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사의 업무 대가, 설계비는 아직도 20년 전에 머물고 있으니
어떤 스님이 있었다. 이 스님은 가는 절마다 주변의 황무지를 개간하여 논이나 밭으로 만들었다. 그 스님은 잠시도 쉬지 않고 일을 하는 분이었지만 사실은 절의 어른이었다. 그 스님이 절 주변의 땅을 소일 삼아 개간하여 논이나 밭을 만들어지고 나면 그 논밭은 인연이 닿는 사람에게 싼 값으로 건네 졌다.
부산의 어느 절에 있을 때도 그 스님은 여름 내내 비지땀을 흘려가며 황무지를 밭으로 만들었다. 밭이 만들어지자마자 절 아랫마을의 어떤 사람이 찾아와서 자신에게 팔라고 했다. 그런데 그 사람은 스님이 계산에 어둡다는 것을 알고는 아주 싼 가격을 제시했다. 스님은 그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고는 그 논밭을 그 사람이 제시한 가격으로 넘겨주었다.
그 스님은 절의 재무스님을 불러 밭을 팔았다고 하면서 돈을 건넸습니다. 재무스님은 주변 시세에 비해서 너무 싼 가격이었기에 그 돈을 받으면서 투덜거렸다. 그러자 스님은 재무스님에게 이렇게 물었다.
“재무스님, 자네의 계산 방식은 나와는 다른 것 같네. 그 논밭이 원래는 농사를 짓지 못하는 쓸모없는 땅이었지 않았던가?”
“예 스님”
“그런데 이제는 내가 밭으로 만들었지?”
“예”
“그리고 그 땅이 그 사람에게 건네 졌지만 여전히 밭으로 남아있지?”
“예”
“그리고 없던 돈이 이렇게 자네 손에 건네 져서 여기에 있지?”
“예...”
“원래 없던 밭이 생겼고 또 돈도 이렇게 생겼는데 어째서 손해를 보았다고 생각하는가? 누가 그 밭에 농사를 짓던 지 밭은 거기에 있고 또 돈도 생겼으니 얼마나 좋은가? 계산은 이렇게 하는 거라네”
이 스님의 계산이 세상의 기준에 맞는 것인지 따져본다면 분명히 손해를 본 것이리라. 하지만 스님은 황무지를 논밭으로 만들어서 필요한 사람에게 전해주는 것으로 만족하는 것에서 이미 당신의 계산을 끝냈고 밭을 전달하는 과정에서 생긴 돈을 잉여금으로 보았다는 얘기다.
건축사인 내 입장에서 설계 계약을 하면 정해지는 금액에서 이윤을 따져본다. 일에 따라서 원가를 생각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작품이 될 수 있는 집은 금전적인 이윤이 아니라 창작에 따른 결과물로서의 만족함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 일로만 주어지는 작업의 설계비는 무조건 이익이 남는 것이 결과로 되어야만 일을 할 수가 있다.
백 년을 내다보고 지어야 하는 건축물을 설계해야 하는 우리 일과 단순히 시간을 써서 일하는 노동력의 대가와 다르다는 논리를 세워보지만 스님의 논리로 보면 참 어리석은 계산법일 수도 있다. 그 스님의 계산 방식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만은 없지만 의외로 우리 건축사 중에는 스님처럼 사는 분도 더러 있어서 더 힘든 것이 건축사 업무대가의 현실이다.
건축사의 일이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작품을 만든다는 '마음의 일'로 뼈를 깎는 창작의 결과라는 걸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집을 짓기 위해서 설계를 의뢰하는 분들은 설계라는 일이 대부분 결과물로 나온 도면 장수로 판단할 수도 있다. 도면을 그리는 비용으로만 생각한다면 건축사가 받아야 하는 설계비를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도면 작업은 그 이전에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고심하며 수많은 대안을 검토했던 시간 이후에 이루어진다. 그리고 공사가 끝나고 그 집에 대한 평가의 가치를 내릴 때 건축사가 고심했던 시간의 비용이 소요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건축사의 일이 단순한 노동의 대가가 아니라 건축물은 백 년을 내다보고 지어야 한다는 '마음의 일'이라는 것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건축사가 몸과 마음을 바쳐 작업을 한 결과로써의 건축물이라야 도시의 품격을 높아지고 건축주가 지으려는 목적에 부합되어 높은 부가가치가 보장될 수 있다. 하지만 건축사가 제대로 일할 수 있는 시간의 비용이 설계비라는 것을 우리 사회가 알아주지 못하고 있으니 힘든 시간을 견뎌내며 일을 해야 하는 현실이 안타깝다.
오래전이지만 ‘이상건축’이라는 건축전문지에서 개최한 포럼 자리에서 재미 한국인 건축사의 강연 자리에서 있었던 일이다. 그 건축사는 그의 작품과 건축에 대한 생각을 발표하고 난 뒤에 청중과의 대화의 시간을 가졌다. 그 자리에서 한 청중이 그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당신은 스스로 유명하다고 생각합니까?”
그 건축사는 이미 세계적으로 상당한 지명도를 가지고 있는 분이었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해서 그가 만약 자신이 유명하다고 얘기한다면 ‘자신을 스스로 유명하다고 하다니 참 건방진 친구구먼’하는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가 유명하다고 생각지 않다고 얘기한다면 ‘그럼 왜 이 자리에 섰나요?' 하는 질투가 섞인 얘기를 들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이렇게 우문현답으로 얘기했다.
건축사가 유명해지면
그만큼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더 많이 얻을 수 있기 때문
“저는 그렇게 대단한 이름을 얻고 있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유명해지고 싶습니다. 제가 지명도를 얻은 만큼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와 여건을 더 많이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시중에서 거래되는 설계비로는 결코 '작품'을 만들 수 있는 작업여건을 가질 수 없다. 평당 몇 만 원이라는 설계비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바꿔 놓으려면 건축물이 단순 하드웨어가 아닌 ‘행복한 삶’이라는 소프트웨어가 담긴 문화적인 결과물이라는 인식이 필요하다.
건축사의 작업 결과, 즉 건축물은 후손에게 물려줄 도시라는 문화적 관점으로 평가되어야 할 창작의 소산으로 사회에 인식되어야만 건축사의 일이 온전한 평가를 받을 수 있다. 평당 몇 만 원을 받으면서 원가를 생각하고 이윤을 남기는 작업 결과물로만 자꾸 내놓는다면 건축사라는 직업은 우리 사회에서 설자리를 잃게 될지도 모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이 어려운 현실에서도 좋은 집들이 지어지고 있다. 어쩌면 설계비를 평당 몇 십만 원을 들이더라도 저런 집을 지어야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도록 좋은 작품으로서의 집이 더 많이 지어져야 할 것이다. 그런 집이 매체를 통해 세상에 널리 알려져야 싸구려 집이 우리 도시를 얼마나 황폐하게 한다는 것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작품으로서의 집을 만들어내는 건축사가 얼마를 주더라도 군말하지 않고 제 일을 잘하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어서 되겠는가? 백 년은 버텨내야 할 건축물을 평당 몇 만 원을 받고 원가만큼 설계를 해서 집을 짓고 있으니 기가 막힐 일이다. 건축사가 받아야 하는 설계비는 작업을 해야 할 시간에 대한 비용이다. 설계비에 제 값을 매기자는 건 매일이다시피 밤을 새우는 노력을 다 할 수 있는 그런 여건을 확보하자는 것이다.
백 년은 버텨야 할 건축물을 평당 몇만 원을 받고
원가만큼 설계를 하는 건 기가 막힐 일
아직 건축사는 그 노력만큼 우리 사회의 지명도를 얻지 못하고 있다. 부산에서도 세계적인 도시를 지향하면서 그에 부합하는 도시환경을 만들기 위해 '부산건축상'이라는 시상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해마다 그 시상제도에서 상을 받아도 지역 일간지에 제대로 게재되지 않는 현실을 본다. 좋은 도시 환경을 만드는 일등공신인 건축사의 노력이 그만큼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게 아닌가?
아름다운 도시, 사람이 살만한 도시를 만드는데 큰일을 하는 좋은 건축사가 자꾸 줄어들면 아무리 말로 '아름다운 부산'이라고 떠들어도 아무런 소용이 없을 것이다. 행정이, 언론이 좋은 집을 설계할 수 있도록 건축사를 도와주면 얼마나 좋을까?
제대로 된 집을 짓고 싶어 하는 시민들이 좋은 건축사를 찾을 방법을 몰라 평당 몇 만 원짜리 설계를 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른다. 건축사로서 자부심을 기지고 대가에 연연하지 않고 심혈을 기울여 작업한 좋은 집들이 지어지고 있지만 이제는 작업을 할 기회를 얻는 만큼 일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대가가 건축사에게 주어져야 하겠다. 온당한 대가를 지불받지 못하는 설계를 계속해야 한다면 백년지대계로 지어야 할 건축물은 볼 수 없게 되고 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