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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헌 간호윤 Oct 14. 2021

과유불급(過猶不及), 그 틈(闖)의 미학

‘지나침’은 ‘모자람’을 채우려다 일어난 소치


<과유불급(過猶不及), 그 틈(闖)의 미학> 


‘지나침은 모자람과 같다’ 과유불급 넉 자가 생각났다.


내가 머무르던 방에 화재가 난 적이 있었다. 난로에 장작을 많이 넣은 것이 화근이었다. 달아오른 난로의 열기가 벽체를 타고 올랐다.  ‘잠시 수고로움을 덜자고 그랬구나. ‘아하! 몇 번에 걸쳐 넣을 장작을 한 번에 넣었구나.’ 이미 후회해도 도리가 없는 일이었다. 


‘지나침’은 ‘모자람’을 채우려다 일어난 소치이니, '조금 더'가 만들어 낸 욕심의 결과이다. 이 욕심에 인간으로서의 생득적(生得的) 결함 운운은 하지 말아야겠다. 인간으로서 생득적 결함이든 무엇이든 간에 그것은 욕심의 지나침이 빚은 과유불급임에 틀림없다.  


어디 이것이 비단 난로에 장작 집어넣는 것에 그치랴. 가만 생각해보니 사람과 사람이 만나는 일도 과유불급이란 넉 자를 새김질 해두어야 한다. 내가 그 사람을 사랑한다고 모든 것을 소유해야 한다고 우긴다면 결과는 화재 진압 정도로 끝나지 않는다. 과유불급의 결과는 두 사람을 갈라놓는 것에 그치지 않고 서로의 행복도 앗아가 버린다.  


연암 선생은 그래 ‘틈’을 들었다. 연암 선생은 <마장전>에서 "천지사물이 제 각각이기에 반드시 틈이 있게 마련’이라며, “한 번 틈이 벌어지면, 아무도 그 틈을 어떻게 할 수가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사랑스러운 것도 틈타서 결합되며, 고자질도 그 틈을 이용해서 벌어지게 만든다. 그러므로 남을 잘 사귀는 자는 먼저 그 틈을 잘 타야 한다. 남을 잘 사귀지 못하는 자는 틈을 탈 줄 모른다."라 하였다. 모든 인정물태에 내재한 ‘틈의 역학’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 사람과 사물 사이엔 모두 이렇듯 틈이 있다. 그것은 동서남북의 틈도 서울과 부산의 틈도 아니다. 연암 선생의 말처럼 “둘이서 무릎을 맞대고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해서 '서로 밀접하다'고 말할 수 없고, 어깨를 치며 소매를 붙잡았다고 해서 '서로 합쳤다'고 말할 수도 없다.” 그 사이에 틈이 있기 때문이다. 


화재로 인한 ‘과유불급’ 넉 자에서 연암 선생의 ‘틈의 역학’을 조금이나마 알았다. 너무 멀어도 안 되지만 틈이 너무 가까워서도 안 된다. 더욱이 지나침은 아예 틈을 지나친 경우이니 모자람만 못하다..  


이젠 내가 머무르던 이 방을 나서야 한다. 그러나 생득적 결함이 있기에 ‘과유불급’과 ‘틈의 역학’을 내 깜냥으로 감당할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후회하고 후회하며,  ‘과유불급’과 ‘틈의 역학’을 되새김질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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