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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Oct 24. 2021

3. 동의와 재청

 어릴 적, 우리 동네에는 동의와 재청이란 요상한 놀이가 유행했다. 이를 처음으로 알려 준 사람은 학교 담임 선생이었다. 대여섯 명, 많게는 열 명씩 무리를 지어 돌아다니던 우리 전체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꼭 필요하다며 가르쳐 주었던 것이다. 이에 대해 간략한 설명을 하자면 다음과 같다. 쉬는 시간 혹은 점심 시간에 무엇을 하면 좋을지에 대해 무리 중 하나가 추천을 하면 가장 먼저 손을 들고 '동의합니다!'라고 외치는 사람이 1등이 되는 놀이였다.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우리들은 앞다투어 '재청합니다!'라고 외쳐야만 했는데, 그것이 2등이었다. 선생은 재청할 때에는 반드시 다 함께 손을 번쩍 들어 소리치라고 알려주었는데, 그게 바로 씩씩함과 평등의 상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은 사내다운 의사결정에 따라 쉽게 단합할 수 있었다. 우리들은 생애 첫 민주주의를 그렇게 배웠다.

 "딴말 하기 없기다." 담임 선생은 이 말을 입버릇처럼 달고 다녔다.

 이것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토요일 오전 마지막 수업이었던 학급회의 때였다. 담임은 우리 모두에게 회의라는 것의 절차에 대해 설명을 해주었다. 워낙 오래된 일이라 불분명한 점들이 많음에도 핵심 하나만은 확실하게 기억난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요지였다. 그러하니 동의와 재청을 통해 주장에 힘을 실어줘야만 하는 게 민주주의의 미덕이자 소극적 의미에서의 참다운 우정이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와 같은 '일치'를 통해 만사를 조금 더 수월하게, 분쟁없이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은 우리 모두에게 굉장히 매력적으로 들렸다. 쉽게 말하자면, 한 주의 마지막 수업인 토요일 4교시는 우리의 합일이 얼마나 수월하고 빠르게 이루어지느냐에 따라 끝이 정해진다는 말이었다. 민주주의란 우리에게 있어 평소보다 빨리 하교할 수 있을 가능성이었다. 그리하여 우리들의 학급 회의는 엄숙한 분위기 속 모두의 참여를 통해 간결한 절차로 시작되고 끝이 났다.

 절차는 이와 같았다. 담임이 칠판 상단, 우리로서는 손이 닿지도 않을 곳에 그날의 주제를 써 넣는다. 회의를 진행하는 반장의 진행에 따라 국민의례를, 그러니까 자리에서 일어나 국기에 대한 경례, 애국가 제창을 하고 자리에 앉는다.

 "자, 그럼 오늘의 안건은 이와 같습니다. 의견을 제시해 주십시오." 반장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교실은 침묵에 잠긴다. 따지고 보면 우리는 동의와 재청에 대해서만 배웠던 것이다. 하지만 우리들 중 누구도 이 고요를 불안해하지 않았다. 의견을 내는 것은 담임의 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할은 그저 그가 무언가를 말해 주길 기다리는 것, 그리고 있는 힘껏 소리쳐 동의와 재청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는 민주주의가 아닌 것도, 맞는 것도 아니었다.

 시간이 지날 수록 이 동의와 재청은 점점 더 격화되어 놀이 이상의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동의합니다!'라고 외치는 아이가 느낄 수 있는 의기양양함의 정도도 더욱 커져갔고, 담임은 그 아이에게 보상을 해 주기에 이르렀다. 파란색 팔찌를 하나 주어 그 다음 주 회의 시간이 올 때까지의 한 주 동안 차고 다닐 권리를 허락했던 것이다. 그 팔찌는 정말로 많은 것을 상징했다. 시기와 질투 이상의 존경심마저 불러일으켰던 것이다. 실제로, '동의합니다!' 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와 큰 목소리를 가진 아이는 별로 없었다. 나머지 아이들은 그저 '재청합니다!'라고 외칠 때에야 자신이 낼 수 있는 가장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그 말에 진정한 의미에서의 동의가 있기는 했던 걸까. 언젠가부터 나는 그 말을 외치는 나 자신에게서 알 수 없는 분노의 응어리만 발견했다. 나는 지금도 가끔씩 그 분노의 함성에 대해 떠올리곤 한다. 가장 순진한 상태에서 내보일 수 있는 가장 난폭한 목소리를. 그리고 이것은 다양한 형태로 나타난다. 나는 비슷한 감정을 어머니와 함께 갔던 교회 예배에서 느낀 적이 있었다.

 무언가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음을 느낀 건 몇 달이 지나서였다. 그때는 이미 우리의 생활 전반에 이 동의와 재청이 깊숙하게 들어와 있었다. 나 역시 이 놀이를 연습한답시고 어머니나 아버지가 하는 말에 번쩍 손을 들어 동의한다며 외친 적이 몇 번 있었다. 하지만 모두와 함께 있을 때는 늘 꿀 먹은 벙어리가 되곤 했다. 내겐 용기가 없었다. 그리고 나와 비슷한 처지에 놓인 녀석들의 불만이 조금씩 커져가고 있었다. 그걸 가장 먼저 알아챈 건 아이러니하게도 담임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방식을 조금 바꾸었다. 그때부터는 한 주에 한 명씩 돌아가며 동의를 할 자격이 부여됐다. 아마도 담임은 그것을 가장 공평하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미 학급은 그의 왕국이 되어있었다. 변화를 사리에 맞게 판단할 능력이 부족했던 우리들은 그게 더 좋은 건지 아닌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분명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면 다시 불만을 가진 아이들이 생겨날 것임을 담임은 이미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방법을 조금 바꾸는 것으로 손쉽게 자신만의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리고 분명 그렇게 되었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그는 그 쉬운 일을 성공하는 데에도 실패했다.

 우리에게 정의감 같은 건 전혀 없었다. 그가 그 회의를 체벌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에도 우리는 내가 아니면 누구라도 크게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만일 그 개인적 감정에 따른 부당한 체벌 역시 조금 다른 식으로 주었다면 아이들은 너나할 것 없이 그것을 당하고자 했을 터이다. 예를 들자면 새로운 팔찌를 만들어 주는 것 같은 보상을 추가하는 것이다. 하지만 담임은 영악했을 뿐 냉정하거나 치밀하지 못했다. 그래서 아이들은 그의 청소 당번 지목에 슬슬 불만을 품기 시작했다. 

 J라는 아이에 대해서 그는 혐오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유일하게 한부모 가정에서 지내던 아이였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참으로 해맑아 늘 시시댔다. 담임은 언제부턴가 자신의 혐오에 중독되어 매주 토요일 회의 시간이 되면 마지막으로 청소 당번을 지목할 때 J의 이름만 불렀다.

 "J가 청소를 해 주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니?" 그는 동의를 할 차례가 된 아이를 지목해 물었다. 질문을 받은 아이는 있는 힘껏 소리쳐 '동의합니다!'라고 외친다. 나머지 아이들은 이에 질세라 목청을 돋운다.

 "재청합니다!" 그렇게 J는 몇 주 동안 연속으로 청소를 하게 되었다. 하지만 J는 그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는 일이 없었다.

 문제는 우리들 중 누군가의 제기로 시작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는데, 흥미를 잃어버린 것이었다. 더 재미있는 일이 분명 있으리라는 희망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섰다. 아이들은 J를 찾아가 물었다.

 "억울하지도 않아? 이런 건 분명히 따져야 하는 일이야." J는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우리는 모두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심각한 표정이 되어 어떻게든 이 부당함과 맞서 싸워야만 한다는 데에 의견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담임이 하는 말에 절대 동의와 재청을 하지 않는 거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우리는 깔깔대며 웃었다.

 그리고 다음 번 학급 회의가 시작되었고, 국민의례를 거친 뒤 모두 자리에 앉아 평소와 같은 절차를 밟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엔 아이들의 눈빛이 평소보다 더욱 번득대고 있었다. 이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있던 담임은 언제나 그랬듯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안건을 제출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동의를 하지 않고 침묵만을 지키자 그는 당황한 표정으로 우리를 쳐다보았다. 그러다 담임은 다시 한 번, 조금 더 힘을 주어 말했다. 여전히 침묵 뿐인 아이들의 반응에 그는 조금 놀랐다. 그러다 느닷없이 누군가 입을 열었다.

 "동의합니다......" 자신 없는 목소리가 들려온 쪽을 향해 아이들 모두가 노려보기 시작했다. J가 고개를 숙인 채 손을 번쩍 들고 있었다. 담임은 여전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그때 우리들 중 한 사람이 커다란 목소리로 외쳤다.

 "우리 이제 이 동의와 재청 놀이는 그만 하는 게 어떨까?"

 교실이 떠나갈 듯 아이들 모두가 소리를 질렀다.

 "동의합니다! 재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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