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산책
1.
밤새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샤워를 하는데 온몸이 쑤신다. 엉덩이와 팔뚝을 누군가에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고, 찌릿찌릿한 통증이 물줄기를 따라 아래로 흘러내린다. 코가 막혀 정신마저 몽롱하다. 뜨거운 물줄기 아래에서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뿌연 김이 바닥에서부터 솟구쳤다. 화장실을 꽉 채운 김 속에 있으니 내가 마치 사라지는 느낌이다. 내 몸뚱이는 멀쩡하니 무엇이 사라지는 것인지 모르면서 사라진다라고 느끼는 건지. 삶이 이미 시작되었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처음부터 다시? 연속된 삶보다는 기적이 필요하다는 것일까? 항상 과한 욕심을 부린다. 김이 서려 내가 보이지 않는 거울을 보면서 새벽안개처럼 흐릿하게 슬펐다.
무엇을 찾고 있니?
어제는 하루종일 침대에 누워있었다. 이상하게 쉬는 날에 아프다. 일하는 날에는 약간의 전조 증상이 있다가 쉬는 날부터 본격적으로 아프다. 아마도 긴장이 풀어져서 인 것도 같은데, 일해야 한다는 강박이 이렇게 강한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살짝 고달파졌다.
몸을 깨끗이 닦고 옷을 입었다. 씻기 전에 내려놓은 적당히 식은 커피를 마셨다. 커피에 꿀을 듬뿍 타서 그런지 달달한 초콜릿 같기도 했다. 집에만 있으면 오히려 병이 더 날 것 같아 딱히 갈 곳이 없는데도 무작정 나왔다. 목적지가 없으니 오히려 갈 곳이 너무 많았다. 도서관에 갈까? 천변을 거닐까? 번화가에서 사람들을 구경할까? 산책을 하다가 아무 커피숍에 들어가서 뜨거운 라테를 마실까?
걷는데 발걸음이 무겁고 발목에 힘이 없어서인지 신발이 질기다는 느낌이 든다. 가끔 기침이 나온다. 어젯밤보다 심하지는 않다. 텀블러에 담아 온 꿀물을 걷다가 멈춰서 중간중간 홀짝였다. 겨울이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날씨는 가을이다. 핸드폰으로 확인해 보니 영상 13도다. 정말 가을이네. 살짝 온기를 머금은 공기는 몽글몽글하게 느껴진다.
이야, 잘 나왔군.
나도 모르게 먹보처럼 공기를 한입 크게 베어 먹었다. 갑자기 중력이 달라진 듯한 느낌은 공기가 따뜻한 것보다는 아무래도 내 기분이 좋아졌다는 신호겠지. 무거웠던 머리도 가볍게 느껴졌다. 그래, 밤새 머릿속에서 켜켜이 쌓인 단어들이 하늘로 붕붕 떠다니는 상상을 했다. 저절로. 그 단어들이 다시 내려앉을 때는 다른 문장으로 쌓였으면 좋겠다.
하지만, 세상에 저절로는 없겠지. 저절로 뭔가가 됐다면, 아마도 그건 자연 순환의 한 고리와 내가 잠깐 맞았기 때문일 것이다. 저절로는 오직 자연법칙에만 적용된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만들어내는 것은 저절로 이뤄지는 법칙을 반하거나 억지로 역행해서 만들어내는 것이 대부분일 것이다. 그것을 발명, 또는 문명이라고 하겠지.
자 팔아보자. 이제 그 모든 문명도 팔리지 않으면 의미가 없어졌다.
그래서 많은 예술가는 팔지 못하는 작품을 만든다. 그래서 나는 사건으로 기록되는 예술, 실물 작품은 없어 팔지 못하는 사건으로 존재하는 작품을 만드는 작가를 존경한다. 그 작품은 특정 사람이 높은 가격으로 소유할 수 없기에 이미 딱딱하게 구조화되고 고착화된 거대한 자본 틀을 비집고 나온 송곳이 된다. 작은 구멍은, 결국 하나의 길이 되고, 그 길을 여러 사람이 간다면 그건 또 하나의 진실이 된다.
저 멀리서 누군가 걸어온다. 나는 그 사람과 지나칠 것이다. 이 단순한 사건이 예술이 되려면 그 사람은 나의 전 연인이어야 할 것이다. 행위예술 작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는 자신의 연인과 만리장성 양쪽 끝에서 서로 출발해서 3개월간 걸어 만리장성 중간에서 만나 뜨거운 포옹을 나눈 후 각자의 길을 간다. 두려운 이별 사건이 하나의 예술이 되었다. 의도되어 만들어진 이 상황의 파장은 후에 다른 예술의 파장이 된다. 헤어진 연인은 마리나 아브라모비치가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예술가가 여기 있다>이란 이름으로 포퍼먼스를 할 때 만난다. 22년 동안 떨어져 다른 삶을 살았던 인생과 인생이 만나는 순간, 이 또한 하나의 예술 사건으로 기록된다.
누구도 이 사건을 소유할 수 없다. 이 사건은 이 사건을 아는 모든 사람들의 것이 된다.
크건 작건 사건은 사건을 불러온다. 잊히는 사건일수록 존립하기 위해 더 많은 사건을 부른다. 너무 많기에 오히려 사소한, 그 사소함의 연결이 인생이 되고, 그 연결선이 개개인의 존재론이 된다. 저 멀리서 걸어오는 사람이 예전에 내가 알던 짝사랑 친구이고 우연히 길목에서 만났다면, 그것이 하나의 사건이 되고, 그 사건이 기록된다면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다. 이것이야 말로 저절로이고, 그것을 기록하려는 의지와 노력이 예술이 된다. 내 옆을 지나친다. 모르는 사람이다. 하지만 나는 그 사람에게서 남몰래 묘한 감동을 받는다. 지나치는 여자의 걸음걸이가 단정하고 아름답다. 과거의 누군가를 불러온다. 이 사소한 사건은 오직 내 것이고, 이 사건의 기록이 사소함을 넘어 파장을 일으킨다면 이 사건은 독자의 것이 될 것이다.
2.
여전히 마음은 소란스럽고, 억울하게도 이런 소란은 어떤 합의도 없이 들이닥친다. 방황하지 않는 시기가 없다지만, 이제 와서 아동기를 벗어난 사춘기 소년처럼 심장이 두근거리는 이유는 뭘까? 허공을 손을 뻗었다. 손이 그림자와 함께 두텁게 보였다. 여전히 손이 꽉 쥐어지지 않았지만, 힘을 내서 쥐어봤다. 잡으면 사라지는 것들. 나는 항상 그런 것들이 무서우면서 그립다. 그래서 잡았다고 착각하는 것들에게 외면받기 전에 겁쟁이처럼 먼저 벗어나려고 발버둥 치고, 다시 사무치게 잡기를 바란다. 나이가 든다고 해서 이 소란은 멈추지 않는다.
소란의 뜻은 시끄럽고 어수선함이지만, 왠지 어감이 시끄럽다는 단어보다 부드럽게 느껴져 소란이란 단어를 내 안의 소음을 표현할 때 자주 쓴다. 아마도 내 안의 소음을 스스로 조심하려는 의지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 이상 날카로워지지 않기를 바라면서 다독이는.
실제로 내가 나를 다그쳐 상처 낸 적이 있는데, 그 상처는 상처가 아니라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았다. 상처라기보다는 성장통, 이렇게 멋진 단어로 바꿔서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삼았던 것이다. 상처를 극복하다니!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생각인지 나중에 깨달았다.
이제야 밝히지만, 이 글은 접속사에 관한 이야기이다. 내 안의 소란을 잠재우는 단어는 명사도 형용사도 아니다. 접속사다.
마음에 소란이 일어나면 끝말잇기처럼 말꼬리를 잡아 계속 이어 나간다. 그래서 어쨌다고, 그래서 더 중요한 것은 뭐지? 그리고 다음 순서는? 이렇게 접속사를 붙여 끝없이 이어지게 만든다. 접속사는 연결이다. 논리 영역에 속해 있기에 두서없는 소란에 논리를 부여하고 새로운 것과 탄탄한 접속을 도와준다. 읽고 있던 책과 접속하고, 보던 영화와 접속하고, 가만히 누워서 바라보는 창밖 풍경과도 접속한다. 문득 떠오른 과거와 접속하기도 한다.
처음에는 더욱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하지만 뒤죽박죽인 소란을 계속 이으면 시끄러움은 다소 평온해진다. 소란소란이 도란도란이 될 때까지 계속 연결하다 보면 소란은 대화가 된다.
물론 다시 시끄럽게 변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하지만 그 시끄러움은 내면 깊숙이 파고드는 날카로움이 어느새 밖으로 향해 있다. 이 모든 과정을 누군가는 성장통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내 경험으로 비춰보면 그렇게 퉁 치면서 명사로 가둬버리는 행위는 오히려 성장통을 방해했던 것 같다. 나는 얼마나 슬기롭게 성장통을 지내왔을까? 과연 상처를 극복하고 성장했을까? 오히려 상처가 낫지 않았는데 없는 척, 또는 가리면서 나를 보호하기 위한 아집과 고집만 늘어났을까? 상처가 생겼다면 치료해야 한다. 성장을 위해서가 아니다. 아픈 곳을 치료하기 위해서다. 성장은 상처의 메아리와 접속해 얻는 행운 같은 것일 뿐이다.
접속사는 단어와 단어, 문장과 문장을 이어준다. 상황과 상황도 연결한다. 멀리 있는 것과 가까운 것을 연결한다. 상관없는 것들끼리 연결하기도 한다. 자꾸 들춰내고 덧나게 하는 짓 같지만, 들춰내지 않고 치료하는 방법을 나는 모른다. 연결하기 위해서는 들춰야 한다.
터벅터벅 걷다가 공중전화기를 발견했다. 누가 이 전화기를 쓸까 싶기도 하지만, 작년 여름쯤에 오래된 파란색 전화박스를 철거하고 빨간색 전화박스로 교체되었다. 잘 쓰지 않지만 여전히 필요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쪽이 뭉클해진다. 며칠 전에도 밤늦게 퇴근할 때 환자복을 입고 공중전화기를 쓰는 남자를 봤다. 스쳐 지났기에 통화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남자는 행복한 표정으로 연신 고개를 끄떡이고 있었다.
공중전화를 보자 남자가 떠올랐고 나도 모르게 행복한 표정을 따라 지었다. 아침까지 이어진 소란이 조금 잠잠해진다.
접속사는 상황과 상황을 이어준다. 나도 행복한 표정으로 전화를 하고 싶었던 것일까. 며칠 동안 흐르는 시간 속에 혼자 갇혀 있었다. 접속사가 가장 빛날 때는 연결된 대상이 빛날 때이다. 나도 소란의 벽을 뚫고 그런 대상과 연결되고 싶었나 보다. 접속사의 최종 목표는 접속하는 대상, 바로 당신이다.
그래서 전화기를 들었다. 가방 깊숙이 버려졌던 동전이 다 떨어질 때까지 전하를 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걸었다.
목적지가 없을 때는 이상하게 자주 앉고 싶어 진다. 지나가다 벤치만 있으면 앉는다. 벤치에 앉아 동네 놀이터의 헐벗은 나무를 봤다. 그 많은 낙엽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예전에 낙엽 태우는 냄새가 갓 볶은 코오피 냄새와 비슷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는데, 아마도 이호석 님 수필에서였던 것 같다. 낙엽과 커피도 아니고 코오피와 연결한 그 부분이 너무 좋아서 기억하고 있다. 아, 커피가 아니라 코오피가 먹고 싶다.
예전에는 가정집 마당이나 학교 운동장에서도 낙엽을 태웠다. 지금은 그런 모습을 보기 힘들다. 그래서 궁금하다. 그 많은 낙엽은 어디로 갔을까? 포장된 아스팔트 밑으로 스밀 수도 없을 텐데. 모두 쓰레기장으로?
인간은 자주, 아니 너무 많이 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 같다. 계속 끊어내는 고리는 결국 인간과 인간의 고리도 끊는다. 하지만 자연은 인간이 끊은 고리를 다시 연결하려고 할 것이고, 그러려면 고리를 끊는 인간이 사라져야 할 것이다. 어쩌면 당연한 것인지도. 한편으로는 무서우면서 지겹다는 생각이 든다. 인간이 너무.
다시 일어나 천천히 걸었다. 큰길에서 작은 길로 들어갔다. 작은 카페를 발견했다. 이곳으로 자주 오지 않아서 이런 커피숍이 있는지 몰랐다. 들어가 라테를 먹으려다 코오피에 어울리는 커피를 마시고 싶어 아메리카노를 테이크아웃으로 주문했다. 원두가 갈리고, 커피 머신이 돌아가는 소리가 들린다. 드르륵, 착착착, 우우웅, 치치직. 잘 계산된 정연한 동작에서 나는 소리. 소리만 들어도 코오피는 맛있을 것만 같다.
커피 나왔습니다.
내가 자주 하는 말인데, 같은 말이지만 다르게 표현된다. 검은색 체크 셔츠를 입은 남자 사장님은 나보다 목소리 톤이 더 높다. 감사합니다. 하고 커피를 받았다. 나도 덩달아 톤이 높아졌다. 카프카에 온 손님도 내 목소리 톤에 전염이 될까? 이런 작은 연결은 뜬금없지만, 개인 삶의 역사를 만들어낸다. 나는 이곳에 또 올 것 같다. 그래, ㄸ과 ㅗ가 만나서 연결된 글자는 설레는 단어다. 또 보고 싶다. 또 만나고 싶다. 또, 그렇게 또. 현재와 앞으로 있을 미래를 연결하는 글자. 나는 그렇게 항상 누군가와 '또'를 실현한다.
햇볕은 걸어가는 내 등을 계속 덥혀 따뜻하다. 생각해 보니 카페에 들어갈 때부터 기침을 하지 않았다. 시간은 오후고 해를 등지고 걸으니 동쪽으로 걷는 걸까? 햇볕이 나를 더 멀리, 더 오래 걸으라고 떠미는 것 같다.
길가에서 천변으로 내려왔다. 갈대숲 사이에 벤치가 있어 앉았다. 나무 의자는 이미 햇볕에 데워져 있었다. 뜨거운 코오피를 마셨다. 코오피는 커피보다 더 고소했다. 갈대밭이 햇빛에 반짝이고, 아주 작은 바람에도 설레듯 흔들린다. 뭔가를 부른 것 같기도 하고, 나긋나긋 속삭이는 것도 같다. 나는 가방에서 시집을 꺼냈지만 그대로 덮어두고 갈대의 흔들림을 오랫동안 봤다. 태양빛 아래에서 춤추는 모든 것은 아무리 오래 봐도 질리지 않는다. 햇빛이 닿는 곳에서부터 펼쳐지는 명징한 환함. 모든 것이 적절히 까발려지고, 적절히 숨겨진, 그것 자체로 아름다운.
나는 언제쯤 흔들리지 않게 될까? 이런 고민이 참 부질없다는 생각이 든다. 나도 태양 아래 있는 무엇에 지나지 않던가. 뿌리가 깊다면, 아니 깊을 필요도 없다. 깊은 것은 생각이 깊거나 사상이 깊은 것이 아닌 식물의 종류에 따라 뿌리박는 깊이가 다르듯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내가 깊지 않다면 내가 속한 인간이란 종류가 깊지 않은 것이다. 인간의 한계 안에서 우리는 서로 누가 깊고 얇은지를 저울질할 뿐이다.
흔들리지 않는다면 인간이 아니겠지. 다만, 햇빛과 바람과 갈대가 하나가 되어 아름답듯이 나의 흔들림도 아름다울 수 있을까? 갑자기 기침이 터져 나온다. 어떤 아름다움도 비극을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다. 비극이 지워졌다면 그건 희망 아니라 오히려 낙망이다. 기침을 누르고 눈을 꼭 감았다. 보이지 않아도 안다. 가려진 어둠 속에서도 갈대는 흔들릴 때마다 반짝인다.
나는 고개를 위로 젖혀 감은 눈으로 해를 본다. 눈동자 위를 덮은 얇은 눈꺼풀이 붉게 변하고, 쏟아진 햇빛이 내 얼굴에 하나의 틈도 없이 착 달라붙는다. 순환의 고리 속에서 나는 따스하다. 나와 연결된 것들은 나와 함께 빛이 날까? 겨울 햇빛 아래서 나는 사소하게 흔들린다.
공중전화 소화기 속에서 두두, 오래전에 들었던 그 전화벨 소리가 울리고,
안녕. 나야.
어, 안녕.
인사를 했다. 순간 세상이 모두 접속사로 보였다. 전화를 끊는 행위마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