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월 27일(15일째)-맨해튼
어머니는 홀로 제시간에 일어나서 머리를 드라이하고 정돈했다. 나도 일어나 어머니랑 어제와 같이 조식을 챙겨서 우리 방으로 가지고 왔다. 이것도 한두 번 해보니 익숙해서 그런가 1층 식당에서 트레이에 빵, 음료수, 과일 등을 챙겨 다소 비좁은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오는 것이 익숙했다. 오늘은 일정에 여유가 있어서 10시가 되어서 나섰다. 저번에 아이가 레고 샵에서 선물로 받은 쥐 레고에 부품이 빠져서 잃어버렸다. 나는 본인 장난감을 챙기지 못하고 레고 잃어버려서 앞으로 안 사준다고 하자 아이는 내가 무서워 나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아내에게 잘 떨어지는 부분이라서 잃어버렸다고 아빠 밉다고 삐졌다가 결국 길에서 울었다. 그래서 내가 왜 그랬냐고 물어봐서 아이는 설명하고 결국은 기분이 풀렸다. 일상에서 겪게 되는 소소한 아이와의 감정 교감이 쉬운 듯하면서도 쉽지 않아 보였다.
한가롭게 스케이트를 타는 사람들이 있었던 브라이언트 공원을 지나 뉴욕 공립도서관에 갔다. 거대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건물은 3,800만 점이 넘는 도서와 소장품들이 보관되고 있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도서관으로 내부는 미술관처럼 고풍스러운 장식과 그림들이 가득했다. 공공도서관이 아니라 미술관이나 궁전 같았다. 아이는 팸플릿에 있는 동물 찾기에 열중해서 소, 벌, 사자, 괴물까지 다 찾아다녔다. 나와 아내는 호젓하게 책을 읽고 있는 사람들 틈바구니 속에서 책을 꺼내 들고 잠시나마 이 분위기를 느껴보았다. 명성이 있는 도서관이라 그런지 관광객들이 제법 방문하는 듯했다.
그다음엔 꼭 방문하고 싶었던 센트럴 터미널에 갔다. 세계 최대 규모의 기차역으로 44개 플랫폼이 있는 기차역은 도심 한가운데 있으면서 그 위용이 대단했는데 거리에서 봤을 때는 그만큼 거대한지는 느끼지 못했다. 안에 들어오고 나서야 그 규모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거대한 천장과 그 아래 바삐 오고 가는 사람들, 기둥 하나 없이 그렇게 거대한 공간이 있다는 것이 인간이 만든 건축 기술에 다시금 놀랐다.
사진을 찍고 다들 출출해서 간단히 버거를 먹기로 해서 근처 검색을 해본 다음 파이브 가이즈에서 햄버거를 먹었다. 아이는 공짜로 주는 땅콩 까는 것을 즐거워했다. 나는 버거 중에서는 인 앤 아웃 다음으로 여기 햄버거가 맛있었다. 저번 LA에서 먹었을 때는 감자튀김이 너무 짜서 먹지 못하고 거의 버렸었는데 여기서는 짜지 않고 입맛에 맞아 다들 잘 먹었다. 탄산에서 한 번 놀랐는데 탄산 자판기가 디지털로 되어 있어서 콜라를 체크하면 그 종류별로 아이콘이 생겨났고 그중 하나를 클릭하면 자동으로 음료가 나왔다. 그런데 콜라만 그런 것이 아니라 환타, 스프라이트, 루트 비어, 이름 모를 탄산 등 많았기에 이 나라는 진정 탄산의 나라였다. 신이 우리에게 물을 주었다면 미국은 우리에게 탄산을 주었다. 나에게 이번 여행 음식 순위는 인 앤 아웃 버거, 랍스터 샌드위치, 스트립 스테이크, 연어 베이글, 파이브 가이즈 버거였다. 그러고 보니 죄다 간단하게 먹거나 고기, 빵이다. 채소가 없는 미국 음식이라는 것이 실감 났다.
흐리고 추운 날씨를 뚫고 UN본부까지 걸어갔다. 아이가 어려서 원래 계획에 없다가 근처라서 가깝기도 하고 언제 와보나 싶어서 시간이 남은 김에 가보기로 했다. 언제나 교과서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 건물이 눈 앞에 보였다. 세계 평화를 이루기 위한 장소답게 미래 세계를 선도할 각국에서 온 견학생 무리와 전 세계에서 온 방문객들로 와글와글했다. 아내는 방문자 대표 등록하고 사진 출입증도 찍어서 우리 가족을 위한 입장 준비를 마쳤다. 우리는 보안검색을 철저히 받고 나서 방문자 센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아이가 너무 어려서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모르기에 투어를 신청하지 않아서 회의장 안까지는 볼 수 없었다. 로비와 지하만 둘러보고 나왔다. 벽면에 반기문 사무총장 사진도 있어서 아이와 함께 찍었다. 아내는 하버드에서 타이거 마미, 나는 UN에서 타이거 대디였다. 이 와중에 아이는 장난감 생각만 한다.
뉴욕 야경을 보기 위해 록펠러 센터로 넘어왔다. 록펠러 센터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석유왕 록펠러 재단에서 만든 건물로 세계 대공황 시기에 뉴욕에서 지어진 유일한 마천루라고 한다. 어제, 오늘 온종일 걷느라 지친 아이를 위해 레고 샵에 갔다가 별로 사고 싶은 것이 없어서 바로 근처에 영화 '나 홀로 집에 2'에 등장할 듯한 큰 장난감 매장으로 갔다. 고대하던 트랜스포머 레스큐 봇 아카데미는 없었지만 비슷한 미니로봇을 보고는 마음에 들어해서 하나 샀다. 오후 5시 입장까지 시간이 조금 남아서 지하 카페에서 한숨 돌렸다. 아내의 도전으로 근처에 있는 아마존 고 무인매장에서 간식도 사 먹어 봤다. 무인매장이라고 해서 아무도 없는 것은 아니고 생긴 지 얼마 안돼서 그런지 매장 담당 직원 1명은 있었다. 먼저 아마존 카드 등록을 하고 들어가서 물건을 집어 들면 자동으로 장바구니에 담기는 시스템이었다. 그래서 몇 번 놓았다가 내려놓아봤는데 나중에 결제된 걸 확인하니 정확히 우리가 들고 나온 것이 결제되었다. 물건을 집어 들고 그냥 나오기만 하면 결제가 되는 시스템이라니 꽤나 낯선 경험이었다.
시간이 되자 탑 오브 더 록을 보러 갔다. 언제 모여들었는지 그토록 보이지 않던 한국 사람들이 여기서는 엄청 많았다. 이 시간에 들어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한국인으로 보였다. 록펠러 센터 67층에 올라서 옥상으로 올라가니 해가 진 직후 뉴욕의 야경이 아름답게 펼쳐졌다. 한눈에 오래 담아두고 싶은 풍경이었다. 나는 어머니, 아내, 아이를 뉴욕 야경에 세우고 사진을 찍어주었다. 특히 뉴욕의 상징 중 하나인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에서 반짝거리는 불빛은 사진의 품격을 올려주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인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에'도 등장하는 빌딩으로 뉴욕 배경의 대중문화에 항상 등장하는 단골손님이다. 그 근처에는 우아한 모습이 인상적인 크라이슬러 빌딩도 보였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가지고 싶었던 크라이슬러의 욕망이 빚어낸 이 우아한 곡선미를 자랑하는 건축물도 아름답게 빛내고 있었다. 그렇게 감상을 하면서 혼자 사진을 찍다가 가족을 만났는데 아이가 화장실 변기에 아까 샀던 미니로봇을 빠뜨려서 펑펑 울었다고 했다. 우리와의 인연이 길지 않은 장난감이었다. 장난감 로봇은 한국에서 사기로 하고 마음을 접었다. 한참을 사진으로, 영상으로 이 뉴욕의 야경을 기록했다.
내려와서는 고대하던 베트남 쌀국수를 먹기로 했다. 다들 뜨끈한 국물 요리로 마무리하고 싶었는데 한식당은 제외하고 선택한 것이 쌀국수였다. 호텔 근처에 찾은 맛집으로 가는데 그 지역 이름이 웃기게도 헬스 키친(Hell's kitchen)이었다. 식당으로 걸어가는 길에 타임 스퀘어도 마지막으로 지나가 봤다. 이제 보니 환상 속에서 만들어진 꿈길을 걷는 듯한 풍경이었다. 식당에서 다들 쌀국수를 맛있게 식사한 후 근처 마켓에서 한국으로 가지고 갈 과자를 잔뜩 샀다. 8만 원을 넘게 사니 양손 가득이었다. 호텔로 돌아온 후 짐 정리를 하고 길다면 긴 북아메리카 여행, 마지막 도시 뉴욕의 마지막 밤을 정리했다. 그 여운을 붙잡고자 아내는 하이네켄 맥주, 나는 다이어트 루트 비어로 마무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