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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모린 May 24. 2018

1부 - 어린 왕자와 어떤 어른

앙투안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 - 『어린 왕자』


-레옹 베르트에게
이 책을 어떤 어른에게 바치게 된 것을 어린이들이 용서해주었으면 한다. 내게는 그럴 만한 진지한 이유가 있다. 중략. 그 어른은 어린이들을 위한 책까지도 다 이해할 줄 안다는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세 번째 이유는, 그 어른이 지금 프랑스에 살고 있는데 그곳에서 춥고 배고픈 처지에 놓여 있다는 점이다. 그 어른은 위로를 받을 필요가 있는 것이다. 그 모든 이유로도 부족하다면, 나는 이 책을 지난날 어린아이였던 그에게 바치기로 하겠다.


 책을 펼치자마자 독자는 작가의 선언을 마주한다. 자신의 책을 어린이가 아닌 '어린 소년이었던' 자신의 친구에게 바치겠다는 선언. 자신의 친한 친구이자 어린이의 책도 이해할 수 있는 어떤 어른. 하지만 위로가 필요한 존재. 작가는 '어떤 어른'에게 책을 바쳐야 하는 이유를 털어놓는다. 작가가 어린 왕자를 통해 위로하고 싶은 친구는 누구일까. 그런 의문이 스치는 순간 작가는 친구가 아닌 독자에게 전하고픈 한마디의 문장을 던진다.


어른들은 누구나 다 처음엔 어린아이였다.
 (그러나 그것을 기억하는 어른은 별로 없다.)


 이 두 문장은 그의 친구가 아닌 독자에게 향하는 문장이었다. 작가가 말한 레옹 베르트는 어쩌면 작가의 친구일지도, 어쩌면 길을 걷다 마주치는 누군가 일지도. 책을 보고 있는 '나'는 아닐까.     



  우리는 지난날 어린아이였다. 여섯 살 때 보아 구렁이 그림을 그렸을 어떤 아이. 어른에게 그 그림을 들고 물었을 것이다. 이 그림이 무섭냐고. 아이가 바라보는 것은 보아 구렁이가 삼킨 '보이지 않는' 코끼리다. 코끼리를 삼킬 만큼 거대한 보아 구렁이, 얼마나 무서운가. 그러나 어른이 시선이 닿는 것은 '보이는 것'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던 세계에서 '보이는 것'을 중요시하는 현실로 흘러간다. 그 과정에서 아이였던 기억은 현실의 구덩이 속에 묻힌다. 그렇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봤던 기억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이 '바치는 말'을 이렇게 고쳐 써보겠다.
-어린 소년이었을 때의 레옹 베르트에게

    

  그래서 작가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라보는 아이들에게 양해를 구한 것은 아닐까. 보이는 것만 믿게 된 이 책을 읽을 어른에게. 보아 구렁이를 모자로 바라본 당신도 사실은 보아 구렁이 속 코끼리를 바라봤던 시절이 있었을 거라고. 어린 소년이었던 레옹 베르트, 그의 친구처럼.





  보아 구렁이를 그리던 아이는 어느 날부터 '모자구나'라는 대답에 항복했다. '어른'이 알아들을 수 있는 얘기만 하게 된 것이다. 그들이 원하는 '보이는 것'을 맞추기 시작하자 이방인이던 아이는 제대로 된 '어른'으로 대접받게 되었다. 그런 그에게 홀연히 나타난 것이 바로 어린 왕자였다.



  그는 죽음의 경계에 서있었다. 사막에서 버틸 물은 일주일분 밖에 남아있지 않았고 사막에서 그를 벗어나게 만들어줄 비행기는 엔진이 파손된 상태였다. 아무도 없는 고립 그 자체. 그곳에서 그는 기적적으로 어린 왕자를 만난다. 대뜸 양을 그려달라는 어린아이를 사막 한가운데서 만난 것이다. 그 아이는 보아 구렁이 뱃속에 '코끼리'를 보는 존재였다.



  그는 기억을 더듬어 어린 왕자가 만족할 '양'을 그리기 위해 노력한다. 어떤 양은 병이 들어버렸다는 이유로, 어떤 양은 염소를 그렸다는 이유로. 심지어는 늙었다는 이유로 퇴짜를 맞는다. 그는 고민 끝에 상자를 그려 어린 왕자에게 건넨다. 상자 속에 어린 왕자가 원하는 양이 있을 것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다.


어린왕자(2015) 무비 스틸컷


내가 원하던 게 바로 이거야! 이 양한테 풀을 많이 줘야 할까?


  어린 왕자는 무심코 그린 상자 속의 양을 바라본다. 마치 살아있는 양을 대하듯 어린 왕자는 고민에 빠진다. 먹이를 얼마나 줘야 할지. 자신의 별에 데려가도 괜찮을 만큼 작은 크기의 양인지. 형태를 감추는 것으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것으로 오히려 어린 왕자는 만족하게 된 것이다. 형태가 보이지 않아도 이미 양은 상자 속에서 어린 왕자와 마주하고 있다. 보아 구렁이 속 '코끼리'처럼.


 아저씨가 준 상자가 좋은 건 그게 밤에는 양의 집이 될 수 있다는 거야.


  어린 왕자는 상자가 밤에 양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뻐한다. 그는 어린 왕자의 말에 '착하게 굴기만' 하면 낮에 양을 매어둘 '고삐와 말뚝'도 그려주겠다고 답한다. 그의 말에 어린 왕자는 어떻게 양을 매어놓을 수 있냐며 화를 낸다. 짧은 대화 속에서 나는 두 가지 생각이 스쳤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털어놓던 '그'가 어른이 되어버렸다는 사실에 슬픔을 느꼈다. 그는 이제 어린이에게 조건을 제시하고 보상을 주는 어른이 되었다. 어린 왕자에게 '착하게 굴기만 하면'이라는 조건을 달며 그에 따른 보상으로 고삐와 말뚝을 그려주겠다고 답하게 된 것이다. 어린 왕자를 만나기 전 어른에게 항복했던 아이는 그들에게 물들어 버렸다.



  또 다른 생각은 어린 왕자가 바라보는 양과 그가 바라보는 양의 본질이 다르다는 이다. 그는 어린 왕자가 '양'을 소유하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용도에 의해 '양'의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그는 필요에 따라 '양'을 구속할 물건을 떠올린다. 제멋대로 돌아다니지 않도록 용도를 벗어나지 않도록 양의 발을 묶는 것이다. 물론 그는 어린 왕자가 화를 내자 '양이 제멋대로 돌아다니다가 길을 잃을지 모른다'라는 말을 털어놓았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게 과연 진심일까.



  그와 다르게 어린 왕자가 바라보는 양은 단순히 '용도'로 필요한 존재가 아니다. 어린 왕자는 양이 필요하지만 그들을 '도구'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렇기에 어린 왕자는 고삐와 말뚝을 제안하는 그의 모습  '이상한 생각'을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어린 왕자에게 있어서 상자 속의 양은 자신의 별에서 함께 살아갈 존재다. 바오밥 나무의 싹을 제거해줄 고마운 존재인 것이다. 용도로 소비되지 않기 때문에 어린 왕자는 상자가 '양의 집'이 될 수 있을 것이라는 사실에 기뻐한다.




  어린 왕자의 대화 속에서 그는 한 가지 사실을 떠올린다. 어린 왕자가 살고 있다는 아주 작은 별이 소행성 B612호라는 생각이다. 그는 소행성을 발견하고 이를 증명하고자 했던 한 천문학자에 대해 말한다. 1909년에 딱 한 번 터키 천문학자의 망원경에 잡힌 소행성. 천문학자는 국제 천문학회에 자신의 발견을 증명하려 노력한다. 그러나 민속의상을 입은 그의 말을 아무도 믿어주지 않는다. 그 모습에 대해 그는 '어른들이란 이런 식'이라고 평가한다.



  아이러니하게도 터키의 한 독재자로 인해 강제로 민속의상을 입지 못하게 된 천문학자는 양복을 입고 자신이 발견한 별에 대해 증명한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제야 그의 말을 믿게 된다. 그는 천문학자의 이야기에 대해 번호까지 밝히며 설명한 이유가 어른들 때문이라 전한다.



  자신이 어린 왕자를 만난 사실을 어린이들은 어린 왕자의 모습과 생각 그 순간을 설명하는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지만 어른들은 행성 B612호에서 온 존재라고 명명할 때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들이 받아들이는 것은 '증명'할 수 있는 형태다. 그는 이 책을 읽는 독자가 어린 왕자의 존재에 대해 무성의하게 넘어가지 않기를 원한다. 책을 기록하는 이유 역시 어린 왕자를 잊지 않기 위해서라는 말을 전하는 것이다.



 어린 왕자가 내가 그린 양을 가지고 떠나버린 지 벌써 여섯 해나 된다. 지금 여기에다 그의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그를 잊지 않기 위해서다. 친구를 잊는다는 것은 슬픈 일이니까. 아무에게나 다 친구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나도 숫자밖에 모르는 어른들처럼 될 수도 있는 것이다.



  어린 왕자와 함께한 시간만큼 '그'는 변했다. 어린 왕자를 막 만났을 때까지만 해도 그는 '어떤 어른'처럼 어린 왕자에게 착하게 굴어야 한다는 말을 건네는 사람이었다. 예전의 그였다면 어린 왕자를 만났던 기억은 금세 잊어버렸을 것이다. 어린 왕자를 만난 사실을 '증명'할 수 없고 도움이 되지도 않을 테니까. 그는 이제 어린 왕자를 잊는 것은 곧 '숫자 밖에 모르는' 어른이 되어가는 일임을 아는 사람이다. 보이지 않게 된 어린 왕자를 떠올리며 그는 '어린 시절'의 자신과 마주하는 법을 알게 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 역시 가장 중요한 어떤 부분을 그릴 수 없다고 답한다. 상자 속에 들어 있는 양을 꿰뚫어 볼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 역시 '어떤 어른'이 되어가는 것이 아닐까 경계한다.



 우리는 자주 본질을 확신한다. 눈에 보이는 것에 믿음을 갖는다. 틀리다는 말을 쉽게 꺼내어 던진다. 세상의 본질은 옳다와 틀리다로만 판단한다면 결국 우리 역시 눈에 보이는 것만 볼 수 있는 '어떤 어른'의 현실로 흘러가게 될 것이다.


어떤 아이의 한 마디를 '틀렸어'라는 말로 규정짓지 않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이 스쳤다. 어느 날의 우리, 아니 나는 '어떤 어른'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상자 속의 양을 꿰뚫어 볼 수 있을까. 어린 시절을 기억하는 '어른'일까.


 


- 어린 왕자, 앙투안 마리 로제 드 생텍쥐페리, 김화영 옮김, 문학동네

- 당신의 어린 시절을 기억하고 있나요?


+ 어린 왕자 깊이 읽기 브런치

https://brunch.co.kr/@kamorin/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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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린 왕자(2015) 영화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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