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하고 싶다. 행복하세요. 행복을 추구하세요. 요즘은 행복 홍수의 시대다. 행복이 시대의 화두다. 이 화두를 전달하는 ‘멘토’들은 행복이 마음먹기에 달렸다고들 한다. 허나 이는 허무맹랑한 소리가 아닐까 한다. 사람은 환경의 지배에서, 적어도 큰 틀에서는 절대 벗어나지 못한다. 그리고 후술 할 이유로 인간은 근원적으로 행복한 삶을 ‘영위’할 수 없다.
내가 어렸을 때 사람들은 행복이라는 가치에 그리 큰 의미를 두지 않았던 것 같다. 지금으로부터 대략 30여 년 전이다. 그때는 행복이라는 말을 일상에서 그리 자주 쓰지도 않았다. 더군다나 행복한 삶을 사는 게 목표라니, 당치도 않았다. 당시는 ‘실존’의 시대였고 ‘생존’의 시대였다. 추상이나 관념은 실익이 없는 무용한 가치를 지닌 개념들이었다. 행복은 여기에 속하는 가치였다. 물론 지금도 이 기조는 일정 정도 유지되고 있지만 앞서 말했듯 그래도 요즘 행복은 약간의 지위를 획득해 가고 있다. 행복을 누리지 못하는 사회가 되어 행복 담론이 커진 것일 수도 있지만 반대로 행복 담론의 거대화로 행복에 대한 집착이 커지는 느낌이다.
과거에 행복이라는 용어가 덜 쓰이고 평가 절하하는 태도들이 있었던 이유는 행복이라는 게 실제적 이익과 형태를 갖추면 당연히 따라오는 것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사회적 성공이나 물질적 성취를 하면 행복해진다는 단순 도식이 받아들여지던 시대였고 그래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하면 일의 선후를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는 아직 덜 성숙한 사람 취급을 받았던 것이다. 이 직전의 한국 사회라는 것은 아직 가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시기였기 때문에 성공에 더 큰 방점이 찍히던 분위기도 있었고 역설적으로 당시의 고도성장에 맞물려 사회적 성공이든 물질적 성취든 노력을 경주하면 충분히 달성 가능한 목표치였다는 점도 행복이 뒷전으로 밀리는 이유였다.
반면 현재의 상황은 당시보다는 훨씬 복잡 다단해졌기 때문에 단순한 도식은 성립되지 않는다. 가끔은 성취가 그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상실한 가치만 못한 경우도 있다. 더군다나 그 성취를 얻는 게 과거에 비하면 비교할 수 없이 어려워졌다. 내 노력과 비례해서 성취가 따라오지 못한다. 때문에 격차가 발생하고 여기서 ‘승자’가 못되면 스트레스와 정신적 물질적 고통이 발생한다. 반대로 승자가 되더라도 승자가 되기 위해 상실하게 되는 것들이 작지 않기 때문에 만족도가 과거에 비해서는 극히 떨어지면서 이게 전부가 아니라는 생각에 빠진다. 그렇게 되면서 삶에 대한 근본적 성찰들이 주목받고 그런 삶을 채워주는 요소를 행복이라는 추상적 관념으로 들고 나오는 느낌이다.
행복: 생활에서 충분한 만족과 기쁨을 느끼어 흐뭇함. 또는 그러한 상태
- 표준국어대사전 (네이버) -
행복은 기쁨을 느끼는 감정 상태다. 기쁨은 자연스럽게 발생하지 않는다. 외부에서 들어오거나 외부에 위치한 긍정적 사건이나 존재에 의해서 발생할 수 있다. 때문에 내가 스스로 조절할 수 있는 범주에서 벗어난다. 더군다나 앞서 말했듯 어떠한 성취가 (여기서 성취를 물질적 소유로만 보지 말자. 더 넓은 의미로 예를 들어 인간관계를 형성하거나 하는 행위도 성취의 항목에 들어갈 수 있다) 더더욱 힘들어진 현대의 사회에서는 긍정적 자극을 받는 것이 힘들어졌다. 때문에 행복을 얻으려면 성취에 집중하는 것보다는 만족으로 방향을 틀어야 한다고들 말한다.
하지만 성취와 만족은 아주 다른 성향을 가지고 있다. 성취는 달려 나가는 삶의 자세라면 만족은 특정 지점에 머무르는 태도다. 양립할 수 없다. 현대 사회는 성취를 반강제 하는 사회다. 그 시스템 자체에서 벗어나지 않는 한 멈출 수 없다. 때문에 행복을 위해 만족하는 삶을 살라고 말하는 조언들은 모두 실없는 소리에 불과하다. 가능하지 않은 대안을 제시하며 자신들의 밥벌이를 하는 사기꾼들에 불과하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것이 그렇듯 이런 사기 또한 큰돈이 오고 가는 거대한 산업이 돼 버렸다.
멈춤을 설파하는 게 사기라고 하는 이유 중 더 큰 부분은 멈춘다고 해서 행복이 오지 않는다는 점이다. 행복은 일시적인 기분 상태다. 인간이 지속적 행복 상태를 만들 수 있는 방법은 마약과 같은 약물의 도움을 받을 때뿐이다. 인간의 신체는 끊임없이 변하기 때문에 충분함을 느끼는 상태를 유지할 수 없고 기쁨은 인간의 뇌가 자체적으로 일정 정도 거른다. 지나친 고통도 필터링되지만 지속적인 고양감도 인간의 뇌는 거부한다. 어떤 기쁜 일도 쉽게 무뎌지는 게 그 이유다. 때문에 행복한 삶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두 단어의 결합과 같다. 행복은 선으로써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점의 형태로 찍혔다가 사라진다.
반면 고통은 우리에게 민감하게 다가온다. 이는 생존의 산물이다. 고통에 둔감하면 죽을 가능성이 높다. 때문에 우리의 뇌는 큰 고통의 일부를 필터링할지언정 고통 자체를 느끼는 것에는 민감하다. 삶이 고통스러운 건 나의 생각이나 인식이 잘못돼서가 아니다. 사회 구조적 문제들도 있지만 인간 자체가 그렇게 생겨 먹었다. 불교에서 생이 고라고 이야기하는 이유가 있다. 삶은 단언컨대 거지 같다.
고통의 원인을 찾을 필요가 있다. 삶이 거지 같은 이유를 찾는 거다. 이건 생각보다 쉽지 않은 작업이다. 삶은 매우 복잡한 방정식으로 구성된 함수고 모든 변수를 우리가 파악해서 현실을 인지하는 일은 벌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대한 인과관계를 파악하는 일은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있고 이 작업은 일부분 고통을 이해하고 피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준다. 다만 고통을 제거하거나 완전히 회피하는 일은 불가능하고 한 고통을 넘기더라도 곧 다른 고통이 우리를 덮칠 것이기 때문에 그걸 바라는 것은 무의미하다.
물론 인생이 고통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라는 걸 인정한다고 더 나아지는 것은 없다. 단지 행복한 삶이라는 신기루를 향해 허우적대는 삶보다는 더 품위를 지킬 수 있다. 그리고 버티기가 더 쉬워진다. 예측하지 못하고 맞으면 쓰러지지만 알고 맞으면 버틸 수 있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행복은 그 버티는 과정 중에 중간중간 피어나는 눈꽃송이 같은 존재다. 우연한 결과물이고 형성물이 아니다. 여기에 영원함을 기대한다고? 세 살 먹은 어린애 만도 못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