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상님 복에 관심을 보이자, 그들은 환한 표정을 지으며 '작업'을 시작했다. 검은 정장 비슷한 것을 차려입었지만 어딘가 허술해보이는 차림이었다. 그래도 목소리는 나름 확고했다.
"조상님이 많이 도와주고 계십니다. 앞으로 좋은 일이 많을 거에요."
"제가 사람의 기운을 보는데요, 영이 참 맑으세요. 인상도 좋으시고, 그런 얘기 여러번 들어보셨죠?"
여기까지는 덕담이다. 그 다음 그들의 본격적인 공략이 시작된다. 조상님의 은덕이 앞으로 무궁무진하게 펼쳐질테니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 한발 나아가 더 구체적인 나의 운세, 그와 연결된 우주의 진리를 알려주고 싶다는 것이었다. 조상님이 많이 도와주고 계시다니, 심지어 그게 기운에서 느껴진다니. 상상만해도 설레는 일이어야 하지만 불특정 다수의 뒤통수에 대고 그 멘트를 날린다면 이들은 사이비 종교가 분명하지 않은가.
"저희랑 한번만 같이 가보실래요? 말씀 나눠보니 정말 너무 좋은 분인 것 같아서 말씀 드리는거에요. 절대로 후회 안하실 거에요."
"지금요? 어디로 가는 건데요?
"여기서 전철로 30분도 안걸려요. 잠깐 가서 저희랑 이야기 나누고 가세요. 지금도 이렇게 좋은 기운 받고 계신데 앞으로 얼마나 조상님들 은혜를 입게 될지 한번은 알고 가셔야죠.“
화장기 없는 얼굴의 착해보이는 그 여성은 무척이나 적극적이었다. 기껏해야 나보다 대여섯살 많아보였다. 어떤 비밀스런 이야기를 내가 모르고 있는 점이 진심으로 안타까워 보였다. 아니,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늘 피해다니던 이들과 막상 대화를 해보니 화가 난다기 보단 어쩐지 슬픈 느낌이 들었다. 특히 이 여성은 나의 행복에 진심인 것 같아 더 슬펐다. 자신이 느끼는 행복을 나도 느끼게 해주고, 복도 많이 받게 해주겠단다.
인간은 이토록 각자의 생각의 굴레에 갇힌 채 단 한발짝 벗어나기도 힘든 동물인 것인가. 복잡다단한 세상의 이치를 끝끝내 외면하고 흑백 논리에 갇혀있는 이들과 나는 다른가. 사람들이 이름만 다른 각자의 상자 속에서 자신을 보호하며 살고 있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의 상자 속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 문득 들여다보고 싶어졌다.
벌써 어슴푸레한 저녁 시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무작정 따라가보기로 했다. 혹시라도 있어서는 안될 일이 벌어진다면, 내가 바로잡으면 되는 것 아닌가. 목숨을 부지하고 어떻게든 몰래 탈출해서 경찰서에 신고라도 하자. 그러면 부당한 일을 당하고 있는 이들을 구출할 수 있지 않을까.
당시 이십대 초반의 혈기왕성했던 나는 이런 말도 안되는 결론에 도달하곤, 천금같은 시간을 내서라도 이들을 추적하고 끝끝내 진실을 밝히기로 마음 먹었다. 그것이 내가 그토록 바라던 더 좋은 세상 만들기에 조금은 기여할 것 같았다. 아니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당시 나의 질문은, 내가 내건 조건은 단 한가지였다.
"가서, 돈을 내라고 하는 건 설마 아니죠?"
옆에서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의 대화에 고개를 주억거리던 남자의 눈빛이 순간 흔들리는 것을 느꼈다. 잘못 보았을까. 여자의 입이 훨씬 빠르게 상황 정리를 했다.
"어휴, 절대 아니지요. 그런 일로 저희가 이렇게 귀하신 분 오라가라 하지 않아요. 정말 좋은 이야기 들려드리고 싶어서, 저만 알기 너무 아까워서 모시고 가는 거에요."
우리가 탄 전철은 북쪽으로 한참을 간 후 지금은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어떤 전철역에 내렸다. 골목길을 돌고 돌아 야트막한 건물에 도착했다. 이미 땅거미가 지고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삶은 아무리 고해라지만 너무하단 생각이 들었다. 인간은 내일은 더욱 나다운 인생을 살 수 있을거라는 희망을 품고 서로를 위로해야 하는 것 아닐까. 우리는 왜 스스로의 존재 가치와 행복의 이유를 이렇게 비밀스럽고 어두운 장소에서 남의 입을 빌려 듣고 싶어 하는걸까.
잠겨있던 문이 열리고 마침내 드러난 그 안의 세상은 바깥과는 완전히 다른 색의 공간이었다. 형형색색의 한복을 입은 사람들이 화려한 제사상 앞에서 삼삼오오 모여 절을 하고 있었다. 특이하게도 한가운데에 큰 중앙제단이나 성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작은 제단이 여러 곳에 마련되어 있었다. 사람들이 모여 절을 하고 있는 큰 방을 지나, 조용한 교실 같은 방으로 들어갔다.
나를 인계받은 나이가 좀 많은 여성은 작은 책상을 앞에 두고 능숙하게 강의를 시작했다. 작은 수첩에 검은색 볼펜으로 빠르게 써내려간 것은 우주의 탄생, 나와 신의 관계에 대한 교리였다. 우주의 섭리를 단 30여분 정도로 현란하게 설파했는데, 그 동안 질문은 두번 밖에 받지 않았다. 나보다는 이 강사 분이 더 바쁜듯이 보였다. 그도 그럴듯이 우리 차례가 빨리 끝나야 뒤에 도착한 사람들에게 시간을 할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 말고 다른 이들도 강의를 듣고 있었고, 나를 데려온 검은 옷의 여성은 계속 나와 함께 다소곳이 앉아있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우리가 향한 곳은 절을 하는 큰 방 옆의 대기실 같은 공간이었다. 아찔한 색감의 한복 수십 벌이 벽에 줄줄이 걸려있었다. 빨강, 파랑, 노랑, 자주, 민트색까지, 태어나서 처음 보는 원색에 가까운 한복들이 방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강의를 했던 여성은 메뉴판 같은 표를 가리키면서 말했다.
"이렇게 큰 복을 받았으니 감사를 표하셔야 해요. 그래야 조상님들이 노하시지 않고 자자손손 복을 계속 주시는거고, 아니면 자기 복을 제 발로 차고 화를 입는 거고.“
잠시 반응을 살피더니 곧바로 설명을 이어갔다.
“(손으로 가리키며) 이 금액대의 상차림으로 확실하게 마음을 표현하시면 좋아요. 안되면 이 정도는 하셔야 할 것 같고. 옷은 대여를 해드리고 있어요. 옷을 단정히 입어야 제사 드리는 마음도 경건하게 표현이 되는데, 이걸 다 직접 구하시려면 돈이 많이 드니까 저희가 도와드리는 거에요. 옷까지 대여하시면 금액대가 이렇게 올라가요."
분명 여러가지 설명을 들었던 것 같은데 이제 조상복이고 우주고 나발이고, 빨리 이 곳을 빠져나가야 한다는 확신이 들었다.
"말씀은 잘 들었는데 저는 이렇게까지 할 생각이 없어서요,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 순간, 문간에 서있던 사람들이 자석처럼 모여들어 현관으로 향하는 나를 제지했다. 교리를 설명했던 여성은 갑자기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 처럼 무섭게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빚독촉이라도 하듯이 몰아붙이는 기세에, 어지간한 사람은 그냥 돈 내고 자리를 피하겠다 싶을 지경이었다.
"아니, 이렇게까지 설명을 듣고 나서 그냥 나가는 법이 어디있어요? 사람이 참 경우가 없네. 그럴거면 뭐하러 여기까지 와서 이러고 있어요. 내 시간만 아깝게."
그것은 정확히 내가 해야 할 대사였다. 우주 탄생의 비밀이라도 알려줄 것처럼, 감성 힐링여행이라도 시켜줄 것 처럼 나를 '모셔와놓고', 나에게 노란색 한복 세트를 들이대며 절값을 내라고 하다니. 이 모든 것이 새드엔딩, 아니 묵시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는 걸 예감했던 나는 검은 옷의 그녀를 바라보며 우렁찬 목소리로 말했다.
"저한테 돈 내라고 할 일 없다면서요."
검은 옷의 여성은 입을 딱 벌렸다.
"아까 좋은 일이 많이 생길 거라고, 저한테 정말 좋은 이야기해주신다고 하셨잖아요. 지금 이건 돈내라고 강도가 협박하는 거죠.“
큰 방쪽의 문이 약간 열려있던 터라 절하던 사람들이 이 쪽을 쳐다보았다. 몇몇이 험상궂은 인상으로 험상궂은 말을 하며 나를 더 강하게 제지하려고 하자, 검은 옷의 여성이 쏜살같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실장님! 제가 해결할게요. 제가 잘못 생각한 것 같아요."
나라는 사람이 이러지 않을 거라고 잘못 생각했다는 것인가, 실장님이 저러지 않을 것이라고 잘못 생각했다는 것인가. 우울한 표정으로 끌려나와 현관문 앞에서 신발을 신는 나를 기다리던 여성은 밖으로 나가는 문을 열어주며 따라 나왔다. 그리고는 공손히 허리를 숙여 나에게 정말 죄송하다고 사과를 하는 것이었다.
"제가 약속을 못지켜서 죄송합니다. 이런 일이 없었어야 했는데 ... 제가 큰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어두워져서 얼굴이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목소리는 가라앉아 있었다. 나를 데려올 때는 분명 행복한 얼굴이었는데. 자신이 알고 있던 행복의 세계로 나를 초대하고 싶었던 것 같았는데. 그 세계에 내가 균열이라도 낸 걸까.
"좋은 이야기해주신다고 해서 왔는데, 너무 실망이에요. 앞으로는 이런 일 하지 않으시면 좋겠어요.“
그리고 덧붙였다.
"저기서 절하는 사람들한테 돈 뜯고 계신거잖아요."
그 여성은 아무 대꾸 없이 서있었다.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연거푸 할 뿐이었다. 나는 그녀를 남겨둔 채 뒤돌아서 집으로 향했다. 조용한 골목길을 걸으며 착잡한 생각이 들었다. 상황은 생각보다 간단치 않았다. 내가 여기에 오길 잘 한걸까. 난 무엇을 기대하고 온 것이었나. 수많은 이들이 '조상님 복'을 강매당하며 아직 남아있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발걸음을 한 이들은 참으로 세상살기 힘든 이들이라고 생각하니, 집에 가는 발걸음이 더 무거웠다. 다만 그날 이후로 그 전철역에 검은 옷의 그 여성은 보이지 않았다. 그 점은 조금 다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