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강물 Nov 26. 2023

0도

죽음과 함께하는 글쓰기

1.

  잠들기 전부터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이 거대한 벽에 막혀 울부짖는 듯했지만, 곧 벽을 휘감는 소리로 변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 같았다. 촘촘히 모인 네모난 건물들이 하모니카처럼 내는 소리일지도. 아니면 건물 속 인간들의 작은 속삭임이 바람소리와 함께 증폭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높은음, 낮은음, 그렇게 삶의 속삭임은 결국 화음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외침과 비명을 잡아먹으면서. 아니 비명과 외침도 화음의 일부일 수 있다.

  그래서 화음은 아름다우면서 무섭다. 모든 것이 딱딱 맞아떨어진다니! 얼마나 놀랍도록 아름다운 폭력인가!


  태풍이 지나가도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 요즘 예민해 조그마한 소리에도 눈을 번쩍 뜨인다. 바람 소리 말고도 다른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것을 구분할 만큼 깊게 잠들지 못했다. 잠에서 깬 김에 화장실을 들렸다 차가운 물을 마셨다. 그 순간, 짧게 쨍한 명징함이 찾아온다. 그래,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이 이런 것이었지. 아 맞아 그 소설가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거야. 거실 베란다 창문으로 치고 들어온 바람에 나는 잠깐 붕 뜬 듯이 허공에서 내가 찾아낸 의미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간밤에 토마스 만이 쓴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읽었다. 아름다움 때문에 죽다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찾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환희보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은 파괴성이 더 강렬했다. 잔인한 부름 같은 걸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균열에 빠진 걸까?

   아, 다리가 살짝 풀려 거실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나무 의자는 딱딱하고 차갑다. 엉덩이에서부터 등허리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깨끗하게 춥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지만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그만큼 매혹이 강렬하다는 증거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직 그런 매혹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는 여러 매혹을 만난다. 그것이 애국심일 수도 있고, 종교적 신념, 또는 집착일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진 마음 여린 청년일 수도 있다.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성도 분명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합리성이 아닐 뿐이지, 매혹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성은 크게 작동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전쟁을 하고 것처럼.

  매혹과 이성은 절대로 반대가 아니다. 이렇게 나눌 수도 있겠다. 매혹을 탐하는 이성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지 않은 이성일 뿐이라고. 그럼에도 이성이기에 나름의 정연한 논리가 있다. 그것이 어쩌면 한 예술가의 예술론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광기는 예술이란 이름으로 표현되고, 예술적 승화의 대상이 된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로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도 부를 수 있겠다. 자신만의 완벽한 미를 찾아가는 광기 같은 이성이라고.

  다시 몸을 이끌고 침대에 쏙 들어간다. 허벅지 사이에 차가운 손을 끼워 넣고 비빈다. 순간 명징했던 생각이 조금씩 말랑말랑하게 덥혀진다. 침대 위에 올려진 책을 펼쳤다.




  ‘형식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형식은 도덕적이면서 부도덕한 것이 아닐까? 자기 훈육의 결과와 표현으로서의 형식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형식은 원래부터 도덕적 냉담함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본성 탓에 자신의 오만하고도 무제한적 지배 아래 도덕을 굴복시키고자 애쓰는 형식이라면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반도덕적이기까지 한 것은 아닐까?’


 주인공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후기에 훈육의 결과와 표현으로서의 작품을 만든다. ‘전통적 문체, 보존적 문체, 형식적 문체, 심지어 상투적 문체로까지 변해갔다.’ 형식의 두 얼굴 중에서 도덕적인 면이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아센바흐는 베네치아에서 한 아름다운 소년을 본다. 그 순간 형식의 비도덕한 면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그것도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얼굴로.

  이 소설은 고착된 형식의 다른 면, 반도덕적인 면이 찾아온 순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반도덕적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질서에 순응할 수 없었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인공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어도 매혹에 빠져 도망가지 못한다.

 하지만 그 광기가 느닷없이 늙은 주인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 품었던, 그리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도전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듬어졌다고 믿지만, 사실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바로 잃어버렸던 욕망이 튀어나온 것이고, 주인공은 그것을 다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죽음이 먼저 그를 잡는다.

  <베네치아에서 죽다> 소설은 주인공의 마지막 예술혼 기록이다. 주인공이 잡고 싶었던 신기루 같았던 완벽한 이상, 그 실체, 현현의 소년이 바로 앞에 있다. 그는 도망칠 수 없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의 삶이 존재했다. 소설가 토마스만은 바로 그 순간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

  

2.

  카프카 단편 소설 중에 <선고>가 있다. 소설 <선고> 속에서도 죽음이 나온다. 주인공 게오르크 벤데만이 아버지로부터 죽음을 선고받는다. 그리고 그는 밖으로 나가 다리 위에서 강으로 뛰어든다.

 왜?

 이 죽음도 구스타프 안센바흐와 비슷하다. 어쩌면 똑같다. 소설 <선고> 속 주인공 게으로크 벤데만은 멀리 페케르부르트로 떠난 고향 친구를 안타까워한다. 친구의 사업은 부진하고, 병이 걸린 듯한 모습으로 살고 있다. 결국에는 영구적인 독신 생활에 적응하고 있다.

 벤데만은 그런 친구를 고향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려고 한다. 자신의 약혼자와 결혼이 좋은 구실이 될 것이다. 벤데만은 왜 실패한 친구를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게 하려는 것일까? 고향은 굳건히 구조화된 성이다. 그 안에서는 누구도 다르게 살 수 없다. 벤데만처럼 살수 밖에 없다. 그런데 친구는 고향을 뛰쳐나갔고, 결혼도 하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산다. 벤데만은 실패한 친구의 삶이 안타까운 척 하지만 사실 부러워 시기와 질투를 하고 있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런 친구는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벤데만은 믿지 않는다. 곧 아버지도 친구가 있다는 듯이 행동한다.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이놈아, 네가 날 덮어주려고 한다는 걸 알고 있어. 하지만 난 덮이질 않았어. 마지막 힘이긴 하지만 너 정도 해치우기에는 충분해. 해치우고도 남지. 난 네 친구를 잘 알아. 그가 내 마음의 아들이나 다름없어. 그런 까닭에 너 그를 여러 해 동안 속여온 거야. 다른 이유는 없지? 내가 그를 위해 울지 않았다고 생각하느냐? 그런 까닭에 너 네 사무실에 처박혀 있었던 거야. 사장이 지금 업무가 바쁘니 아무도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말을 하지만, 실은 러시아로 거짓 편지를 쓰느라고 하는 수작이지. 다행히도 아버지에게 아들을 조사하는 방법을 가르쳐줄 사람이라곤 있을 수 없어. 너 그를 제압한 것으로 믿고 있지. 네 궁둥이로 그를 깔고 앉을 정도로 그를 제압했다고 말이야. 사실 그는 꼼짝도 안 하고 있어. 내 아들이 결혼할 결심을 했는데도 말이야."

 벤데만은 자신이 친구를 깔아뭉개고 있다고 믿지만, 사실 친구가 벤데만을 깔아뭉개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알고 있다. 없는 친구가 어떻게 벤데만을 깔아뭉개는지. 벤데만은 가상의 친구를 만들고, 그 친구처럼 뛰쳐나가고 싶지만 그럴 용기가 없다. 그래서 고향을 뛰쳐나간 친구를 만들었고, 그 친구를 시기 질투하는 것이다.

 아버지는 벤데만에게 선고를 내린다.

 "나는 지금 너에게 빠져 죽을 것을 선고한다."

 그 선고를 하는 아버지도 침대에서 쓰러진다. 죽었다는 문장은 없지만, 유추컨대 아버지는 죽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부모가 자랑스러워하는 뛰어난 체조 선수였던 벤데만은 나간을 훌쩍 뛰어넘어 강으로 빠진다. 벤데만은 죽는다. 그럼 왜 벤데만은 갑자기 죽은 것일까? 그가 죽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성공한 사업가이고 곧 결혼할 여자도 있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죽음을 선고했고 벤데만은 그 선고를 받아들인다. 그전에 벤데만의 아버지는 쓰러진다. 자신에게 죽음을 선고한 대상이 쓰러졌는데,  왜 벤데만은 선고를 거부하지 않고 죽었을까? 자신을 가두던 권력인 아버지가 죽었는데? 그 권력자가 죽이더라도, 이미 내려진 명령을 물릴 수 없다. 단순한 권력투쟁이었다면 벤데만은 투쟁에서 이긴 것이고 아버지가 가꾼 성을 자치하면 될 일이다. 아버지가 죽고,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어도, 그는 또 다른 권력이 될 뿐 삶이 바뀔 리 없다. 벤데만은 아버지로 대체된다. 그리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은 또 똑같은 행보를 할 것이다.  

 선고를 단순히 권력투쟁으로 보는 건 어쩌면 너무나 일차원적인 해석일 수도 있다. 벤데만과 아버지가 죽게 된 사건은 벤데만의 친구를 고향에 불러오게 하는 사건에서 촉발했다. 즉, 벤데만과 아버지의 죽음에는 그 자리에 없었던 친구 때문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소설의 진정한 주인공은 친구이다. 사건의 시작이고 마지막이다. 실제로 존재하는지 애매한  벤데만의 친구를 두고 벤데만와 아버지는 대립을 한다. 왜? 어째서?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벤데만의 친구의 정체는 무엇인가? 사업에 실패하고, 결혼조차 못하는 실패한 인간? 아니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벤데만이 시기 질투하는 인물이다. 그리고 아버지 또한 그렇다. 벤데만이 늙으면 아버지 같은 존재가 된다. 그 말은 아버지는 젊었을 때 벤데만 같았다. 오히려 벤데만과 친구가 한 쌍이 아니라, 벤데만과 아버지가 닮은 꼴이고 한 쌍이다.

 아버지 또한 벤데만의 친구를 시기 질투를 할 수밖에 없다. 젊었을 때 꿈꾸었던 자유로운 삶. 그 삶을 가진 존재. 그래서 벤데만에게 하는  아버지의 선고는 자신의 죽음의 선고이고, 젊었을 적의 자신에게 하는 선고이다. 그런 의미로 아버지는 늙은 베네치아의 아센바흐이기도 하다.


 벤데만의 친구는 아센바흐가 본 미소년과 같은 사람이다. 현실에 주저앉은 자신과 다른 완벽한 미를 가진 사람, 또는 완벽한 자유를 가진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죽음이 찾아온다. 죽음조차 욕망하는 마음을 갈라놓을 수 없다. 어쩌면 죽음이야말로 완벽하게 일치하는 욕망일 것이다.  

 선고에서 벤데만의 죽음은 현실에 꽉 막혀 사는 존재의 죽음이다. 다른 존재는 밖에서 자유를 만끽하면서 살고 있다. 하지만 자유를 만끽하는 존재도 벤데만이 만든 허구의 인물이다. 혹여 현실에 꽉 막힌 삶을 사는 내 안의 하나가 죽었으니 또 다른 자아가 자유로운 삶을 산다고 착각하면 안 된다. 그런 꿈같은 일은 현실에서 일어나지 않는다. 그 둘은 함께 죽는다. 살면서는 하나로 합쳐질 수 없었던 둘은 죽음이 하나로 만든다.

 그것이 죽음의 의미이고, 선고를 받아들이면서 선고를 위반하는 유일한 일이다.  

 아센바흐가 완벽한 이상적인 미인 소년에게서 떠나지 못하고 죽음으로 완성한 것처럼.

 

  하지만 죽음으로 하나가 되는 것은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 죽으면 끝이다.  작가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에 대해 쓴다. 스스로 그 순간을 창조하고, 스스로 간접 체험을 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게 문학의 힘이다. 모든 것이 허무한 사람도 허무하다는 글을 쓰는 이유는 허무 속에 숨겨진 진실이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이 글쓰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시 잠에 들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미약하지만 죽음을 경험했으니. 전기포트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이미 포근해진다. 카페인 없는 루이보스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뜨거운 김이 희미하게 올라온다. 존재가 사라지듯이.  

  죽음을 터부시 할 일이 아니다.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 대부분은 죽음을 품고 있다. 글 속 죽음에 관한 서술은 삶이 죽음을 품고 있듯 죽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한 발버둥의 기록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죽지만, 실제 삶에서는 죽지 않았다. 삶이면서 죽음인, 죽음이면서 삶인, 동시에 존재하면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이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삶의 향연 속에서 죽을 때까지 헤매는 것, 이 과정의 기록이 죽음과 함께하는  글쓰기다.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안 된다.

  낮게 중얼거리지만 밤의 속삭임은 더 강렬하다.


   

  차갑고 선명한 밤이다.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읽다가 카프카의 <선고>가 떠오르면서, 나는 이제 더 이상 잠을 잘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렇게 밤을 새울 것이고, 이렇게 떠오른 생각을 자판에 두드릴 것이고, 이렇게 다시 커피가 필요한 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잠을 자지 않으면 찾아오는 두려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다. 아주 작은 진실을 맛본 것 같은 착각에 흥분한다. 물론, 진실은 없다. 다만, 그렇다고 느끼는 겨울밤이 찾아왔고, 나는 그 겨울밤을 껴안을 것이다. 절대로 비켜가고 싶지 않다. 아니, 비켜갈 수 없다. 아주 작은 단위의 삶이 찾아왔고, 어제가 죽고 오늘이 시작된다.

 미약하지만, 하루를 죽이면서 예술 작품 속 죽음을 살핀다. 덮어놓고 벗어나는 것이 아닌 들춰놓고 바둑처럼 이미 이뤄놓은 예술가의 기보를 살피면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한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무수한 경우의 수가 펼쳐진다.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매번 실패하더라도. 아니, 실패가 분명하더라도.

  참지 못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응답처럼 초겨울 새벽이 성큼 방으로 들어온다.  하루가 이미 죽었다.

 

이전 02화 영하 1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