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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Dec 24. 2023

영하 12도

단절

   아침저녁으로 출퇴근할 때 눈이 시리고 추위로부터 숨으려는 듯 노출된 피부가 땅긴다. 서점에 출근해 온풍기를 켜면 피부가 수축했다가 팽창해서인지 가렵다. 이제야 기다리던 추운 겨울이 왔는데, 간사하게 추우면 봄이 오기를 바란다. 겨울 속에는 봄이 올 미래를 품고 있다. 미래는 미래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품 안에서만 미래라는 뜻이 가능하다. 미래를 잉태하는 건 현재다. 아, 겨울이 있어야만 봄이 있는 것이다. 겨울을 좋아한다는 건 겨울 안에 숨어있는 봄도 함께 좋아한다는 뜻이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딱딱한 피부가 순간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따뜻함과 부드러움. 이 둘은 참 좋은 조합이다. 어제오늘 기온이 급강하했다. 그제까지만 해도 영상 10도를 웃돌았는데, 이제는 영하 10도 안팎이다. 서점에 가만히 앉아 있으면 발가락이 시리다. 온풍기로 공기 온도는 상승했지만 무릎 아래는 여전히 차갑다. 그래서 자주 발가락을 꼼지락거린다.

  사람들이 추위를 피해 서점에 들어온다. 나도 그들도 서점 의자에 앉아 책을 읽고 커피를 마시지만, 모두 발가락을 꼼지락거릴 거라는 걸 안다. 꼼지락. 꼼지락. 이 단어가 삶의 한 형태 같다. 그렇게 삶이 잠시도 쉬지 않고 뭔가를 귀엽게 한다는 느낌이다. 꼼지락과 앞으로 올 봄은 좋은 조합니다. 꼼지락이 왠지 봄을 불러올 것 같다.  

  벌써 커피를 세잔 째 마시고 있다. 누군가 서점 구석에서 커피를 홀짝이는 나를 봤다면 우울해 보였을 것이다. 꼭 강추위와 눈이 와서가 아니라, 서서히 떨어지는 온도처럼 며칠 동안 내 마음의 온도가 내려가 꽁꽁 얼어버렸다. 그리고 터진 것이다. 마치 수도관이 얼어 터진 것처럼.  

  팽창.

  개구리가 자신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이기 위해 팽창하는 것처럼. 내 존재가 가치 있다고 말하고 싶어 내가 가진 것보다 팽창하다 보니 터진 것이다. 마침 터진 날이 오늘이고, 이런 날은 과거에도 반복되었다. 한 겨울이 아니더라도 여름 장마 때도, 선선한 가을 새벽에도. 글을 쓰다 보면 그렇다. 글쓰기는 나를 응축해서 팽창하듯 토해내는 일인데, 다 토 내놓은 글을 읽으면 부끄러움에 몸서리를 친다. 툭, 하고 그동안 나를 감쌌던 합리화가 터진다.


  그런데, 그렇게 헤매다 보면 방향을 찾는다. 결국 그렇다. 지금까지 방향을 찾지 못한 적이 없다. 한 시간이든, 하루든, 일 년이든 어느 순간 흔들리다 멈추고, 멈춘 곳에 정착하고 정착한 곳이 결국 내가 찾던 곳이다. 아니라면 다시 떠나면 그만이다. 이런 반복이 방향을 만들어 낸다. 나에게 방향은 일직선이 아니라 헤매는 과정을 전제한 결과값이다. 그것이 가리키는 화살표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여기에 있다. 그리고 이곳이 잘 찾은 방향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아니 확실하다. 확실하지 않다는 것은 의심일 뿐이다. 내가 지금 있는 곳이 항상 결론이다. 내가 선택해서 찾은 방향의 결론이 지금이다. 그걸 인정하지 못해서 나는 방황하는 척한다. 한마디로 내가 매번 선택해서 만들어진 ‘나’가 이런 허접한 인간일 리가 없어,라고 부정하기 위해서 말이다. 지금 내가 결론인데, 아직 결론이 안 난 것처럼 행동한다. 그래야 위안이 되니까.

  삶이 힘들다고 투정 부리려는 것은 아니다. 내가 만든 세계가 너무 허술해서였다. 내가 쓴 글이 그 누구도 설득하지 못할 거라는 허무로 아침부터 축 쳐진 것이다. 그러니까, 일 년 가까이 쓴 글을 삭제한 날이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이런 날은 예전에도 있었고, 그날은 또다시 반복된다. 하지만 나는 그 반복이 쌓인다는 것을 알고, 쌓여서 결국은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뭔가가 만들어진다는 것을 안다.

  그날부터 나는 단절을 쌓는 연습을 시작한 듯하다. 대학교를 다닐 때의 일이다. 막 잡에서 깬 듯한 부스스한 얼굴로 y는 말했다.

  단절!

  마치 구호처럼 외쳤다. 장난스럽지만 결연하게. 소리는 작았지만 말할 때의 몸짓은 축구장에서 응원하는 사람 같았다. 내가 이것저것 쓸데없이 고민할 때면 수도로 나무토막을 내리쳐 두 동강 내듯이 허공에 대고 선을 그으며, 단절, 외쳤다. 그만 고민하라는 뜻이었다.  

  고민하고 있던 나는 y가 야속했다. 공감해주지 않고 그만 징징거리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야, 다 지웠다고. 이거야 말로 단절이야.  

  y는 다시 외쳤다. 그건 단절이 아니야.

  후에 y의 행동이 도움이 많이 됐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인정할 수밖에 없다.

  단절.

  단절이 있어야 단절 전과 후, 또는 단절들의 덩어리의 차이를 발견할 수 있고 새로운 차이를 만들어 낼 수 있다. 고민을 없는 것처럼 치우고 덮어버리는 것이 아니라 단절을 통해서 고민의 진정한 이유를 드러내게 한다. 내가 하는 고민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기보다 문제를 풀지 못한 알리바이를 쌓기 위해서인 경우가 많았다.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게 아니라 이미 난 결론을 수용하지 못해서 생긴 고민이었다.

  오늘은 내가 따라 외쳤다. 손까지 허공에 허우적거려 봤다. 단절!  

  그래서 이렇게 정의했으면 한다.

  방황한다는 뜻은, 결론이 없다는 게 아니라 결론 이후의 삶을 위해 열정을 다해 갈팡질팡하는 것이라고. 먼저 결론을 내려야 한다. 그리고 또 다른 결론을 내리기 위해 다시 출발. 그 반복의 열정. 그 사이사이에는 확실한 단절이 필요하다. 그렇다고 연결성을 삭제해 버리는 라는 말이 아니라, 단절한 후에 그 발판으로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차곡차곡.


  단절은 예술에도 적용된다. 예술은 권력 장치로부터 단절을 끝없이 시도한다. 대부분 실패로 끝난다. 그럼에도 우리는 단절을 외치고 저항한다. 하지만 단절을 외치면서 제도권에 안주한다. 제도권 안에서 단절을 외치는 척, 또는 저항한다고 착각한다. 예술가를 흉내 내는 예술가가 된다.

 하지만 절대적 단절이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절대적 도망도 존재할 수 없다. 지금 서 있는 곳에서 단절을 외치는 순간 단절이 이뤄진다. 착각도 결론을 내면서 해야 한다. 내 위치를 알아야 한다. 그다음에 단절을 이루지 못한다고 해도 말이다. 그것이 방향이 되고, 하나의 경향을 만들어내고, 그것이 작가의 세계관을 만들고, 작품에 적용된 예술관을 만든다.

  완전한 단절보다는 단절 이후의 방향이 중요하다. 아주 작은 단절로 이뤄진 하나의 결과값과 화살표. 뾰족한 그곳이 가리키는 방향. 그러니 단절은 지금 내 방향에 대한 진단이다.

 

  어제, 내 삶은 결론이 났다. 퍽 만족스럽지 않지만, 어제의 나를 향해 손바닥을 펼쳐 과감하게 내리친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스로 만족하든 안 하든 상관없다. 결론은 내가 내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지나온 과거에 의해 내려지는 것이고 나는 그것을 수긍하느냐 하지 않느냐의 차이만 있다.

  작은 결론이 모여서(작은 것들이 모인다고 하니 뭔가 귀엽다), 이렇게도 표현할 수 있겠다, 작은 단절이 모여서 인생이 된다, 피아노 건반 한 음이 치고 난 후에 다른 음이 이어진다. 그렇게 나는 음표들이 모여서 교향곡이 된다. 이왕이면 운명 고향곡이었으면 좋겠다.    

  서점 불을 끄고 밖으로 나왔다. 퇴근이다. 바람이 불고, 슬픈 뼈 같은 나뭇가지가 차가운 허공을 긁고 있다. 하얀 입김으로 손을 녹인다. 손 안에서 입김이 구름처럼 둥글게 말렸다가 사라진다. 인도의 눈이 살짝 녹았다 얼어 얼음이 되었다. 밟을 때마다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사각사각, 그리고 발가락의 꼼지락, 꼼지락. 차가운 거리를 씩씩하게 걷는다. 집에 도착하면 노트북을 켜고 다시 써야지. 단절 속에는 항상 다음 단절을 품고 있고, 그 단절은 완성이 되었든 실패를 했든 하나의 작품을 품고 있다.

  추운 겨울에도, 이불속에 쏙 들어가 앉아 글 쓰는 고독은 생각보다 뜨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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