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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Oct 24. 2021

4. 보험

 어머니가 내게 항상 했던 말 중 하나는 바로 '안정적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늘 '살아 보니 별 거 없다'라는 말과 함께였다. 그래서 당신은 인생의 최고 가치에 언제나 근검절약을 두곤 했다. 벌이를 조절하기는 어려운 일이니 소비를 줄여야만 한다, 씀씀이가 적어지면 그게 바로 더 버는 것이라는 말을 들으며 자라왔다. 나는 좀처럼 싫은 소리를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어머니 말마따나 감정의 총량도 결국은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매한가지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마음을 아끼면 결국 더 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는 도무지 풀리지 않는 의문이 하나 있었는데, 그렇게 아끼고 또 아끼면서 살고 있음에도 왜 여유라는 건 도무지 생기지 않는가에 대한 것이었다. 모으고 또 모으다 보면 쌓여야 마땅할 터인데 어머니는 늘 죽는 소리만 했다. 

 그 밖에 대해서는 어머니가 내게 요구하거나 기대하는 바는 거의 없었다. 담배를 끊을 것, 되도록 술은 적게 마실 것, 교회에 다닐 것, 마지막으론 미래에 대비할 것 따위가 전부였다. 나열하고 보니 결국 앞선 네 가지는 어머니에게 있어 마지막 항목으로 요약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니 어머니가 내게 바라는 건 단 하나 뿐인 것이다. 어머니는 종종 자신을 두고 '세상에서 불행을 가장 잘 아는 사람'이라고 말했다. 그러한 만큼, 나는 어머니에게 또 하나의 불행을 추가해 주고 싶지 않았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뒤로 어머니는 부쩍 더 늙어져 그토록 당연하게 여기던 김장마저 거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던 와중, 나는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게 되었는데 그게 어머니에게 적잖은 충격을 준 모양이었다. 어머니는 내게 이유를 물었는데, 나는 제대로 대답할 수가 없었다. 

 이튿날 아침 식사 때 어머니는 내게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보험회사 직원이었다.

 "잘 아는 사람이니 잘 챙겨 줄 거다." 어머니는 내가 대학 입학 시험을 보러 갈 때와 비슷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상담 예약은 10시였고, 나는 조금 일찍 사무실에 도착했다. 영업을 나간 모양인지 한산한 내부 끄트머리에 앉아있던 안경 쓴 남자는 나를 보고는 활짝 웃으며 악수를 건넸다. 그는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키 작고 다부진 체격이었는데, 머리의 숱이 굉장히 풍성했다. 설운도 마냥 단정하게 빗어 넘긴 검은 머리 덕분에 실제 나이보다 젊어 보이는 인상을 주는 것 같았다. 사무실 한쪽 구석에 놓인 갈색 가죽의 접객용 소파에 자리를 안내해준 뒤 따뜻한 커피를 한 잔 가져다 주었다. 

 "자, 이야기는 이미 잘 들었습니다." 낮고 기름진 목소리가 듣기에 조금 역겨웠다.

 "무엇을 말입니까?" 나의 물음에 그는 커다란 턱이 옆으로 벌어지게 씩 웃어 보였다. 돈을 잘 벌 것 같은 펠리컨 관상이었는데, 새하얀 치아는 모두 틀니처럼 부자연스럽게 보였다. 

 "권사님께서 걱정이 참 많으시더군요. 저 역시 아들놈이 하나 있는데 도통 앞날에 대한 걱정이라고는 하지 않는 본새를 보면 어찌나 걱정이 되는지......"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하는 것인지 아니면 힐난하는 것인지 구별이 잘 안 되었다. 하소연은 분명 아니었다. 그는 허리를 조금 낮추어 내게 조금 다가와 말했다.

 "그건, 자연스러운 겁니다." 내가 고개를 갸우뚱해 보이자 그는, 원래 젊을 때는 걱정이라는 게 없는 법이고, 그리하여 부모는 더욱 자식을 걱정하게 마련이라고 대답했다.

 "자식들은 모두 부모가 영원할 거라고 생각하게 마련이랍니다. 자연스러운 겁니다." 그런 것들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 말을 하는 그의 말투 하나만은 분명 자연스럽지 않게 들렸다. 순간 나는 어머니가 나를 이곳에 보낸 이유가 자신의 생명보험을 가입하기 위한 것인지 헷갈렸다.

 "권사님은 보험에 들 필요가 없는 분이지요. 우리는 모두 하나님이라는 보험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 가지고 계십니다. 아드님 때문이라고 하더군요.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헌데 그건 모두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그의 기름진 목소리 때문이기도 했지만, 그의 향수에서 지독하게 풍기는 사향 냄새 때문에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는 잠시 머뭇거리는 것 같더니 곧 모든 게 다 자연스러운 일이라며, 신성에 대한 모독이 될 수도 있겠지만 마치 하나님이 독생자 예수님을 하늘에 내려준 것과 같은 이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서,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은......" 조심스레 질문을 꺼내자 그는 나의 말을 끊고 대답했다.

 "아, 그렇죠! 내 정신이 이렇답니다. 그도 그럴 게 권사님 아드님이라면 저에게도 가족 같은 분이니 말입니다. 자연스러운 이야기들은 잠시 미뤄두고... 자,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그는 책상에서 서류 다발을 가지고 왔다. 그것은 총 두 부의 계약 서류였는데 하나는 내게 내밀었다. 우리 두 사람 사이의 탁자 위에는 명함과 인주, 자그마한 나무 상자가 있었는데, 그는 그 상자를 열어 안경을 꺼내어 쓰고서는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기분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때부터 그의 목소리가 조금 달라졌다. 예의 그 쩔쩔 매는 듯한 억지스러움은 사라지고 사무적인 말투로 내게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일단은 나이가 조금 많습니다. 그게 첫 번째 문제군요." 이 말은 나를 조금 놀라게 했다. 적진 않아도 나이가 많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거니와, 그게 어째서 문제가 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보험회사 입장에서 보자면 그건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20대에 비해 40대는 아무래도 병에 걸릴 위험이 더욱 높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나는 살면서 병원에 간 적이 별로 없었다. 그 얘기를 꺼내자 이 펠리컨은 다소 흥분한 말투로, 그래서 더욱 위험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사람은 보통 작은 통증 같은 건 쉽게 무시해 버리고는 하죠. 문제가 있다는 것을 몸으로 느낄 만큼의 고통이 없다면 자신은 건강하다고 확신해 버리고 마는 겁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욱 위험한 건 없습니다. 하나님은 계획한 대로 인간을 불완전하게 만들었다는 건 누구나 다 아는 자연스러운 사실입니다." 나는 그가 왜 나를 이토록 밀어붙이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언젠가부터 그는 나를 고객이라 부르고 있었다.

 "저희는 고객님과의 계약을 위해 어머니의 동의를 얻어 건강보험기록을 좀 찾아보았습니다. F코드의 진료기록이 있더군요." 이 부분에서 그는 안경을 벗고 나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F코드가 뭐죠?" 그는 정신과 질병코드라고 대답했다.

 "정신과 진료 기록은 계약에 있어 최악의 상황과도 같습니다. 그러니 몇 가지 질문에 성실한 답변을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는 나를 심문하고 있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정신과 진료를 받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 그것은 엄밀히 따지면 내 기록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항변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면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야만 했던 것이다.

 그는 가장 먼저, 내가 과연 자살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 알고 싶어했다. 그때 나는 굉장히 당황했는데, 그가 도대체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그의 일이 그와 같은 무례함을 강요한다고 생각하니 안타까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나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건 전부 어릴 때의 일이고, 철부지 시절엔 누구나 다 한 번쯤은 인생에 아무런 가치가 없으니 사는 것 보다는 죽는 게 낫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건 결국 믿을 구석이 없기 때문인 것입니다. 자신이 세상을 이해한다고 믿는 순진한 사람들은 그래서 그와 같은 오만한 생각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실제로 인간은 수천 년 전에 비해 나아진 것이 전혀 없습니다. 기술은 조금 나아졌을지 모르겠지만, 확신은 더욱 적어졌습니다." 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기술 이야기를 한 적도, 확신에 대해 말을 한 적도 없었던 것이다. 나에게 확신이 있다면, 그건 내 앞의 펠리컨이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의미, 가치라는 게 왜 생기는 것인지 알고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십시오. 육신의 통증과 정신의 고통만이 가득한 삶이라는 게 왜 살아볼 만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걸까요? 단순한 쾌락 때문일까요? 그렇다면 그 쉬운 쾌락마저 제대로 즐기지 못하는 사람들은 모두 바보라서 삶을 살아가는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대답해 보시죠. 제가 듣기로는 아드님께서는 마땅히 즐길 거리도 없이 조용히, 그리고 묵묵히 생활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내일, 그리고 또 내일은 결국 죽음일 텐데 허무하지 않다는 말입니까?" 그는 마치 나를 위해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말했다. 여기서 나는 마음이 조금 움직였다.

 사실이 그랬다. 내게는 목적도, 쾌락도 전혀 없었다. 그가 말한 관점에서 보자면 나는 그저 바보라서 삶을 살아가고 있을 뿐이었다. 인생이라는 것이 살아볼 만한 것인지 아닌지에 대해 나는 단 한 번도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건 단순히 내가 지금까지는 다행히 한 번도 아프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나는 재미없는 삶을 살고 있었다.

 "그래서 바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늘 겪어보지 않은 일에 대해서 함부로 이야기를 합니다. '죽으면 그만이지'라는 말도 서슴잖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헌데, 과연 그 사람들은 자신이 정말로 죽는다는 것을 믿고 또 알고 있는 채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요?" 나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는 두통을 앓는 사람처럼 엄지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누르고 있었다.

 "내가 내일 죽을 것임을 잘 알고 있음에도 이 하루를 아름답게 살아갈 수 있기 위해서는 확신이 필요합니다. 죽음은 결코 끝이 아니라는 것을 믿는 용기, 그것을 얻어야만 합니다. 행복, 행복, 행복. 시대는 우리에게 행복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물어보며 쾌락을 좇도록 만듭니다. 거기에 언제나 기술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행복하고 싶어합니다. 누구나 다 행복을 원합니다. 행복하고 싶지 않습니까?" 나 역시 행복하고 싶다고 대답했다. 하지만 방법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는 나를 비난하듯 소리쳤다.

 "그걸 어찌 모를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당신을 위해 늘 기도하는 어머님을 그리도 외면할 수가 있습니까? 당신의 인생은 혼자만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도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지만 세상에서 제일 불행해 보이는 사람은 나의 어머니였다. 그는 그것에 대해 낮은 목소리로 최대한 또박또박 말했다. 그게 바로 행복한 고통이라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은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고통이라는 것이 곧 희망이자 행복이 될 수 있음을, 그리고 확신이라는 것이 있는 자에게는 죽음 따위는 더 이상 두려운 것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어머니의 사랑을 실천하고 계시는 권사님께서는 그것을 그리하여......" 그때 희망의 한줄기 빛과 같은 전화벨이 울렸다. 그렇지 않았다면 나의 얼굴은 그의 침으로 범벅이 될 뻔했다. 그는 양해를 구하고는 책상으로 돌아가 전화를 받았다. 예의 그 낮고 기름진 목소리가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화장실을 가기 위해 사무실을 나왔다. 하지만 건물 내부의 모든 화장실은 문이 다 잠겨있었다. 그래서 그냥 집으로 갔다.

 돌아와보니 갈비찜 냄새가 가득했다. 거실 식탁엔 어머니가 가득 차려 둔 점심 식사가 모락모락 김을 내뿜고 있었다. 귀찮았기 때문에 나는 화장실에 가는 대신 개수대에서 손을 씻고 나서 식탁에 앉아 밥을 먹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어머니가 내게 잘 다녀왔냐고 물었을 때 그렇다고 대답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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