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사는 친구와 거의 매일 카톡으로 안부를 나누고 있다. 거의 마흔 해 만에 페이스북을 통해 연락이 닿아 이십 대의 기억을 더듬어가며 환갑을 넘긴 노년의 우정을 나누고 있다. 어제는 뜬금없이 빛바랜 편지가 카톡 사진으로 들어왔다.
그 친구는 연무대에서 군 입대 동기로 인연을 맺게 된 사이다. 남녀 사이도 아닌 남자끼리 무슨 주고받을 이야기가 많았던지 오갔던 편지가 제법 되었었나 보다. 그랬으니까 친구는 페이스북으로 나를 찾지 않았을까 싶다.
친구가 보내온 사진 속의 편지를 읽어보았다. 제대하고 그 이듬해에 나는 복학을 했는데 그 친구는 미국으로 가기로 결정했었나 보다. 모국을 떠나 미국에서 살기로 결심했던 친구에게 응원과 격려를 보내며 나는 어떤 생각을 했었을까?
아마도 그 친구가 미국으로 떠나면서 편지가 더 이상 이어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우정도 끊어져 마흔 해가 훌쩍 지나버렸다. 그랬던 친구와 환갑을 지난 지금 실시간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메신저 수단으로 우정을 다시 쌓아가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대화의 소재에서 공통분모를 찾는 게 쉽지 않다는 데 있다. 친구라는 공통분모만 있을 뿐 마흔 해 가까이 살아왔던 삶이 전혀 다르다 보니 당연한 일이지 않은가? 가끔 정치적인 부분도 대화의 소재가 되기도 하는데 미국과 한국이라는 입장 차이도 뚜렷해서 말이 오래 이어지지 않는다.
편지를 한통 쓰려면 썼다가 구겨서 버리기 일쑤고 한 줄을 쓰려면 한참 생각을 가다듬어야 한다. 편지 한 통을 쓰기 위해 며칠씩 받을 사람에 대한 이런저런 생각이 모으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편지를 보내고 답장을 받으면 봉투를 뜯기도 전에 반가운 마음이 이는 건 기다렸던 시간 때문일 터이다.
카톡이 일상 대화의 수단이 되어 버렸다. 한 집에서도 말을 주고받는 게 아니라 카톡으로 소통한다고 하니 어이가 없지 않은가? 손가락질하는 게 귀찮아서 축약어를 쓰는 게 일상이 되니 마음이 담길 여지가 어디에 있을까 싶다.
친구와 매일이다시피 카톡을 주고받지만 몇 줄 이어지지 않고 대화를 마치게 된다. 편지처럼 한통을 쓰기 위해 며칠을 고심한 마음이 전해져야 답장도 기다려진다. 그 편지 한 통을 읽고 나면 내가 할 말도 그만큼 담아서 보내니 주고받는 횟수만큼 정도 깊어지게 된다.
고등학생 때 펜팔을 삼 년 가까이했었다. 상대는 여학생으로 나와 동급생이었던 시골 아이였었다. 삼 년 동안 편지만 주고받았을 뿐 만난 적이 없었는데 대학생이 되어 만나게 되었다. 청소년기에 편지로 다져왔던 우정이 어른이 되어 만나게 된 우리는 어떤 관계로 이어졌을까?
삼 년간 편지를 주고받았던 때에는 친구로. 부산에서 만나서는 남사친 여사친으로 시작해서 연인 사이로 발전했었다. 오랜 펜팔 친구로 지내서 그랬었는지 모르겠지만 남녀 간의 애틋한 연정으로까지 깊어지지는 못했던 것 같다. 우정은 오래갈 수 있지만 연정은 금방 타올라 식어버리기 쉬운 것인지 군입대로 그녀와의 인연이 다하고 말았다.
친구가 보내온 옛 편지를 보면서 사십 년이 지나 다시 이어지는 벗으로서 인연의 지중함을 느끼고 있다. 남녀로 나눈 펜팔 친구로서 우정은 깊어지니 이별이라는 결과에 이르렀지만 남자끼리의 편지 교분은 세월을 뛰어넘어 새로운 우정을 쌓아가게 된다. 편지는 한 달에 한번 정도 주고받으며 애틋한 정을 나누었지만 카톡은 실시간으로 손가락 끝 하나로 한두 문장 주고받으며 오늘의 안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