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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물 Nov 26. 2023

0도

죽음을 이기는 글쓰기

  잠들기 전부터 바람 소리가 요란했다. 바람이 거대한 벽에 막혀 울부짖는 듯했지만, 곧 막은 것을 휘감는 소리로 변했다. 바람이 지나가는 구멍이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것 같았다. 촘촘히 모인 네모난 건물들이 하모니카처럼 내는 소리일지도. 건물 속 인간들의 작은 속삭임이 바람소리와 함께 증폭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높은음, 낮은음, 그렇게 삶의 속삭임은 결국 화음을 만들어낸다. 누군가의 외침과 비명을 잡아먹으면서.

  화음이 아름다우면서 무섭다.

  태풍이 지나가도 잠에서 깨지 않았는데, 요즘 예민해 조그마한 소리에도 눈을 번쩍 뜨인다. 바람 소리 말고도 다른 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것을 구분할 만큼 깊게 잠들지 못했다. 잠에서 깬 김에 화장실을 들렸다 차가운 물을 마셨다. 그 순간, 짧게 쨍한 명징함이 찾아온다. 그래, 내가 쓰려고 했던 글이 이런 것이었지. 아 맞아 그 소설가는 이런 말을 하려고 했을 거야. 거실의 베란다 창문으로 치고 들어온 바람에 나는 잠깐 붕 뜬 듯이 허공에서 내가 찾아낸 의미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렸다.

  간밤에 토마스 만이 쓴 <베네치아에서 죽다>를 읽었다. 아름다움 때문에 죽다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 이해할 수 없었다. 그토록 찾던 아름다움을 발견했다는 환희보다 죽음조차 두렵지 않는 파괴성이 더 강렬했다. 잔인한 부름 같은 걸까? 자신도 모르게 어떤 균열에 빠진 걸까?

   아, 다리가 살짝 풀려 거실 의자에 가만히 앉았다. 나무 의자는 딱딱하고 차갑다. 엉덩이에서부터 등허리를 타고 올라와 머리끝까지 깨끗하게 춥다.


  죽음이 다가오고 있지만 매혹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그만큼 매혹이 강렬하다는 증거겠지만 나는 이해할 수 없다. 아직 그런 매혹을 만난 적이 없기 때문이겠지.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각오하는 여러 매혹을 만난다. 그것이 애국심일 수도 있고, 종교적 신념, 또는 집착일 수도 있고, 사랑에 빠진 여린 청년일 수도 있다. 합리적인 이성을 마비시키는 일이 일어난다. 하지만 이성도 분명 어떤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적으로 용인된 합리성이 아닐 뿐이지, 매혹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이성은 크게 작동한다. 우리가 이성적으로 전쟁을 하는 것처럼.

  매혹과 이성은 절대로 반대가 아니다. 이렇게 나눌 수도 있겠다. 매혹을 탐하는 이성은 사회적으로 쉽게 용인되지 않은 이성일뿐이라고. 그럼에도 나름의 정연한 논리가 있다. 그것이 어쩌면 한 예술가의 예술론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광기는 예술이란 이름으로 표현되고, 예술적 승화의 대상이 된다. 기존의 질서에서 벗어나려는 에너지로 새로운 예술적 세계를 만들어 내는 것이다. 이렇게도 부를 수 있겠다. 자신만의 완벽한 미를 찾아가는 광기 같은 이성이라고.

  다시 몸을 이끌고 침대에 쏙 들어간다. 허벅지 사이에 차가운 손을 끼워 넣고 비빈다. 순간 명징했던 생각이 조금씩 말랑말랑하게 덥혀진다. 침대 위에 올려진 책을 펼쳤다.




  ‘형식은 두 얼굴을 지니고 있지 않을까? 형식은 도덕적이면서 부도덕한 것이 아닐까? 자기 훈육의 결과와 표현으로서의 형식은 도덕적이다. 그러나 형식은 원래부터 도덕적 냉담함을 내포하고 있으므로, 그 본성 탓에 자신의 오만하고도 무제한적 지배 아래 도덕을 굴복시키고자 애쓰는 형식이라면 비도덕적일 뿐만 아니라 반도덕적이기까지 한 것은 아닐까?’


 주인공 구스타프 아센바흐는 후기에 훈육의 결과와 표현으로서의 작품을 만든다. ‘전통적 문체, 보존적 문체, 형식적 문체, 심지어 상투적 문체로까지 변해갔다.’ 형식의 두 얼굴 중에서 도적적인 면이 승리한 것이다. 그런데 아센바흐는 베네치아에서 한 아름다운 소년을 본다. 그 순간 형식의 비도덕한 면이 불쑥 얼굴을 들이민다.

  이 소설은 고착된 형식의 다른 면, 반도덕적인 면이 찾아온 순간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반도덕적이라고 표현되었지만, 나쁜 짓을 한다는 것이 아니라 기존 질서에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는 뜻으로 쓰였다. 질서에 순응하는 행동을 못했다는 뜻으로 쓰인 것이기도 하다. 그렇게 주인공은 죽음의 위기에 처했어도 매혹에 빠져 도망가지 못한다. 그 광기가 느닷없이 늙은 주인공에서 나온 것이 아니다. 젊었을 때 품었던, 그리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던 도전이 다시 튀어나온 것이다. 나이가 들면서 다듬어졌다고 믿지만, 사실 잃어버린 것일 수도 있다. 바로 그 면이 튀어나온 것이고, 주인공은 그것을 다시 잡으려고 한다. 하지만 쉽게 잡히지 않는다. 잡으려고 손을 뻗지만, 죽음이 먼저 그를 잡는다.

  <베네치아에서 죽다> 소설은 주인공의 마지막 예술혼 기록이다. 주인공이 잡고 싶었던 신기루 같았던 완벽한 이상, 그 실체, 현현의 소년이 바로 앞에 있다. 그는 도망칠 수 없다. 이 순간을 위해서 그의 삶이 존재했다. 소설가 토마스만은 바로 그 순간을 소설로 형상화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그런 순간이 오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그런 순간은 오지 않을 것이다. 작가는 죽음을 경험할 수 없기에 죽음에 대해 쓴다. 스스로 그 순간을 창조하고, 스스로 체험한다. 보이지 않던 것을 보이게 하거나, 숨겨져 있던 것을 드러나게 하는 게 문학의 힘이다. 모든 것이 허무한 사람도 허무하다는 글을 쓰는 이유는 허무 속에 숨겨진 개인적인 진실이 있고 그것을 드러내는 방법이 글쓰기라고 믿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다시 잠에 들기는 힘들 것 같다. 그래도 괜찮다. 미약하지만 죽음을 경험했으니. 전기포트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는 소리에 이미 포근해진다. 카페인 없는 루이보스 티백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죽음을 터부시 할 일이 아니다. 내 침대 머리맡에 놓인 책 대부분은 죽음을 품고 있다. 글 속 죽음에 관한 서술은 삶이 죽음을 품고 있듯 죽기 위해서라기보다 살기 위한 발버둥의 기록이다. 토마스 만은 자신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이 죽지만, 실제 삶에서는 죽지 않았다. 삶이면서 죽음인, 죽음이면서 삶인, 동시에 존재하면서 함께 존재할 수 없는 상황. 이 불일치가 만들어내는 삶의 향연 속에서 죽을 때까지 헤매는 것, 이 과정의 기록이 죽음을 이기는 글쓰기다.

  글쓰기를 멈출 수 없다. 멈춰서는 안 된다.

  낮게 중얼거리지만 밤의 속삭임은 더 강렬하다.

  

   

  차갑고 선명한 밤이다. 밤은 낮과 다른 균형을 가지고 있다. 밤의 균형 속에서 어제가 죽고 오늘이 시작된다. 그렇게 예술 작품 속 죽음을 딛고 삶의 예술이 시작된다. 덮어놓고 벗어나는 것이 아닌 들춰놓고 바둑처럼 이미 이뤄놓은 예술가의 기보를 살피면서 새로운 출구를 모색한다. 나를 구원하기 위한 무수한 경우의 수가 펼쳐진다. 나는 어떤 것과도 닮지 않을 것이다. 나는 스스로 나를 구원하기를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참지 못하고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응답처럼 초겨울 밤이 성큼 방으로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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