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마녀의 테마에세이
전에도 한번은 얘기했던 것 같지만, 소설은 특히 장편소설 집필은 일종의 집짓기 즉 건축이라고 할 만하다. 그렇게 따지면 시놉시스 작업은 설계도면에 해당하는 셈인데, 도면이 머릿속에 다 있어서 굳이 꺼내놓을 필요가 없다면 굳이 시놉을 쓰지 않아도 된다. 하지만 흐름을 놓치지 않으려면 어떤 형태로든(하다못해 간단한 메모 수준이라 해도) 시놉 작업은 필요하다. 설계도 없이 진행하는 건축을 상상할 수 있냐고 물으면 간단한 대답 아닌가.
일하는 도중에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운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다. 모니터를 열어놓고 술을 마시며 뭘 쓴다는 건 나한테는 있을 수 없다. (취해서 쓴 글이 다음날 깼을 때 정상적인 글이었던 경우도 거의 없다) 뭐 다른 작가님들의 작업 패턴은 모르겠고 그 나름의 작업 방식은 다 존중하겠지만 술 마시면서 쓴다고 하면 그건 존중이 안될 듯.
시대가 바뀌어서, 작가라고 해도 글로 수익을 못 내는 게 별로 이상하지 않게 여겨지는데 그게 가끔 신기할 때가 있다. 마치 마부가 된 느낌이랄까. 말과 마차가 사라지고 자동차가 달리는 거리에 선 늙은 마부 말이다. 평생을 마부로 일했던 사람으로부터 마부의 정체성을 빼앗을 수 있을까? 아무리 말과 마차가 사라졌다 할지라도.
소설과 건축이 본질적으로 같은 작업이라는 근거가 하나 더 있다. 쓰이지 못하면 무용지물이라는 것. 호화롭게 지었지만 터무니없는 가격(월세)이 매겨져 텅텅 빈 빌딩은 결국 아무도 읽어주지 않는 대하소설과 다를 바가 없지 않나 생각해본다. 결국 둘 다 돈이 없으면 누리기 힘든 특권이라는 점에서 (요즘 책값?!!)또한 자본주의의 쓸쓸한 이면을 공유하고 있기도 하고 .
#소설과건축그리고마부의정체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