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이에서 나만의 식탁이 생겼다.

단 한 번 맛본 인생의 닭고기 국수, 그 아쉬움을 달래준 완벽한 덮밥들.

by 나들레



빠이에는 나만 일고 싶은,

아니 실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런 식당이 하나 있다.


지도 앱에는 아침 8시 오픈이라 적혀있지만, 사장님 마음인지 점심시간이 다가올 무렵 문을 여는 곳. 조금만 늦장을 부리면 인기 메뉴는 동이 나 맛볼 기회조차 얻기 힘든 곳이다.


이 비밀스러운 아지트의 지도를 그려준 사람은 다름 아닌 숙소 사장님 남편분이었다. 빠이의 그 누구보다 믿음직한 현지인인 그가 "이 집, 닭고기는 진짜야!!"라며 강력하게 추천해 주지 않았더라면, 나는 이 보물 같은 장소를 그냥 스쳐 지나갔을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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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이에 온 지 둘째 날, 부푼 기대를 안고 식당을 찾았다. 겉모습은 소박했지만, 마치 푸드코트처럼 사람들로 북적이는 활기가 대단했다. 음식을 직접 가져와야 하는 셀프서비스 방식에도 저마다의 식사를 자유롭게 즐기고 있었다. 그 풍경을 보는데, 문득 여행을 좋아하시는 엄마의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어디 갈지 모르겠다면 무조건 사람 많은 곳으로 가. 맛은 보장되니까."


그제야 사장님 남편분의 추천과 엄마의 조언이 실감 났다. 나는 확신에 차 안으로 들어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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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jpg Roast red pork with rice


하지만 나의 첫 주문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닭고기 요리를 맛보러 왔건만, 정신없이 주문서를 작성하다 그만 옆집 메뉴인 '로스트 돼지고기 덮밥'을 시키고 만 것이다. 어쩌면 이 실수가 아니었다면, 나는 이 맛있는 덮밥의 존재를 영영 알지 못했을 거다. 이런 우연이 나에게 와주어 감사했다.


잡내 하나 없이 부드러운 고기에 '단짠단짠'의 정석 같은 소스가 어우러진 맛. 족발 양념 같기도 한 그 맛은, 함께 나온 달걀 반쪽과 시금치 같은 식감의 삼삼한 나물과 완벽한 조화를 이뤘다. 자극적인 단짠을 선호하지 않은데도, 적당한 감칠맛에 기분 좋게 한 그릇을 비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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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식 맛에 감탄하는 것 외에도 이 식당은 여러모로 나의 예상을 벗어났다. 먼저 의외의 편리함이었다. 와이파이가 없을 것 같은 외관과 달리 신호는 빵빵하게 터졌고, 식당에서 물을 사 먹는 게 당연한 이곳에서 무료로 제공되는 물통을 발견했을 때는 반갑기까지 했다. (물론 "이런 물을 마시고 배앓이했다"라는 후문도 들었지만, 튼튼한 소화기관을 믿고 마셨는데, 다행히 아무 탈 없었다. 역시 난 튼튼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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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이런 편리함과 동시에, '아, 여기 진짜 로컬이구나'하고 정신이 번쩍 드는 순간도 있었다. 결정적인 장면은 소스 통 입구에 옹기종기 모여있던 작은 개미 떼를 발견했을 때였다. 순간, 3초 정도 숨이 멎는 줄 알았다. 5년 전 여행에서도 비슷한 풍경에 식겁했는데, 또다시 마주하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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놀람도 잠시, 이내 테이블 위를 유유히 행진하는 개미 친구들을 보며 '그래, 여긴 자연 친화적인 로컬 식당이니까. 내가 적응해야지' 하고 초연해졌다. 그날 이후, 소스는 그저 바라만 보는 존재가 되었지만.




SE-6567ee08-dd62-42f3-a206-4669412cd5ff.jpg Egg noodles with chicken soup


몇 번의 방문 끝에,

드디어 이 식당의 주인공인

'닭고기 계란면 국수'를 맛보게 되었다.


야들야들한 닭고기와 부드러운 식감의 계란 면, 그리고 담백하면서도 깊은 닭 육수의 조화. 고추가 잔뜩 들어간 것도 아닌데, 속이 확 풀리는 해장국처럼 시원하면서도, 입에 착 감기는 감칠맛에 숟가락을 멈출 수가 없었다. M 크기인데도 재료를 아낌없이 넣어 만들어주셔서 양도 진짜 푸짐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 맛이 생각나 입에 침이 고일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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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비극은, 이 완벽한 국수를 빠이 여행에서 딱 한 번밖에 먹어보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 맛을 잊지 못해 다시 찾아갔을 때는 이미 매진이었고, 그다음 날은 이유도 모르게 문이 닫혀있었다. 치앙마이로 떠나는 마지막 날 아침에는, 문이 열릴 시간까지 기다리기엔 예약해 둔 미니밴이 있었기에 결국 나의 첫 경험은 마지막 경험이 되고 말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 국수 한 그릇을 위해 다시 빠이 여행을 떠나기로 다짐했다. 나의 욕심일 수도 있지만, 이 맛을 만들어주신 젊은 여자 사장님께서 오래오래 건강하게 장사해 주셨으면 좋겠다.




SE-fd896b64-b35f-44d9-bfe9-ac60900f9d93.jpg Grilled chicken with rice


국수를 놓친 날의 슬픔을 달래준 것은 '구운 닭고기덮밥'이었다. 어쩔 수 없이 시킨 차선책이었지만, 오히려 '럭키비키'였다.


예쁜 접시에 소복이 담긴 고봉밥. 그 위를 가득 덮은 토실토실한 구운 닭고기, 곁들여진 신선한 고수와 오이, 멸치를 진하게 우린 듯한 국물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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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드러운 고기에 약간 달짝지근하면서도 짭짤한 맛이 배어 있었는데,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나도 워낙 푸짐해서 내 소중한 고기를 빼고 밥 3분의 1이나 남기고 말았다.


아효효.... 되돌아간다면 어떻게든 다 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며칠 동안 드나들자, 사장님께서 나를 알아보시는 듯했다. 주문 후 음식을 픽업할 때 보통 테이블 번호를 큰 소리로 부르는데, 그 대신 나를 보며 "Hey~~" 하고 손짓하셨다. 이름 모르는 단골을 부르는 그 눈빛.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낯선 여행자가 아니었다.



* M을 시켰는데, 혼자서는 감당하기 벅찰 만큼 푸짐했다. 양이 적은 편이라면, 고기가 줄어드는 아쉬움은 있겠지만 S 한 그릇으로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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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은 혼자 밥 먹는 내가 안쓰러우셨는지, 숙소 사장님이 따라와 주셔서 사진을 찍어주시기도 했다. 집중해서 음식 사진을 찍는 내 모습이 무척 귀여우셨다며.


빠듯한 일상에 잊고 있었는데, 이 사진을 보니 문득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이곳은 나에게 단순한 단골 맛집, 그 이상이었다.


맛있는 음식뿐만 아니라, 식당을 둘러싼 자연 풍경, 은은한 꽃향기와 흙냄새,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다채로운 언어들, 세상 가장 여유로운 표정으로 식사를 즐기던 다국적 손님들, 친절한 사장님과 미소가 아름다운 직원분들. 그 모든 것이 그곳의 분위기였다.


자연 속에서 여유를 맛보는 이 식당은 어쩌면 여행자와 현지인 모두에게, 팍팍한 하루의 쉼표 같은 곳일지도 모른다.



진짜 로컬 감성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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