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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Jan 14. 2024

영상 5도

사탕

1.

   마감 시간이 가까워 카운터에 힘없이 서 있었는데, 책을 구매하고 가시던 손님이 뒤돌아 와 나에게 사탕을 내밀었다. 요즘 힘이 없다. 머릿속에 커다란 돌을 하나 넣고 다니는 것 같아 몸을 살짝만 기울여도 무게 중심이 확 쏠린다. 나도 모르게 휘청한다. 어쩌면 약간 슬프기도 하다. 손님은 힘없이 축 져진 내가 안쓰러워 보여 그랬을 수도 있고, 그냥 가지고 있던 사탕을 전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사탕을 건네준 마음이 어땠는지는 알 수 없다. 중요한 것은 내 손 위에 사탕이 올려졌고, 뜻밖의 연결이 이뤄졌다.

   감싸고 있는 비닐을 뜯고 영롱한 푸른색 사탕을 입안에 넣었다. 오묘한 맛이었다. 과일맛이라기보다, 푸른 맛, 또는 바다 색깔 맛? 아니 지중해 바닷가에서 부는 해풍의 맛? 약간 입안이 화해지는 맛이었다. 이 맛을 어떻게 정의해야 할지 모르겠다. 물감이라고 해야 할까? 뭔가 자연 그대로 맛이 아닌 화가가 조합해 만들어낸 맛 같았다. 그래도 달콤하고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었다. 입안이 상쾌해지면서 나도 모르게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자 입안 더 화하게 변했다.

  화하게? 목캔디와 비슷하지만, 그것보다는 조금 덜 화했다.

  그런데 화하다는 표현이 맞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다른 표현을 찾을 수 없었다. 입안에서 사탕을 요리조리 굴렸다. 사탕이 침으로 녹아 목구멍으로 흘러들어 갔다. 고맙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탕을 준 사람은 그냥 건넨걸 수도 있지만, 나에게는 뭔가 알 수 없는 귀한 기분을 선물해 준 것이다.

  기분은 내가 느낀 것이지만, 상대에 따라 달라지니 사실 내 것이 아닐 수도 있다. 상대가 나에게 주는 기분은 때로는 선물일 수도 있고, 나에게 쓰레기처럼 투척한 것일 수도 있다. 물론 내가 안 받으면 그만이지만, 그게 쉽지 않다. 선물인지 쓰레기인지는 받고 나서 알게 된다. 마치 습격 같다. 때로는 테러 같다. 그렇게 오늘은 사탕으로 기분 좋은 습격을 당했고, 나는 그 기분에 하루 마감이 행복해졌다.


  사탕?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라는 작가가 떠올랐다. 작가는 전시관 한쪽에 사탕을 잔뜩 쌓아놓았다. 1991년에 <무제>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작품이다. 사탕은 자신의 연인인 로스의 몸무게만큼 쌓여있다. 175파운드다. 175파운드는 연인 로스가 에이즈에 걸리기 전 건강했을 때의 몸무게이다.

  전시관 관람객 누구든 그 사탕을 가져갈 수 있다. 어떤 마음으로 가져갈까? 그리고 작가는 그 사탕이 사라지는 과정을 통해 어떤 메시지를 주고 싶었던 것일까? 사랑의 소멸? 죽음? 에이즈로 죽어갈 때 로스의 몸무게는 점점 빠졌다. 175파운드에서 사탕이 점점 줄어드는 건 작가의 입장에서 보면 소멸과 사라짐이겠지만, 관람객 입장에서 보면 그만큼 자신의 손에 쥐어진 사탕일 뿐이다. 하지만 누군가는 의문을 표할 것이고, 사탕의 의미를 자신만의 경험과 결합해 생각할 것이다.

  관람객은 모두 다르게 그 사탕을 생각할 것이다. 작품 배경을 아는 관람객은 로스의 죽음 한 조각을 가져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작가가 연인 로스를 향한 작가의 사랑을 사탕으로 쌓아놓았다고 생각했다면 그 사랑의 한 줌을 나눠 받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쌓아놓은 것을 가져간다는 것은 직접 손을 뻗어서 가져가는 의지가 동반된다. 아무 생각 없이 가져갈 수도 있지만, 아무 생각 없이 가져가는 그 행동도 그냥 이뤄지지 않는다. 사탕을 먹고 싶어서 일 수도 있고, 미술관에 온 기념으로 가져간 것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상호작용이다. 그냥 가져갔다고 해도 로스의 무게는 줄어든다. 사탕이 사라지는 과정은 로스의 죽음 과정이다. 하지만 로스의 몸무게는 누군가 가져간 사탕이다. 그 사탕을 입안에 넣고 먹는다면 로스의 몸무게는 누군가에게 전해진 것이다. 그것도 달콤하게.


  작가는 사탕이 다 없어질 때쯤 다시 175파운드를 채워놓는다. 나는 작가의 마음을 추측해 본다. 작가는 죽은 로스를 다시 살릴 수 없다는 것을 안다. 누군가는 작가가 예술품으로 로스를 다시 살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과연 작가는 로스를 살렸다고 생각할까? 오히려 그 반대로 상실의 반복을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사탕이 사라지고 채워 넣는 행위는 매일 매 순간 반복되는 상실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사랑과 상실은 동의어일 수도 있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실이 있고, 상실은 사랑하는 대상에게만 적용되는 감정이다. 관심이 없는 것은 잃어버리면 잃어버렸는지도 모른다. 혹여 안다고 해도 다른 것으로 쉽게 대체된다. 대체될  수 없기에 상실을 만들어내고, 대체될 수 없는 대상은 대부분 사랑의 대상이다. 상실의 표현이 사랑의 표현인 이유다. 동전의 양면인 것이다.

 

  다시 말하면 사랑과 상실은 동의어다. 작가는 슬프면서 기뻤을 것이다. 사탕을 채우는 과정과 사라지는 모든 과정이 상실과 사랑의 반복이다.  그리고 그 과정을 오로지 자신만이 감당하는 것이 아닌 관객과 함께한다. 이 이 관계가 전시관 한쪽면에 쌓아놓은 사탕더미가 작품이 될 수 있는 이유다. 관객이 참여하지 않는다면 하나의 사탕더미에 불과하지만 그 사탕을 관람객이 가져가는 순간 작품은 완성으로 치닫는다. 사탕 하나, 또 하나, 사탕이 천천히 사라지는 과정 그 자체가 작품에 의미를 더한다. 그러니까 관람객이 의미를 더하는 것이고, 상실의 감정을 더 짖게 만든다. 관람객은 작가의 사탕을 입안에 넣고 녹여 먹으면서 작가의 생각을 공유하지 않더라도, 달콤함을 느끼는 그 경험만으로도 충분하다. 자신의 상실이 누군가에게 달콤함을 주는 것이야말로 작품은 완성인 것이다.

  그리고 나의 경험을 완성한다.  어느 날 알지 못하는 사람이 준 사탕을 먹으며 달콤함과 상실을 생각하는 경험 자체가 작가의 작품이다. 이미 1996년에 죽은 펠릭스 곤잘레스토레스와 연결되는 순간이다. 그리고 작가의 연인 로스와 연결되는 순간이다.

  작가는 이 순간을 창조해 냈다.


  서점에 손님이 없다. 이제 곧 문을 닫을 시간이다. 서점을 서성이면서 입안에서 사탕을 이리저리 굴린다. 그리고 내가 잃어버린 상실에 대해 생각한다. 더불어 내가 사랑했던 대상, 사랑했던 순간을 생각한다. 사탕이 다 녹는 동안 사랑의 상실을, 사물의 상실을, 기쁨과 슬픔의 상실을 생각한다. 아, 나는 너무 많은 것을 잊어버리고 살았구나! 상실을 상실해 왔다. 내가 사랑했던, 그리고 나를 사랑했던 그 많은 순간을.



2.

 펠릭스 곤살레스 토레스 작품 중에서 가장 좋아하는 작품은  하얀 침구가 있는 침대 사진이다. 머리로 눌린 움푹 페인 두 개의 베개가 나란히 있는 사진! 토레스와 연인 로스가 누워있던 흔적이다. 누군가는 눌려있는 베개와 구겨진 이불을 보며 비어있는 상실감과 공허함을 느낀다고 말한다.

 나는 이 사진을 보면 상실과 공허보다는 함께 있었던 순간을 상상한다. 코레스와 로스가 인간의 몸무게, 중력의 법칙에 함께 적용받던 시기의 사진이다. 즉 살아있었다는 증거다.

 단순히 함께 얼굴을 찍은 사진보다 이 사진이 더 울림이 있는 이유가 있다. 벗어날 수 없는 법칙에 적용받은 사진이다. 서로 다르지만 함께 적용받는 법칙. 이 법칙에서 떠난다는 것은 곧 죽음이다. 그러니 법칙 아래 있다는 것은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에 함께 적용되었다는 뜻이다. 그것도 나란히. 침대 위에서.

 심장이 쿵쾅거린다. 그토록 함께 중력의 법칙 아래 있고 싶었던 사람이 떠올랐다. 지금 내 심장이 쿵쾅거리는 것도 살아있는 인간이라면 모두에게 적용되는 법칙이다. 그런데 나만 심장이 뛰고 있다.

 당신과 함께 있는 순간에 심전도를 체크했다면, 그리고 그 심전도를 나란히 전시한다면, 나는 당신과 함께 살아있었다는 순간을 포착한 것이고, 증거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내 심장만이 뛴다.

 나는 내 오른손으로 심장에 가져다 댄다. 빠르게 뛴다. 숨이 가쁘다. 아픈 건지, 슬픈 건지 알 수 없다. 다만, 나만 뛰고 있다는 이 상황이 견딜 수가 없다. 그렇다고 내 심장을 멈추게 할 수도 없다. 내 심장이 멈춘다고 당신과  똑같은 법칙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다. 그걸 알 수 없다. 알 길이 없다.

 'her'라는 영화가 있다. 영화 마지막에 남자는 여자가 있는 인터넷 공간으로 간다. 남자는 여자와 같은 법칙 안에 있고 싶은 것이다. 같은 공간에 있고 싶은 것이다. 나는 남자가 인터넷 공간으로 들어간 사회적, 또는 미래적 의미를 파악하고 싶지 않다. 이건 기술적이 문제가 아니다. 고전적인 사랑 문제다. 남자는 여자와 함께 있고 싶은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할 수 있고, 함께 있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기에 단행한 것이다.

 토레스는 죽음으로 인해 연인 로스와 함께 할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면 바로 따라갔을까? 그것도 나란히 함께? 토레스의 작품은 그런 예측의 영역이 아니기에, 예측은 사실 불필요하다. 오히려 침대 사진은 이제 같은 법칙 아래 살 수 없는 연인의 위한 추모의 사진이기도 하고, 함께 같은 법칙 아래 있었다는 증거의 사진이 된다.  된다.  

 베개가 눌려있다. 그것도 나란히. 내 심장은 여전히 뛴다. 내 심장만 뛴다. 하지만 과거 심장이 포개져서 함께 뛴 적이 있다. 그때 함께 심장이 뛰었던 심전도 사진이 있다면, 침대맡 벽에 그 사진을 걸어놓았을까? 아니다.

  입 안에서 달콤한 사탕이 녹아 사라졌다. 나는 어느 날 다시 입 안에 사탕을 넣을 것이다. 항상은 아니겠지만, 사탕이 녹는 동안 문득 상실과 사랑을 생각할 것이다. 사탕을 다시 채워놓는 이유는 상실을 반복하기 위해서다.  사랑을 잊지 않기 위한 몸부림이다. 내가 잊었던 것을 다시 채우는 과정이다.


 하지만, 잊는다. 잊힌다. 그래서 우리에게 예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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