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서 있는 그곳
한국은 정의로운 나라일까? 이 질문에 긍정적인 대답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을 거다. 물론 누군가는 한국이 정의로운 나라라는 점에 강한 동의를 할 수도 있다. 그리고 양쪽 모두는 각자의 논리를 가지고 있을 거다. 이를 일방적으로 틀렸다 맞았다 이야기 하기는 쉽지 않다. 정의가 매우 상대적인 개념이기 때문이다. 문화나 법률 등에 따라 사람들이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는 내용은 조금씩 다를 수밖에 없고 심지어는 본인의 경험치와 처해있는 상황에 따라서도 다르다. 그렇다면 질문을 조금 달리해 보자. 우리에게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의는 무엇인가?
얼마 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이 2년 6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판결에 대한 의견들이 갈렸다. 어떤 이들은 그 삼성의 오너가 실형을 받았다는 것에 큰 의의를 뒀다. 이 집단과의 고된 싸움을 지켜봐 온 사람이라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소회다. 한편에서는 이것으로는 충분히 정의가 서지 못했다고 말한다. 갈리는 듯한 이 의견들은 기실 모두 한국에서, 적어도 법적인 영역에서의 정의는 상대적으로 적용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우리는 이를 부정의하다고 여긴다.
부정의는 구조와 시스템의 문제다. 하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사람의 문제로 들어가야 할 필요가 있다. 구조와 시스템을 운영하는 주체가 사람이며 여기서 발생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도 사람의 힘으로 바꿔야 하기 때문이다. 이 힘이 사회에서 발휘되고 그 효과를 얻기 위해서는 사람들 간의 연결이 필요하다. 그리고 이러한 연결은 커뮤니케이션으로 형성된다. 때문에 사람들 간의 연결로 인해 굴러가는 민주주의에서 소통은 가장 핵심적인 요소다.
민주주의는 완벽을 기하거나 효율성을 극대화하는 시스템이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매우 비효율적이고 매우 불완전한 정치, 사회 시스템이다. 그렇다면 전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이 민주주의를 채택하고 사회를 운영하는 이유는 뭘까? 그 이유는 사회 구조적 오류가 발생하거나 부정이 행해질 때 민주주의가 가장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를 뿌리 뽑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를 가능케 하는 것은 사회적 합의와 정치적 결정, 즉 말이고 소통이다. 이것의 부재는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이며 이 소통을 전제로 민주주의는 그 의의를 지닌다. 한국에서 ‘소통’ 이 마치 달성해야 하는 목표처럼 정치적 구호나 사회적 캠페인으로 언급된 것은 한 참된 일이다. 그럼에도 소통의 단절 현상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 이유는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한국에서 각 개체들은 단절돼 있다. 단절은 기본적으로 사회가 여러 층위로 나뉘게 되면서 발생한다. 이런 층위는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유발하고 이는 계층 간 커뮤니케이션에 영향을 끼친다. 계층과 커뮤니케이션의 상관관계를 다룬 연구들은 많이 있다. 하지만 한국의 계층은 더욱 잔인하게 작동한다. 얼마 전 한 초등학교에서 아이들을 아파트 단지별로 구분 지어 줄을 세웠던 일이 거의 모든 뉴스의 헤드라인을 장식했다. 갑을 관계 및 갑질처럼 계층과 관련된 이슈들은 스테디셀러다. 여러 지표들로 드러나는 불평등과 계층의 분화보다 체감되는 격차는 훨씬 크다. 이 분화는 계층 간에 강력한 갈등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정도의 갈등은 상호 간에 대화의 필요성을 없애버린다. 이런 환경에 어린 시절부터 노출된 개체들은 소통을 편협하게 가져가게 되고 성장하면서도 본인들과 비슷한 그룹 내에서만 소통을 추구하도록 만든다. 이는 소통 가능한 인적 네트워크를 축소시키는 역할을 한다. 다면화되고 파편화되는 사회 구조의 보편적 변화는 이런 한국적 특성과 만나서 커뮤니케이션을 더욱 편협하게 만들고 제약한다.
소통을 제약하는 한국적 특성은 더 있다. 첨예한 정치적 갈등이 바로 그것이다. 물론 유럽에서도 2010년대에 들어오면서 유사한 갈등들이 드러나고 있다. 극우적인 이데올로기가 과거에 비해 상대적으로 영향력을 가지게 되면서 극단주의와 기존의 체제가 갈등을 빚는 것인데 하지만 한국의 것은 확실히 고유한 특성을 지니고 있다. 한국의 정치는 극단적인 갈등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이러한 현상은 정당의 지지자들 사이에서도 목격되고 있으며 이념적 근거를 두고 있지는 않다. 이 갈등은 과거 식민지배의 경험과 독재 경험에 기인하는데 이 가치를 대표하는 정치세력이 존재하며 이들에 대한 지지는 매우 높다. 이로 인한 갈등은 한국 사회 갈등 전체에서 큰 부분을 차지하는데 이런 갈등은 일상 영역에서 정치적 소통을 제거하는 역할을 하고 거기서 더 나가 가치관이 다른 개체들 간의 소통을 차단하는 역할을 한다.
소통이 단절된 개체들은 고립되었다는 감정 상황에 빠진다. 현대의 사회는 고립된 개체들에게 더 큰 시련을 선사한다. 분업화와 다단화는 개체에게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도록 강제한다. 그럼에도 전 세계적인 저성장이 원인인지 만족할 만한 금전적 이익은 보장해 주지 않는다. 이런 요소들의 조화는 삶의 불안정성을 배가한다. 인간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생존 본능을 가동하는데 이 경우에서는 극단적인 물질추구나 금전적 이익 추구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런 이익 추구는 이기적이고 편협한 양상을 띤다. 하지만 너무 당연하게도 생존이라는 타이틀을 걸고 있으니 아주 쉽게 정당화된다. 그리고 상호 간의 충돌은 더 격해진다. 이런 갈등 하에서 개체들은 타인과 사회를 나의 정당한 이익 추구를 침해하고 이를 방치하는 ‘X 같은 새끼들과 그런 새끼들로 가득 찬 사회’로 인지한다. 이런 상황에서 사회적 연대 의식이나 타인과의 커뮤니케이션은 불필요함을 넘어서서 특정 상황에서는 추구해서는 안 되는 행위나 가치가 된다.
앞서도 언급했 듯, 코로나 사태 이전에 유럽에서 회자되던 이슈 중 하나는 극단주의의 득세와 이에 따른 반목과 갈등이었다. 이러한 현상을 분석한 이야기들 중에서 핵심에 해당하는 부분들이 단절과 고립이었다. 어느 사회에서도 소통이 단절되고 고립이 심화되면 비슷한 현상들이 나타날 수 있다. 사실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다. 소통의 단절은 연대의 파괴로, 연대의 파괴는 사회 정의를 위한 최소한의 합의점을 찾거나 정의의 기준을 세우는 것을 불가능하게 한다. 우리에게 정의를 판단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우리의 정의는 무엇인가? 이 질문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소통을 시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