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력은 정의로운가
한국 사회는 정돈되지 않은 사회였다. 시작부터가 그랬다. 일제 강점기를 지내면서 왕정 시대의 해체를 자발적으로 이루지 못했고 식민지배로 인해 우리의 정신적 자산, 기반을 제대로 형성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해방을 이뤄냈지만 이 해방의 과정이 거대한 세계사적 흐름 속에 있었고 때문에 자생적 시스템과 사회 이념, 집단의식 등을 형성하기 전에 다시 외세의 개입이 있었다. 민주주의도 이 와중에 그저 ‘도입’됐다. 이후에 바로 독재가 이어지면서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투쟁해서 쟁취해야 할 가치로만 인식됐을 뿐, 누리고 완성시켜야 할 가치로서는 이해가 부족했었다. 시스템의 불완전성과 집단의식의 부재는 결국 부정과 부패가 쉽게 스며들 여지를 만든다.
오랜 기간 동안 한국에서는 학연, 지연, 혈연이 없다면 사회적 성공을 성취할 수 없다는 ‘믿음’들이 있었다. 물론 개천에서 용이 나는 경우들도 있었지만 그러기 위해서는 사회적 성취에만 매몰된 삶을 살아야 가능한 일이라는 인식들이 많았다. 그리고 실제로 시스템을 무시하는 학연, 지연, 혈연 베이스의 부정한 성공 사례들이 꽤나 높은 빈도로 매스컴에 보도됐고 그보다 높은 빈도로 우리 삶 속의 경험담들로 공유가 됐다. 이렇게 만연한 불합리함들이 사회에 대한 전반적 불신을 만들었지만 한편에서는 공정함에 대한 강한 욕구를 불러일으켰다.
공정성은 사회가 건강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는 요소지만 이 공정성을 어떻게 만들어 낼 것인가로 질문을 한다면 그 구체적 방안이나 요소들이 직관적으로 다가오지는 않는 편이다. 사실 여기에 정론이라는 것은 없다. 공정한 사회를 위해서 갖춰야 할 요소들의 공통점을 추릴 수는 있겠지만 그 요소들에서 어떤 것에 가중치를 둘 것이냐는 사회 내부적으로 합의를 이뤄서 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87년 이후 형식적 민주주의가 자리를 잡고 구시대의 폐습들이 물러나면서 한국이 선택한 가중치 요소는 ‘능력’이었다. 특히 최근의 20대 층에서 이 능력에 대한 신봉 여론이 매우 강하다. 이들은 공정성에 특히 민감하게 반응하는 세대고 열렬한 능력주의의 신봉자들이다. 그들은 능력이라는 것이 본인의 노력으로 획득할 수 있고 때문에 개개인의 실력뿐만 아니라 그가 그 이전에 들인 노력까지도 평가할 수 있는 공정한 지표라고 생각한다.
능력은 어떻게 쌓을 수 있을까? 아니 그전에 능력이라는 것을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보통의 경우에 능력은 취업을 위해서나 사회적 성공, 즉 지위와 부를 얻을 때 기준이 될 수 있는 지표로 여겨진다. 전자의 경우는 소위 스펙이라고 불리는 대학 시절의 다양한 활동들과 학교 성적, 기타 자격증 등이 될 수 있을 거고 후자의 경우는 해당 분야의 전문 지식과 경력, 그리고 인적 네트워크 등을 들 수 있을 거다. 다만 후자의 조건들은 전자의 요소들을 기반으로 해서 형성할 수 있는 것들이 많기 때문에 양측의 요소들은 상호적이라고 볼 수 있다. 많은 사람들은 이 조건들이 개인의 노력으로 성취된다고 여긴다. 간혹 일상에서 ‘운칠기삼’이라는 말들을 하며 성공에는 운이 필요하다는 말도 하기는 하지만 그 운도 노력하는 자에게 찾아오는 것이고 기회를 잡는 것은 노력하는 자의 특권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능력은 단순하게 본인의 노력에 의해서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은 부모의 학력, 재력과 직간접적으로 관련성이 깊다는 연구들이 이미 많다. 부모의 학력은 아주 일찍부터 아이들의 언어 구사력과 지능에 영향을 준다고 알려져 있고 재력의 경우 직접적 연관성은 없으나 자본이 많다면 자식 교육을 위한 투자를 더 많이 할 수 있고 이것이 아이들의 학습 능력을 상승시키는 추세로 이어진다는 거다. 이것만이 아니다. 학업적 성취에는 우리가 단순히 노력이라고 치부하는 이해력, 집중력, 습득력 등이 필수적인데 이들 또한 상당 부분 물려받는 요소다. 가정에서 부모에 의해 형성된 분위기나 환경에 의해 아이의 집중력이나 이해력은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되고 이는 습득력으로 이어진다. 폭력적 가정에서 자란 아이들이 집중력 장애나 언어 장애를 겪는 경우를 보거나 반대의 환경에서 자란 아이들과 비교할 시에 지능 지수에서 차이를 보이는 경우를 보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앞서도 말했듯 많은 한국의 20대는 이전 세대보다 공정성에 민감하게 반응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한 도구로 능력주의를 신봉하는 경향을 보인다. 하지만 이게 정당화되려면 능력은 노력을 통해서만 취득 가능해야 한다.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다. 앞서도 언급했 듯 능력은 타고난 재능이나 그 개인이 속해있는 환경에 의해 결정되는 경우가 많다. 때문에 현재의 상황에서 능력주의의 논리는 승자들, 즉 경제적, 사회적 자본을 이미 소유한 기득권의 지위를 더욱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낳는다. 물론 그렇다고 능력을 통한 자원배분을 모두 불공정하다고 할 수 없다. 다만 이를 통해 얻어진 이익을 사회적으로 어떻게 다시 분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제도는 이 부분에서 취약하다. 심지어 이러한 논의가 활발하게 이뤄지지도 않는다. 때문에 결과의 불평등이 과정의 불평등을 만들고 이게 다시 결과의 불평등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적 흐름이 지속되고 있다.
한국에서는 지나치게 성공도 실패도 내제화 한다. 쉽게 이야기하면 ‘자기 탓’을 한다. 모든 실패의 원인은 본인의 능력 부족이다. 이러다 보니 분배에 대한 논의는 이뤄지지 않을 뿐 아니라 불필요한 담론이나 사회적으로 다뤄지면 안 되는, 이른바 기생적 마인드를 가진 자들의 부당한 요구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기득권층의 성취를 정당화시켜줄 뿐 아니라 이에 대한 대물림 마저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게 한다. 그리고 다수의 대중은 이런 구조의 개혁에 관심을 두기보다는 자신의 노력과 성취로 기회를 잡아 불평등의 순환에서 강자의 위치에 들고자 하는 것에 더 많은 관심을 쏟고 있다.
한국에서는 엘리트 계층의 부정과 부패가 심각하다는 인식이 있다. 반면 다른 선진국들의 경우는 이런 문제가 덜하다고도 생각한다. 그 차이의 가장 큰 원인은 권력에 대한 견제 여부다. 2016년 말의 촛불을 기점으로 한국의 기득권, 권력층이 도전을 받는 일들이 생겼다. 한국 역사상 처음 벌어졌던 일이다. 그러면서 이들의 사회 장악력이, 영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확인하게 됐다. 민주주의 기본적 원칙인 '견제받지 않은 권력은 부패한다'는 사실이 입증됐던 셈이다. 하지만 여전히 구조 개혁에 소극적인 면이 있으며 이는 우리가 사회 구조적 문제와 개인적 문제의 구분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측면에 원인이 있고 그를 통한 구조와 시스템 개혁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면도 있다. 다만 이러한 부분을 생각하기 전에 명심해야 할 점 중 하나는 이 과정은 매우 지루하고 힘들고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