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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캄프카 Jan 24. 2021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격차와 죽음의 이유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

톨스토이가 쓴 단편소설의 제목이다. 사람은 무엇으로 살까? 소설에서의 답을 간략히 정리하면 ‘사랑’이었다. 사람들이 유대 관계를 형성하는 기초가 사랑이라고 했다. 이를 기반으로 생각해 보면 인류가 수천 년 전부터 사회를 형성해서 살아올 수 있었던 그 연대의식의 기저에 유대감이 있고 그 유대감의 형성에 기초하는 게 사랑이라고 해석해 볼 수 있다. 다만 사회 구성의 핵심이, 인간이 살아갈 수 있게 만드는 요소가 사랑‘만’이라고 볼 수는 없다.


인간이 정착 사회를 영위하게  것은 잉여 생산물이 생기면서부터이다. ‘ ()’ 대한 고민이 사라지자 인간은 떠돌 필요가 없어졌다. 잉여 생산은 우연의 산물이 있겠지만  영향은 불가역적으로 사회와 인간의 삶을 바꿨다. 빈부의 격차가 발생했고 권력관계가 형성됐다. 권력을 차지한 사람은 여러 혜택,    권리, 권한을 누렸고 이는 그들의 명예를 높여줬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건대 사람은 물질적인 풍요로움을 위해 살아간다고  수도 있고 명예 성취를 위해 살아간다고도   있다. 이렇게 살아가기 위한 다양한 ‘무엇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욕망이 무한하기 때문이다.


욕망이라고 하면 지나치게 저속하고 세속적인 용어로 생각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욕구 충족에서 한 발 더 나가 이를 더 안전하고 확실하게 남들과는 다르게 남들보다 빠르게 충족시킬 수 있는 방법을 확보하고자 하는 행동 양식이다. 이 지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르다. 욕구가 충족된 다른 동물들은 다음 욕구가 동할 때까지 현재의 충만함을 최대한 영위하려고 한다. 사냥에 성공한 사자가 낮잠을 늘어지게 자는 것이 좋은 예다. 식량을 저축하는 동물들의 몇몇 사례가 있지만 이는 겨울철 도토리를 모으는 다람쥐처럼 자연환경적 요인 때문에 발생한 불가항력적 불안정한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자구책이다. 인간의 축적과 욕망 추구는 이와는 결이 다르다. 배가 불러도 식량을 비축하기 위해 움직이는 게 사람이다. 불가항력적 환경에 대응하기 위함이 아니라 더 큰 욕구 충족을 위해 활동을 이어간다. 이것이 욕망이다. 앞서 언급한 ‘다양한 무엇’ 자체가 욕망일 수 있다.


모든 동물은 종족의 번식이라는 욕구가 프로그래밍되어있고 이와 대척점에 서 있는 죽음은 피하도록, 그런 환경에서는 최선을 다해 벗어나려고 하도록 프로그래밍되어있다. 이른바 ‘생의 의지’를 선천적으로 지니고 있다. 다만 인간에게는 이 생의 의지가 조금 다르게 구성돼 있다. 욕망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욕망 실현의 여부, 실현 가능성의 여부, 욕망 자체의 상실이나 존재 여부에 따라 생의 의지가 좌지우지된다. 그래서 인간에게만 다른 동물들에게는 없는 자살이라는 선택지가 추가된다. 인간에게도 생의 의지는 선천적으로 탑재돼 있지만 후천적으로 상실되는 경우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자신의 삶을 포기하는 구성원들이 나온 건 빈도의 차이가 있을 뿐 현대 사회의 전유물 같은 현상은 아니다. 고대 국가를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아교’ 역할을 했던 종교들의 교리를 보면 살인이나 살생을 금지하는 것에 덧붙여 자살에도 강력한 제약을 두고 있다. 고대국가의 핵심과제 중 하나가 구성원 수를 정확히 파악하고 늘리는 것이었기 때문에 인간의 생명에 지장을 주는 행위는 철저히 제약하거나 관리를 할 필요가 있었다. 특히 자살에 한해서는 제약 일변이었다. 이는 생의 의지가 거세된 개인에 대한 관심보다는 공동체의 ‘대의’에 목적의 방점이 찍혀 있었기 때문이다. 자살의 분위기나 흐름은 번져나갈 수도 있기 때문에 공동체를 해치는 죄악처럼 취급됐고 이 기조는 현대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사회적 통념에서 벗어난 이 일탈 행위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겨우 19세기 후반에 와서였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생의 의지를 스스로 꺾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한 다양한 해석들이 나왔다. 무한하리라 여겨졌던 욕망이 유한하게 바뀌거나 소멸되는 데는 다양한 사회 구조적 요소들이 작용했다. 특히 현대에 와서는 기대 수명의 증가와 사회 불평등의 심화가 유의미한 콜라보를 이뤄냈다. 특정 소수 계층을 제외하면 다수의 노인들은 과거 시대에 비해 불안정하지만 장기화된 삶을 살아가며 그중 상당수는 빈곤한 환경에서 살아간다. 사회적 성취 가능성이 거세당하고 재사회화의 부재에서 지속되는 생은 경제력의 결핍 상황과 겹쳐져서 욕망이 상실되는 상황을 유발한다. 삶을 지속해야 할 이유가 사라지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의 삶은 ‘강제로(?)’ 연장되고 있다. 의료보험의 보장 범위는 늘어나고 보장율도 높아지는 쪽으로 가고 있다. 의료 기술은 여러 정복되지 않던 질병들을 굴복시켜 나가고 있다. 죽음은 거의 완벽하게 저지되고 있으며 방어 가능한 범주는 점점 넓어지고 있다. 죽을 수 있는 사람은 의료 기술의 손아귀에서 월등히 벗어난 범주의 질병에게 침략당했을 때뿐이다. 심지어 본인이 삶을 포기하고 싶어도 마땅한 방법이 없으며 시도를 한다고 쳐도 늦지 않게 발견되면 생환된다. 이렇게 인간은 죽음을 능수능란하게 피해 가는 법을 터득했다. 문제는 앞서 말한 것처럼 늘어난 그 생존의 시간이 ‘인간적 삶’을 보장하지 못하는 것이다.


국가가 개인의 욕망 상실 상황에 대한 대책을 ‘언급’ 하기 시작한 것은 최근의 일이다. 그간 국가의 조치들은 수치 개선을 위한 것들이었다. 수명을 늘리고, 사회적 비용을 줄이고, 경제 성장을 이루고, 절대 빈곤율을 낮추고, 사망률을 낮추는 등 가시적인 사회적 상황을 호전시키는 일에 집중했다. 그런 노력들이 빛을 보던 시기가 있었고 지금의 현대 사회,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시스템을 갖춘 사회가 완성됐다. 하지만 이제 그런 대처만으로는 부족한 시대가 됐다. 행복, 동기부여, 신뢰, 정의와 같은 형이상학적 가치들이 실제 생활에서 유의미하도록 하는 국가의 역할이 요구되고 있다. 하지만 근원적으로 국가가 그런 역할을 수행할 수 있을지에 대한 의구심이 있다.


국가는 근대 이전까지 구성원들을 도구적으로 활용했다. 초기 사회 계약론에서도 구성원들은 왕의 권력을 정당화하는 역할만 부여받았다. 근대적 헌법이 만들어지면서 국가의 권력과 시민의 권리가 균형을 맞추기 시작했다. 하지만 국가의 역할이나 기능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국가는 시민들을 최소한의 필요한 범주에서만 관리한다. 이건 권력 행사의 범위와 균형의 문제다. 근대 민주주의와 경제 시스템이 안착하면서 국가는 권력 행사를 과도하게 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으로 견제를 받는다. 이는 매우 필수적인 요소지만 국가가 근원적으로 구성원들의 문제를 해결하는데 완벽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살은 계속 사회적 이슈로 머무르고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국가마다 심각성이나 흐름은 다르지만 시스템의 완벽함이 우리보다 낫다고 평가받는 국가에서도 여전히 유의미한 수치들이 나온다.


욕망은 왜 상실되었을까? 기본적으로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물질적 결핍과 급변하는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발생한다. 또 다른 요소는 갈등이다.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다면적이고 다양한 형태로 갈등이 발생한다. 현대 사회에서 갈등의 빈도와 밀도는 점차 증가해 간다. 갈등의 실체가 욕망 사이의 충돌이고 사회의 각 개체들이 욕망을 지니고 있어서 특히 그렇다. 사회의 개체들이 개인만을 뜻하지는 않지만 갈등으로 인한 짐을 더욱 무겁게 지는 건 개인이다. 개인은 현대 사회에서 실질적으로 갈등 상황에서 제대로 보호받지 못하는 경우들이 많다. 이렇게 거의 모든 사회적 상황에서 다양한 형태의 갈등을 아주 밀도 있게 경험한 개인은 강한 스트레스에 노출되게 되는데 이게 욕망 성취의 가능성을 빼앗거나 욕망 자체를 강탈한다.


죽음에도 질이 있다. ‘개죽음’이라는 말을 보면 우리는 꽤 예전부터 죽음의 질을 평가해 왔다. ‘죽음의 질’은 죽음이 이뤄지는 상황과 1차적으로 연관이 있고 그 상황은 결국 다시 ‘삶의 질’과 관련이 된다. 그렇기에 과하게 빈곤한 삶이나 욕망이 거세된 삶처럼 물질적이나 정신적으로 비루해진 삶에서 맞이하는 죽음의 질은 높을 수가 없다. 사실 우리가 살면서 세우게 되는 여러 계획들과 목표는 궁극적으로 질 높은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전제 조건의 성격이 강하다. 높은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를 확보하려는 의도에도 그렇고 더 나가 자식의 경제력이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부모의 욕심 또한 이 욕망과 연관이 있다. 하지만 앞서도 말했듯 이 욕망을 누구나 성취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성취한 자와 못한 자의 격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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