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영화 <센과 치히로>가 상영되던 핼러윈 징짜이 마켓.
미야자키 하야오의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내가 가장 사랑하는 애니메이션이 치앙마이의 밤공기 속에 상영되고 있었다. 일본어 더빙에 영어 자막, 그리고 태국의 덥고 습한 공기. 이 낯선 조합이 만들어내는 묘한 이질감이 오히려 나를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밀어 넣는 듯했다.
...
빈 의자가 없을 만큼 북적였지만, 관계자분이 건네준 간이 의자 하나에 몸을 기대어 앉으니 세상 부러운 것이 없었다. 잠시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그날 시간은 비현실적으로 아름다운 밤이었다.
사실 이날은 몸과 마음이 젖은 솜처럼 무거운 날이었다. 며칠간 컨디션 난조로 숙소에만 칩거하다가, '이대로는 안 되겠다.'싶어 무작정 검색창을 두드렸다. 그때 운명처럼 눈에 띈 단어,
원래 금, 토, 일 아침 일찍 열리는 징짜이 마켓이 10월 30일과 31일, 핼로윈을 맞아 특별히 밤의 문을 연다는 소식이었다. 이전에 숙소 호스트 소개로 알고 있었던 현지인조차 "평일엔 안 열어요."라며 말렸던 그곳을, 나는 홀린 듯 찾아갔다. 그리고 그 선택은 치앙마이 한 달 살기가 내게 준 최고의 뜻밖의 선물이 되었다.
밤의 징짜이 마켓은 낮과 또 다른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아이들을 위한 체험 클래스가 열렸고, 곳곳에 아른아른한 주황빛 조명이 켜진 풍경은 마치 동화 속 파티장 같았다. 치앙마이 작가님들이 손수 만든 굿즈와 옷, 액세서리를 구경하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그중에서 나와 꼭 닮은 키링 하나를 발견했다. 운명이라 생각하며 지갑을 열자, 작가님은 눈을 동그랗게 뜨시더니 "당신과 정말 많이 닮았네요?!"라며 해맑은 미소를 지으셨다.
계산을 마치고 돌아서려는데, 핼러윈이라며 달콤한 군것질거리를 덤으로 손에 쥐여주셨다. 혹시 주말 마켓에도 나오시는지 재차 확인한 뒤,
"그럼, 그날 봬요!"
호기롭게 다시 오겠노라 약속하고 돌아섰지만, 야속하게도 일주일 뒤 주말 마켓을 다시 찾았을 때 그 작가님과 아기자기한 굿즈들은 보이지 않았다. 여행 초기라 짐이 많이 늘어날까 봐 구매를 망설였던 다른 굿즈들이 내내 눈에 밟혔다.
여행이나 인생이나, 마음에 드는 순간 유예하면 안 된다는 걸. 그 작고 귀여운 키링이 가르쳐 주었다.
한참을 구경하다 보니 잊고 있었던 허기가 몰려왔다. 어디선가 맛있는 향기가 나 먹거리 노점으로 향했다. 홀린 듯 팟타이 전문점 앞에 섰다. 즉석에서 맛깔스럽게 볶아내는 고소한 냄새.
기다리는 동안 사장님 부부가 따뜻한 미소를 건네며 말을 걸어왔다.
"어디서 왔어요?. 혼자 왔어요?", "이건 이렇게 조합해서 먹어야 맛있어요"
서툰 영어와 손짓발짓이 오가는 스몰토크 끝에 두 손 가득 받은 팟타이는, 내가 시킨 팟타이 소(S)가 맞나 싶을 만큼 푸짐했다. 가격도 훌륭한데 인심은 더 넉넉했다.
따끈한 면발을 한입 가득 넣으니 비로소 살 것 같았다. 팟타이의 맛도 훌륭했지만, 낯선 이방인을 향한 사장님의 다정한 미소와 덤으로 주신 호박 모양 사탕들이 배와 마음을 동시에 함께 부르게 했다. 내가 아이처럼 기뻐하자, 사장님은 함박웃음을 터트리셨다. 그 웃음은 그때 받았던 사탕만큼이나 달았다.
여기 태국에 오면 꼭 마셔야 한다는 '땡 모반(수박 주스)'까지 곁들이니, 치앙마이의 밤이 완성되는 기분이었다. 한국 돈 1,600원의 행복. 로컬 시장보다는 조금 더 비쌌지만, 이 낭만적인 분위기 값이라 생각하면 오히려 오늘 밤의 황홀경과 맞바꾼 대가치고는 터무니없이 저렴했다.
배를 채우고 건너편, 징짜이 빌리지가 궁금해 그곳으로 향했다. 작가님들의 작업실이 가득해 낮에는 고요하던 이곳이 밤이 되니 딴 세상이었다. 특히 입구에 있는 인형 뽑기 가게는 그야말로 불야성이었다.
우리나라 인형 뽑기와 사뭇 다른 점이 있다면, 사람들이 마트 장바구니 같은 전용 카트에 본인이 뽑은 인형을 산더미처럼 쌓아두고 다닌다는 것. 누군가에게는 도박이고 누군가에게는 건전한 스포츠인 그 친근하면서도 낯선 광경이 흥미로워 한참을 구경했다.
비록 나는 '똥손'이라 구경만 했지만, 카트 가득 인형을 싣고 가는 사람들의 표정은 조금 전 팟타이를 한입 가득 물었던 내 표정만큼이나 행복해 보였다.
아픈 몸을 이끌고 나선 길에서 마주한 야외 상영 영화, 다정한 현지 사람들, 그리고 뜻밖의 축제. 만약 내 계획대로만 움직였다면, 혹은 아프지 않았다면 결국 만나지 못했을 풍경들이다.
가끔은 내비게이션을 끄고 우연이 이끄는 대로 걸어볼 일이다. 계획된 맛집보다는 우연히 들어간 식당이 인생 맛집이 되기도 하고, 기대하지 않은 날에 인생 영화를 뜻밖의 장소에서 만나기도 하니까.
돌이켜보면 그랬다.
불운이라 여겼던 순간이,
여행이 끝난 뒤엔 가장 선명한 행운으로
남아 있다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