중력을 잃지 않고 빠져있을 수 있지. 놀라고 감탄하고, 한편으로는 좌절한다.  

  핸드폰은 세상으로 향하는 창이라기보다 나를 가두는 문이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알고리즘에, 입력된 자료를 토대로 원하는 출력을 유도하는 어떤 규칙에 사로잡혀 있다. 나는 그렇게 끝없이 유도당한다.

  기기가 무슨 잘못일까? 그런 생각이 들면서도, 모든 잘못을 나에게 돌리기에는 나는 나를 제어할 수 없고, 나를 밀어붙이는 힘은 나에게서 나온 것 같지 않다. 그러면 사회 탓? 아니면 핸드폰을 만든 사람? 자본은 욕망을 먹고사는 제도이고 나도 그 제도 안에 살기에 벗어날 수 없다고 한탄만 하면 안 될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저절로 뜬 핸드폰 케이스 광고 사이트를 클릭했다.

  젠장.

  너무 이쁜 딥그린 케이스를 발견했고, 비싸서 망설였고, 다른 것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아니다. 끝없이 서핑만 할 것 같아서 처음 발견한 케이스를 구매했다. 다시 취소하고 저렴한 케이스를 샀다. 그러면서 나는 자본의 유혹으로부터 나를 지켰다고 허황된 용기를 얻었다. 저항이 아닌 투정으로 내 삶을 장식한다. 이럴 때면 나는 나를 참을 수 없고, 마치 강요된 권태 속에 갇히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은 구름처럼 흘러가고, 적응과 부적응 사이에서 나만의 것을 건져 올리려고 발버둥 친다. 나는 이 단어를 좋아한다. '발버둥 치다.' 기를 쓰고 뭔가로부터 벗어나려는 행동이지만, 마치 어렸을 때 밥 달라고 떼쓰는 장난꾸러기 같기도 하다. 두 팔과 두 다리를 하늘에 뻗고 뒤집힌 거북이처럼. 그렇게 똑같은 삶에서 똑같지 않으려고 발버둥 친다. 그래서 우리는 똑같으면서 다르다. 거푸집 같은 구조를 튕겨내는 힘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육 년 정도 되었나? 그 시기동안 내 손 위에 가장 많이 올려졌던, 그리고 가장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던 핸드폰이다. 부서진 핸드폰에 애착이 생길 만도 한데, 괴상하게 그렇지 않다. 분명 괴상한 일이다. 오히려 새 핸드폰에 대한 기대감과 얼른 새로운 기능을 만져보고 싶은 욕구만 더 커진다. 화면이 안 나올 때, 이 생각부터 들었다.

  드디어 바꿀 수 있구나!

  사용가치가 없어지자 애정도 함께 식어버렸다. 과거 핸드폰은, 아, 며칠이나 됐다고 벌써 과거라는 말을 붙이다니, 어느새 없는 존재가 되어 새 핸드폰이 생긴 이후로 한 번도 만지지 않았다. 오래 함께 한다고 무조건 애정이 생기는 건 아니다. 알고 있다. 그렇지만, 쉽게 버릴 수도 없다. 나는 고장 난 핸드폰을 서랍 속에 오래 보관할 것이다. 내 서랍 속에는 부서진, 그리고 새 폰으로 교체하면서 쓰지 않게 된 폰들의 무덤이 있다.

 이후에 그 무덤 속에서 꺼낼 수 있는 건 없지만, 버리지 않았다는 애처로운 내 마음은 가둘 수는 있다.   

 

2.

  이불을 둘러쓰고 따뜻한 옥수수수염차를 홀짝였다. 창문을 열었다.

  이제 정말 겨울이네.

  열린 창문에 대고 말했다. 매년 똑같은 계절의 반복 같지만, 매일매일 날씨가 다르고, 항상 예측하지만 맞을 때도 있고 틀릴 때도 있다. 개인적으로는, 맞춘 것보다 틀린 것에 더 의미를 부여한다. 맞춘 것은 예상을 잘했다기보다 예상할 수 있을 정도로 변화가 없이 고정되었다는 뜻이다. 예측이 발달할수록 내 생활패턴과 내 정체성까지 예측의 영역에 포함되고, 인간은 밭 한가운데 꽂아진 허수아비가 된다. 예측 가능한 고정된 인간으로.

  벗어나자, 이런 외침도 예측의 영역에 속한 지 오래되었다. 그래서 퇴사를 하고, 그래서 여행을 가고, 그들을 예측해 대안을 준비해 두고 있다. 사람들은 벗어나는 두려움을 줄이기 위해 벗어난 사람들의 정보를 답습한다.  

  다시 똑같은 반복에 도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측과 불확실성 사이에서 나만의 삶을 이룩한다. 우리는 똑같으면서 너무 다르다. 그래서 타인을 사랑할 수 있고, 그래서 고독을 발명했고, 그래서 절망 속에서 순도 높은 희망을 발견한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본 타인의 죽음 소식에 나도 모르게 눈물을 쏟은 것처럼.  갑자기 쏟아진 눈물에 나도 놀랐고, 뒤늦게 알아차린 알고리즘도 예측에서 벗어난 내 슬픔에 놀랐을 것이다.

  

  하늘이 우중충하고 창백하다. 나는 겨울이 되면 깊은 잠에 빠지는 곰처럼 알 수 없는 창백함에 푹 빠진다. 그렇다고 축 져지지는 않는다. 오히려 제법 날카롭게 변한다. 논리적으로 변한다는 뜻이 아니라, 겨울은 저절로 내가 나를 보는 시기, 내 안으로 더 깊게 응축해 들어가게 한다.

  창백한 빛은 지성이 아니다. 뭐라고 불러야 할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눈송이 같은 깃털을 품고 있는 창백한 빛은 내가 나를 보는 시선이다. 매몰차고 날카로우면서 푸근한.  매년, 나는 이 시기를 거치면서 일 년 동안의 시간을 뒤돌아본다. 조정한다. 아니, 붙어있는 뭔가를 털어낸다. 싹둑 잘라내기도 한다. 떨어진 것들에 대한 애증으로 다시 가져다 붙이기도 한다. 결국 버리지 못하고 내 몸 어딘가에도 잘려나간 것들의 무덤이 있다. 그 서랍은 제법 튼튼하고 슬픔에도 뒤틀리지 않는다. 일 년에 한 번 열었다가 닫는다.

  붙였다 떨어졌다, 그리고 다시 붙이는 과정에서 새로운 의미가 발생한다고 나는 믿는다. 그 의미가 특별하지 않더라고, 새롭지 않더라도, 연결을 만들어내고, 그 연결은 내 안에 들어온 나와 타인과의 혼탁한 절망과 욕망, 그리고 희망을 정리하는 힘이 있다. 그렇게 정리된 힘으로 다시 일 년을 산다. 그렇게 창백함에 빠지는 일은 건강한 고독을 와그작와그작 씹는 느낌이다.

 아직 새벽이기에 나는 책을 펼친다. 겨울은 차고 건조하다. 내가 펼친 책에서 똑같은 문장을 만났다.

'흑담즙은 차고 건조하다.'


<인간의 영혼은 네 개의 기질을 가지고 있다. 피의 자리에 달콤함을, 붉은 담즙의 자리에 쓸쓸함은, 흑담즙의 자리에 슬픔을...... 흑담즙은 차갑고 건조하다. 하지만 냉기와 건조함을 우리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해석할 수 있다..... 흑담즙은 때로는 졸음에 빠지게 하고 때로는 경각심을 불러일으킨다. 다시 말해 마음을 무겁게 하기도 하고 희망찬 소망과 함께 주의 깊게 정진하도록 하기도 한다...... 한때 피를 통해  자비의 달콤함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도 언제든지 흑담즙을 통해 혹은 우울증을 통해 죄로 인한 슬픔을 맛볼 수 있다.> 라틴교부총서 176, 1183 이하


  이 글은 조르조 아감벤의 <행간- 윤병언 옮김, 자음과모음>의 48쪽에 있는 문장이다. 아감벤이 쓴 글이 아니라 라틴교부총서에 나와 있는 문장을 아감벤도 인용했다.

 겨울과 흑담즙은 닮았다. 아니, 겨울은 흑담즙이다. 반대로 흑담즙은 겨울이다. 그런데 갑자기 왜 흑담즙인가? 과거에 흑담즙은 인간의 육체가 가지고 있는 네 가지 체질 중에 하나이고, 멜랑콜리아로 불렸다. 멜랑은 검다, 콜레는 담즙을 뜻한다. 맞다.  우리가 아는 그 멜랑콜리아! 오늘 참 멜랑콜리하네, 의 멜랑콜리아!

 흔히 우울할 때 멜랑콜리하다고 말한다. 어떤 우울의 상태를 나타내는 건 분명한데, 정확히 어떤 상태인지는 단언할 수 없다. 과거에 많은 예술가들이 멜랑콜리아에 어떤 예술적 영감 같은 것이 온다고 믿었다. 우울에 빠진 모습은 마치 우수에 찬 예술가의 모습처럼 비치기도 했다.

 아무 상관없는데, 괜히 멜랑콜리아와 예술가를 연결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감벤이 인용한 문장처럼 '냉기와 건조함을 우리는 때로는 긍정적으로 때로는 부정적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마치, 위대한 예술가의 내면에는 멜랑콜리아가 존재하고, 반대로 멜랑콜리아적인 기질이 있어야 위대한 예술가가 될 수 있는 자격이라도 된 듯이 말이다. 멜랑콜리아는 예술가의 중요한 특징이 된다.  


 겨울을 차고 건조하다. 나는 멜랑콜리하다. 그래서 나도 혹시 예술가의 소질이 있는 것은 아닌가, 잠깐 고민한다. 하지만 멜랑콜리아 하다고 해서 예술가가 되는 건 아니다. 예술가가 되고 싶은 나는 그것을 너무도 잘 안다. 오히려 나의 우울은 내가 예술가가 아니기 때문에 찾아온 감정이다. 이불 속에 들어가 위대한 작가의 책을 마치 과자를 먹듯, 또는 와인을 홀짝이듯 끝없이 읽으면서 깨닫는다.

 아, 나는 작가가 될 수 없구나.

 나와 위대한 예술가와의 간극을 끝없이 느끼고 그 간극이 벌어지면 그 사이에 차곡차곡 우울을 가득 채운다. 사랑하고 싶지만 사랑하고 싶은 대상이 너무 멀리 있어, 그래서 사실 없다고 말해도 좋을 대상을 끝없이 갈망하는 마음이 우울을 불러온다.

 소유한 적이 없기에, 상실이 없다. 그런데도 없음을 끝없이 인식하고 빈 공간을 만든다. 있다가 사라진 공간이 아니기에, 그 크기는 오히려 가늠할 수 없다. 내가 느끼는 감정만큼 크고 깊어진다. 그러면서 사랑한 적 없지만 사랑하고 싶은 대상을 탐한다. 겨울은 모든 것이 멈추는 계절, 그래서 더욱 공상을 많이 하는 계절이다. 공상은 끝이 없고, 그래서 나의 멜랑콜리아는 더욱 커진다.

 오늘도 멜링콜리아 한 날씨다. 차고 건조한 날씨. 겨울은 그렇게 재능 없는 나를 차고 건조하게,  그래서 투명하게, 때로는 꽉 막힌 듯 딱딱하게 만든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지금이 겨울이라는 것이고, 겨울 자체가 나를 멜랑콜리아 하게 만든다. 자연이 인간에게 공통적으로 허락한 재능이고, 시공간이다. 예술가가 아닌, 예술가가 되고 싶은 내가 예술가인 척할 수 있는 시간이다.

 와, 겨울이다.

 이렇게 외치는 것이다. 이 외침만으로도 나는 자연이 준 시공간에 들어간다. 그리고 멜랑콜리해진다. 차고 건조한 빛을 따라 글을 쓴다. 이 책은 바로 그 차고 건조한 창백한 빛에 관한 이야기이다.

  일하러 가야지,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열린 창문으로 차갑고 날카로운 바람이 불어온다. 닭살이 살짝 돋는다. 으스스, 이렇게 맑게 잠에서 깬 건 오랜만이다.



3.

 이제 출근 시간이다. 나는 서점으로 향한다. 나는 서점을 운영하는 자영업자이다. 서점 이름이 카프카다. 변신으로 유명한 그 작가가 맞다. 어쩌자고 서점 뒤에 그 유명한, 정체를 정확히 파악하기도 힘든 작가의 이름을 붙였을까! 왜 서점 이름을 카프카로 지었냐는 질문은 손님들의 단골 물음이 되었고, 나는 그냥 좋아하는 작가라고 대답했다. 사실,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알지 못했다. 나는 카프카를 좋아하기도 하지만 싫어하기도 한다. 양가적인 감정이 묘하게 섞여 있는 작가다.

 서점카프카!

 벌써 11년째 운영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서점 카프카를 알 수 없다. 내가 운영하는데 모른다고?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인가? 분명한 것은 나와 서점 카프카는 다르다. 어느 시점부터 서점 카프카는 소유권의 문제를 떠나 나와 동떨어져 나름의 정체성을 가지고 존재하기 시작했다. 책을 파는 서점과 작가인 카프카가 하나의 묶음으로 존재한다.  그 나름의 방식으로. 벌써 하나의 단어로 묶인 듯 보인다. '서점카프카'라는 소리와 연결된 의미가 자의적으로 다양하게 달라붙어 있다.  

 모든 존재는 차이를 가지고 있고, 차이 그 자체가 아니라 차이가 만들어낸 틀어진 틈을 통해서 자신을 뽐낸다. 틈 자체가 나름의 방식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와 서점 카프카와의 틈이 벌어졌다 좁혀졌다, 때로는 겹쳐졌다가 주름이 졌다가, 쫙 펼쳐졌다 하면서 관계를 맺는다. 이건 나와 카프카뿐만 아니라 서점 카프카에 온 손님들과도 이런 형태로 관계를 맺는다. 그러니, 더는 서점 카프카는 나와의 관계로만 고정된 무엇이 아니다.

 다시 말하지만 '서점 카프카'는 여러 사람에게 나름의 의미를 가지는 하나의 단어로 존재하고, 그렇기에 연결된 의미는 다양하다. 어쩌면 수없이 많다. 누군가는 창가의 빛을 좋아할 것이고, 누군가는 자신이 찾던 책이 책장에 있다는 환희로  접속을 할 것이고, 누군가는 와, 이 책은 뭐야,라고 처음 접한 새로운 작가의 이름으로 서점을 기억할 것이다. 또 누군가는 커피가 맛없다고 기억할 것이다. 그렇게  좋은 의미든, 나쁜 의미든 접속은 흘러간 시간만큼 배가 될 것이고, 그 기억은 각자의 서점이 된다.

 서점 카프카 창으로 창백한 빛이 들어온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빛의 각도다. 책장은 비켜가고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는 공간에만 빛이 가득 찬다. 가을과 겨울에만 가능한 각도다. 특히, 나는 서점 카프카에 겨울 빛이 가득할 때를 가장 사랑한다. 덥지 않고 적당히 따뜻한 빛. 피하고 싶다기보다, 마치 푸른 잎의 식물처럼 빛이 비치는 쪽으로 몸이 저절로 옮겨지는 그 모든 행동을 사랑한다.     

  아직 온풍기를 아직 틀지 않은 서점은 차고 건조하다. 커피를 내려서 아침 햇살이 비치는 곳 의자에 앉았다. 천천히 홀짝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또 일 년이 지나는구나. 나도 서점도 한 살을 더 먹는구나. 느닷없는 회고가 나를 감싼다. 그 느낌은 축축함과 다른 깡마른 슬픔이다. 그래서 겨울이 좋다. 모든 감정에서 축축함을 사라지게 한다. 메말라서 슬픔의 주름과 욕망의 거친 표면과 고통의 정확한 무게를 자세히 알게 해 준다. 멜랑콜리아는, 우울로 번역되지만, 우울에서 축축함을 뺀다면 그건 완벽한 형태를 가진 사물처럼 느껴진다. 나에게는 그렇다. 우울에 빠진다는 표현은 겨울에는 불가능하다. 우울에 앉는다. 우울 위에 올라탄다. 우울을 던진다. 우울을 부순다. 우울을 감싼다. 우울을 사각 퍼즐 맞추기처럼 이리저리 돌려본다.  아니, 우울에 갇히기도 한다. 쇠창살이 있는 탄탄한 감옥 같은 우울에.

  커피가 조금 쓰다. 나는 좋지만, 손님은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분쇄도와 도징량을 조절해야 한다. 나는 주위를 둘러본다. 책도 모두 사물이다. 나는 저 사물 속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것도 멜랑콜리하게.

 책을 한 권 들고 와 다시 자리에 앉는다. 책을 펼친다. 오늘 서점 카프카는 이 책의 첫 문장과 나를 감싼 햇빛으로 기억될 것이다.  창백한 빛이 내 몸에 알맞게 가득 찬다. 항상, 나는 이 생각을 한다. 인간만이 차고 넘치거나 부족할 뿐, 자연은 항상 적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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