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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음 Oct 24. 2021

6. 물 주는 남자들

 칠십 줄에 들어서면서 어머니는 무슨 일을 하든 쉽게 지쳐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어머니가 하던 집안일을 하나 둘 도맡아 하기 시작했는데, 첫번째는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이었다. 그러나 수십 년 동안이나 정성스레 키워온 삼십여 개의 화분에 물을 주는 일은 생각보다 녹록치 않았다. 나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화분에 관심을 줘 본 일이 없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가장 먼저, 대문 옆으로 늘어선 화분들에 각각 식물 이름과 물을 줄 시기 등을 적은 푯말을 달아주었다. 그것으로 인해 일이 좀 쉬워지겠거니 싶었지만 오산이었다. 그것들은 지침이었지 공식은 아니었던 것이다. '마르면 흠뻑, 마르기 전에 조금씩, 완전히 마른 뒤 흠뻑, 이파리에만 분무' 같은 말들은 나에게 있어 지나칠 정도로 추상적이었다. 나는 식물을 죽일 각오를 해야만 했다.

 처음으로 죽은 건 올리브 나무였다. 물을 너무 많이 준 모양이었다. 이파리 끝이 노란빛을 띄기 시작할 때 나는 반대로 물이 부족한 모양이라며 계속해 물을 주었던 것인데 그로 인해 식물을 익사시키고 말았다. 그것은 올리브 나무가 보내는 고통의 신호였던 것을 나는 알지 못했다. 이 가련한 식물의 사망선고를 내리던 날 어머니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말했다.

 "천 년을 산다는 나무도 쉽게 죽을 수 있는 게 생이란다. 개의치 말거라." 그때 어머니가 머금고 있던 옅은 미소가 내겐 무척 씁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쨌든 이때까지만 해도 우리 둘 다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수 있었다. 

 그리고 머잖아 나는 유칼립투스를 죽이고 말았다. 어머니가 십 년 넘게 애지중지 키워오던 나무였다. 지난 번과 마찬가지로 물을 너무 많이 준 것이 화근이었다. 어머니는 그 광경에 잠시 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때부터 나는 화분에 물을 주는 게 두려워졌다. 하지만 그만두겠다는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그저, 앞으로는 물을 지금의 반 정도만 줘도 충분할 것 같다고, 이제 경험을 했으니 더 이상 화분을 죽이지 않게 될 것이라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하지만 그 말은 어머니의 희망사항이었을 뿐 그 뒤로도 식물들은 계속 죽어나갔다. 아마도 여섯 번째 식물이 죽었을 즈음부터였던 것 같다. 어머니는 더 이상 내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러다 내가 그 일에 점점 익숙해지고, 죽는 식물들이 더 이상 생겨나지 않자 어머니는 이제 전지하는 법을 알려주고자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여느 때처럼 출근 전 화분에 물을 주고 있던 나는 옆집과 앞집의 남자들도 나와 마찬가지 일을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앞집 남자는 자신의 주택에 붙어있는 화단에, 다른 쪽은 나와 같이 대문 옆에 늘어놓은 화분들에 물을 주고 있었다. 내가 이날 처음으로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때, 그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우리는 한동안 멀뚱히 서로를 쳐다보기만 했다. 나는 언제부터 그들이 거기에 있었던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의 존재가 나에게 각인된 탓인지 이튿날부터는 계속해 눈에 들어왔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우리는 거의 같은 시간에 나와 각자의 식물들에 물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거기엔 같은 동네의 주민 다운 정다운 인사라거나 친목의 대화 따위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우리는 모두 서로의 시선과 맞닥뜨리지 않으려, 각자의 시야에 다른 둘을 두지 않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그러던 도중에도 나는 그들이 모두 이 일에 익숙하지 않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들의 식물들도 계속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몇 달 전부터 도무지 꽃을 피우지 않던 란타나가 결국 죽고 말았다. 헌데 그 나무로 말하자면 어머니가 자기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던 것이었다. 심지어 그 나무가 꽃을 피우지 못하고 점차 시들어가는 모습을 자신의 운명과 동일시하며 시름시름 앓아가던 어머니였다.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란타나가 완전히 죽어버렸음을 고백할 만한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그렇게 된다면 금방이라도 어머니가 쓰러져 죽어버리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당연한 얘기겠지만 이 죽음의 책임은 전적으로 나에게 있었다. 나에게는 별다른 도리가 없었다. 죽어버린 란타나 화분을 출근길에 들고 나가 공원에 묻어버렸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 어머니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대문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하자마자 반쯤은 정신이 나간 말투로 어머니는 내가 란타나를 치웠느냐고 물었다. 영문을 도무지 모르겠다는 반응을 보이자 가엾은 나의 어머니는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엉엉 울기 시작했다. 세상에 어떤 불한당이 있어 남의 자식 같은 화분을 훔쳐가느냐며, 신고 있던 신발을 들고 땅에 내리치며 통곡했다. 나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지만 어머니는 그 화분을 옆집 남자가 훔쳐간 것이라고 확신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다음날 아침, 란타나가 있던 우리 집 쪽 벽이 아니라 옆집 대문 앞에 이와 같은 엄포를 큼지막하게 쓴 종이를 붙여두기에 이르렀다. 


 '화분을 훔쳐간 사람은 그것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을지 모르겠으나 잃어버린 나로서는 그 상실감을 이루 헤아릴 수가 없다. 돌려준들 자신의 죄과는 해결되지 않더라도 나의 고통은 해결될 수 있다. 이것은 양심에의 호소가 아니라 도의에 따른 명령이다.'


 뿐만 아니었다. 어머니는 내가 화분을 돌보는 시간에 다른 두 집의 남자들 역시 같은 일을 한다는 사실을 어찌 알았는지 대문 밖으로 나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분명 저 옆집 놈이 그런 게 분명해. 화단을 가진 사람이 그런 짓을 할 리가 없거든." 진노한 어머니를 보며 나의 얼굴은 붉어졌다. 하지만 아무것도 듣지 못했다는 듯이 두 남자는 계속해 자신들의 작업을 이어나갔다. 아마 옆집 남자 또한 얼굴을 붉히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을 보지 않기 위해 애를 써야만 했다. 그때 내가 부끄러워하던 건 과연 무엇이었을까.

 출근을 하고 나서도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어떻게 해야 좋을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공원에 묻어버린 란타나를 다시 가져온다고 한들 뭔가 달라질 것 같지 않았다. 오히려 상황이 더욱 악화될 수도 있다는 데 생각이 미치자 나는 새로운 란타나를 사 오는 방안에 대해 검토하게 되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수소문을 해 최대한 비슷한 것으로 골라 가지고 온들 어머니에게는 가짜일 것이 분명했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그토록 공을 들인 나무라면 어쩌면 가지의 개수까지 헤아리고 있을 지경인지도 몰랐다. 돌아온 란타나가 진품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린 어머니의 반응을 상상하는 일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게다가 속임수를 두 번이나 쓰고 싶지 않았기에 나는 이 안에 대해서는 곧 폐기했다. 그러고 나니 내게 남는 건 시간이 다 해결해 줄라는 무책임한 희망 뿐이었다.

 하지만 사태는 날로 심각해져 갔다. 어머니는 아침이 되면 아예 대문 앞에 자리를 깔고 앉아 동네사람들이 다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다.

 "도둑놈이 사는 동네라니, 도둑놈이 사는 동네라니! 부모 얼굴에 똥물을 한 바가지 끼얹어도 모자를 놈!" 하지만 나는 결코 어머니의 얼굴에 똥물을 끼얹을 각오로 그러지 않았음을 도무지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하여 옆집 남자에게, 부당하게 욕을 먹게 되어 미안하지만 당신은 참는 것 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는 말을 했다간 도둑놈이 아니라 살인자가 사는 동네가 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나의 심적 고통은 끝을 모른 채 점점 더 커져만 갔다.

 나는 진지하게 고민을 해 보기 시작했다. 이 사건이 만일 종결을 맞이할 수 있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형태여야 하는 것인가. 가장 완벽하고 평화로운 해결은 란타나가 다시 돌아오는 것이었다. 거기에 날조된 사죄 편지 한 장(물론 옆집 남자와는 전혀 관계가 없는 제3자인 것 같은 뉘앙스가 있어야만 했다)을 꽂아두는 것이다. 하지만 란타나가 무슨 나사로도 아니고 죽었다 살아날 수는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기적이라는 게 있어 그 식물이 살아난다 한들, 거기다 홀로 걸을 수 있을 발과 다리까지 달아준들 자신을 묻어버린 내가 사는 집으로 돌아올 리는 없었다. 거기다 나 역시 예수가 아니었다.

 두 번째로는 어머니가 그 일을 잊고(혹은 딛고) 예전처럼 지내길 기다리는 것이었다. 여기에는 굉장한 인내심이 필요했는데 따지고 보면 그건 나 자신에게만 해당이 되는 것이었고, 실제로 어머니가 받는 고통이 자신의 건강을 해치기라도 한다면 시간은 아무것도 해결해 줄 수 없어 보였다. 몸져누운 어머니를 짓누를 육신의 고통이 마음의 그것을 잊게 만드는 것은 상쇄가 아니라 최악에 가까웠다. 내가 그 일을 어머니 대신 할 수밖에 없었던 주된 이유를 상기하고 나니 뱃속이 시큰했다. 어떻게든 나의 어머니를 지켜내야만 했다. 허나 그러자면 란타나가 나사로가 되든 내가 예수가 되든 아니면 둘 다이든 뭔가 기적이 일어나야만 했다. 그러다 그만 나는 란타나가 집으로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는 어처구니 없는 희망에 사로잡히기 시작했다. 다행히 내가 아직 미치지 않았기 때문에 그 기도는 금세 끝이 났다.

 그러던 와중, 언제부턴가 옆집 남자가 모습을 드러내지 않기 시작했다. 근 몇 달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화분에 물을 주던 그가 더이상 나오지 않자 나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 역시 별로 오래가지 않을 수 있던 것은 어머니 역시 분노의 대상이 사라지자 더 이상 아침의 소동을 벌이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동네는 다시금 이전의 평화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문제는 내 마음에 있었다. 나는 이를 도무지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여전히 매일 아침 화단에 물을 주는 앞집 남자 역시 그랬던 모양인지 언젠가부터 힐끔힐끔 나의 눈치를 보는 것이 느껴졌다. 나의 주목을 끌어보려는 요량의 커다란 헛기침을 두어 번씩 하는 앞집 남자에게 시선을 주지 않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며칠 뒤, 그는 멋쩍게 다가와 내게 물었다.

 "그건 그렇고, 그 사람이 정말로 화분을 훔쳐간 걸까요?" 나는 도망치듯 집으로 들어왔다.

 그때부터 나는 퇴근 후에 물을 주기 시작했다. 나의 화분들에, 그리고 옆집 벽을 따라 놓인 그의 화분들에. 오랫동안 물을 주지 않은 터에 버썩 마른 식물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아팠다. 그렇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어머니는 이제 란타나의 존재를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였다. 나 역시 조만간 그렇게 될 것이 분명했다. 모든 건 이제 시간문제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십년 만에 연락이 닿은 친구를 만나 술을 한 잔 걸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골목의 어렴풋한 가로등 불빛 사이로 누군가 나의 화분들 사이에서 수상한 행동을 하고 있었다. 나는 잠자코 숨어 그 행동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사이, 가로등 불빛에 비친 그 사람의 옆얼굴을 통해 나는 그가 옆집 남자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하지만 그 늦은 밤, 나의 화분들 사이에서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가 없었다. 머잖아 그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도 나는 조금 더 상황을 살펴보았다. 술에 취한 탓으로 머릿속이 더욱 복잡했다. 심지어 나는 그 란타나를 훔쳐간 사람이 옆집 남자가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하고 있었다.

 대문 앞으로 왔을 때 나는 란타나 화분이 다른 것들과 함께 가지런히 놓여있는 것을 발견하고 몹시 놀랐다. 술에 취한 것인지 꿈을 꾸고 있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가만히 그 화분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진작 죽어 내다 버렸던 란타나와 다른 점이라고는 하나 없는 바로 그 나무인 것 같았다. 나는 그러고도 한참동안 더 서서 옆집 남자가 두고 간 란타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다 화분을 들고 공원으로 가 그 나무를 심어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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