찢어진 막사 틈으로 허연 별무리가 보이더니 이내 잔눈발이 날렸다. 압록강변의 추위는 살점이 떨어져 나갈 정도였다. 달님이는 지독한 추위에 온 몸이 저렸다. 꽃님이는 그런 달님이 허리를 꼭 끌어안고 된바람 맞는 문풍지처럼 떨었다.
끌려 온 지 벌써 얼마가 지났는지도 모르겠지만 길에서 새해를 맞은 것은 확실하였다. 몽고군에게 끌려가는 여인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달빛과 별빛을 베고 잠들었다. 요즈음은 몽고군도 추운지 임시 막사를 얼기설기 쳤지만 겨울철, 이 나라에서 가장 큰 압록강의 한기를 막아내지 못하였다. 서로를 끌어안고 밤을 새우는 수밖에 없다. 오리의 머리 빛깔 같은 강물은 이미 얼음으로 덮였다. 내일 날이 밝으면 저 강을 건넌다.
“내 비녀! 내 비녀!”
꽃님이는 며칠 전부터 더 저렇게 비녀를 찾아대며 잠 덧을 심히 하여 달님이를 깨우곤 했다. 그럴 때마다 달님이는 제 몸도 불덩이지만 하릴없이 꼭 안아주는 수밖에 없었다. 이마저도 오늘이 마지막이 될듯하였다. 그렇게 피하였건만 올 것이 오고야 말았다. 며칠 전부터 달님이와 눈길이 마주치던 누린내를 풍기는 몽고 장수놈이 오늘 저녁에 밤시중을 들라고 하였다.
내일이면 저희들 나라로 들어가서인지 오늘은 술판이 꽤 길게 이어졌다.
“내 비녀! 내 비녀!”
또 한번 꽃님이는 진저리를 치며 비녀를 찾아댔다.
돌이가 떠난 뒤로 꽃님이는 늘 그 부러진 비녀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그러던 비녀를 몽고놈들에게 붙잡혀 올 때 방에다 떨어뜨리고 왔다. 몽고놈들이 떡전거리에 들이 닥쳤을 때 달님이는 꽃님이네 집에서 옷을 깁고 있다가 함께 붙잡혔다.
돌이와 곰이가 떠나고, 얼마 있다가 죽이 아저씨의 광대패도 충청 어디론가 떠난 작년 가을이었다. 몽고군이 떡전거리로 쳐들어와 모조리 불태워버렸다. 달님이와 꽃님이는 몽고군에 잡혀 북으로 북으로 지금껏 끌려왔다.
떡전거리에 들어 온 몽고군은 닥치는 대로 불을 지르고 사람들을 죽였다. 그러더니 세 패로 나뉘었다. 일부는 남자들이 도망간 산으로 쫓아갔고 일부는 달님이 엄니 또래의 아낙들을 모두 우물둥치 옆의 밭으로 끌고 갔다. 또 다른 한 패의 몽고군은 달님이와 같이 젊은 여자만을 데리고 읍성 안으로 들어갔다. 달님이 엄니와 달님이는 그렇게 맥없이 헤어지고 말았고 이제는 서로의 생사도 몰랐다.
그때 읍성 안에는 이미 다른 곳에서 몽고군에게 끌려온 여인들로 가득했고 모두 달님이 또래였다. 그 수는 어찌나 많은 지, 달님이가 아는 셈으로는 모두 헤아릴 수조차 없었지만, 지금은 그 수도 퍽 많이 줄었다. 몽고놈들의 능욕을 참다못해 목숨을 끊은 여인들이 반이라면, 반은 여인의 몸으로 천릿길을 걷다가 벼슬아치 집에 그렇게 많다는 백목련꽃 떨어지듯 슬프게 죽어갔다. 목련꽃은 잎보다 꽃을 먼저 피운다. 꽃이 져야만 잎이 난다. 앞뒤가 바뀌어서인지 꽃이 피는 날이 곧 지는 날이다. 벙그는 새하얀 목련꽃 봉오리는 꼭 순결하고 아리따운 처녀 같지만 일찍 지고 만다. 바짝 말라 마른 갈색으로 땅에 뒹구는 꽃잎은 참으로 슬프다. 달님이는 제 신세나 내 신세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아직도 앞으로 뒤로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이다. 달님이는 꽃님이 언니만은 놓치지 않았다. 달님이는 꽃님이 언니를 놓치기라도 하는 날이면 돌이도 곰이 언니도 엄니도 다시는 만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몽고군은 낮에 눈여겨 보아두었던 여인들을 밤마다 갈아들였다. 달님이는 틈만 나면 꽃님이와 제 얼굴에 흙을 묻히고 되도록 몽고군의 눈에 띄지 않게 행동하였지만 도리가 없었다.
다른 날이면 잠자리에 들 시간인데 오늘은 술자리가 길어서인지 밖은 여전히 소란하다. 어차피 능욕을 당했다면 벌써 죽은 목숨이었다. 달님이 없이는 꽃님이도 며칠을 넘기지 못할지도 모른다. 북으로 끌려오면서 그래도 다행인 것은 꽃님이의 정신이 조금은 돌아 왔고 달님이보다도 오히려 몸은 더 건강하였다.
달님이는 낮에 눈길을 주던 몽고놈을 상대해야한다는 생각을 하자, 그렇잖아도 추위로 잔뜩 옹그린 몸이 자지러지게 놀란다. 이마를 짚어보니 어스름저녁 무렵보다도 열이 더 오르고 땀기까지 촉촉하다. 언제부터인가 생각나지도 않았던 돌이의 얼굴이 오늘은 또렷이 떠오른다. ‘돌아!’ 가만히 속으로 돌이의 이름을 불러본다. 어차피 죽은 목숨이다. 여러 차례 도망칠 기회를 엿보았지만 기회를 찾지 못 하고 여기까지 오고야 말았다. 이젠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이래 죽나 저래 죽나, 가로 지나 세로 지나 죽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달님이는 꽃님이를 살며시 깨웠다.
“꽃님이 언니! 꽃님이 언니!”
다행이도 꽃님이는 금방 눈을 떴다. 입가에 손을 갖다 대고 눈을 깜짝이고는 꽃님이 언니 손을 잔뜩 움켜쥐었다. 심장은 중이 법고 치듯, 두 방망이질을 치고 조비비었다.
꽃님이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아는 듯이 작은 손아귀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도망을 치려면 낮에 보아둔 압록강변의 갈대 기슭으로 들어가야 한다. 언젠가부터 길에서 주워 허리끈에 숨겨 넣어 둔 작은 칼 조각으로 막사의 뒤를 찢었다. 막사 천막은 의외로 쉽게 찢어졌다. 생각대로 여기저기 술판을 벌리느라 막사 뒤에 보초병은 없었다. 보름인가보다. 달은 휘황한데 박꽃처럼 하얀 별빛이 소나기처럼 쏟아진다. 먼저 꽃님이를 내보내고 달님이가 손어름으로 땅을 짚으며 뒤따라 나왔을 때다.
누군가 막사 뒤로 오는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달님이는 겁결에 꽃님이 입을 막고 돌아섰으나 이미 발자국 소리는 뒤에서 멈췄다. 달님이는 오금이 풀리고 눈앞이 캄캄하여 꽃님이를 안고는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거친 손아귀가 달님이의 목덜미를 쥐었다. 달님이는 온힘을 다 하여 칼 조각을 쥔 손에 힘을 주어 휘두르며 일어섰다. 엉겁결에 한 발짝 물러서며 히죽 웃는 몽고군은 하필이면 낮에 눈길을 주던 그놈이었다. 놈은 다른 병사들을 부르지 않았다. 달님이가 잼처 칼 조각을 움켜쥐고는 놈의 웃는 얼굴을 향해 힘껏 내저었다.
그러나 칼 조각이 허공에 하얀 달빛만 흩뿌려 놓았을 뿐이었다. 놈의 표정이 바뀌고 달님이의 손에서 칼 조각은 힘없이 떨어졌다. 어느새 뽑은 놈의 칼끝은 초닷새 달 그늘처럼 싸늘하게 달님이의 옷고름을 향했다.
달님이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엔 달과 별이 소금꽃처럼 활짝 피더니 배추나비처럼 달님이의 몸으로 훨훨 날아 들어왔다. 봄날 어름조각이 서럽게 햇살을 받으며 스러지듯. 별빛도 쏟아져 날아들었다. 달님이는 눈을 감았다. 달도, 별도, 하늘도, 어둠뿐이다. 이제 모든 것이 끝이다. 돌이가, 엄니가, 떡전거리가, …어둠속으로 지나갔다. 삶의 끈을 여기서 놓는다는 것이 그렇지만, 혀를 깨물기만 하면 된다고 달님이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어! 죽이…아저씨!…”
꽃님이의 낮은 외침이 달님이의 귀에 들렸다. 달님이가 눈을 떴을 때, 하얀 달빛에 놈의 뒤에 또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순간, 놈의 얼굴이 손으로 가려졌는가 싶더니 목 줄기에 한 줄기 섬광이 지난 자리를 따라 검은 물줄기가 하얀 달빛을 받으며 허공에 줄을 그었다.
달님이의 눈에 죽이 아저씨가 어룽거렸다. 죽이 아저씨는 조용히 손을 입에 갖다 대었다.
“역시! 달님이가 보통은 아니구나.”
죽이 아저씨는 아무 일 없다는 듯 놈의 시체를 끌어 옆 도랑에 놓고는 싱긋이 웃으며 달님이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러고는 “잠깐만 기다리거라” 귀엣말을 하고는 여러 막사 뒤를 여기 저기 찢어 놓았다.
“이 정도면 됐겠지. 가자!”
죽이 아저씨는 꽃님이와 달님이를 양 손에 갈라 잡고 갈대숲으로 조용히 들어갔다. 강을 따라 오 리는 실히 왔을 때쯤 다른 처녀들도 찢어진 막사 틈으로 나왔는지 여기저기 횃불이 비치고 소리가 요란하였다.
달님이는 긴장이 풀려서인지 몸이 덜덜 떨리고 정신도 몽롱해졌다. 죽이 아저씨가 그런 달님이의 모습을 보고는 잠시만 쉬었다 가자고 하였다.
그러고는 꽃님이의 손을 가만히 끌어당겨서는 얼굴을 찬찬히 뜯어보는 듯했다. 달님이는 죽이 아저씨 눈에서 분명 달빛이 반짝이는 것을 보았다. 잠시 뒤, 죽이 아저씨는 허리춤에서 무엇인가 꺼내서 꽃님이의 손에 쥐어 주었다.
“꽃님아! 다시는 잃어버리지 마라.”
“아! 내 비녀.”
꽃님이 말처럼 비녀는 분명한데, 한 개가 아닌 부러진 비녀가 두 개였다. 죽이 아저씨는 멍하니 쳐다보고 있는 달님이에게 말했다.
“달님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나는 며칠 전부터 이곳에 와 너희를 기다렸다. 나는…”
순간, 죽이 아저씨의 말소리는 몽고놈들의 소리에 묻혔다. 소리 나는 쪽을 돌아보니 훤한 달빛으로 마치 소금을 뿌려놓은 듯한 갈대밭 저쪽에 어느 틈에 쫒아 왔는지 몽고 군사 여러 놈이 먼발치로 보였을 때였다.
“쉭!”
어느 놈이 활시위를 당겼는지 눈발과 달빛을 뚫고 화살 하나가 꽃님이 가슴팍으로 날아들었다. 달님이의 외마디 소리와 화살 꽂히는 소리가 동시에 밤하늘을 짧게 갈랐다.
“아!”
“퍽!”
화살은 어느새 꽃님이를 감싸안은 죽이 아저씨의 등에 꽂혔다.
그러나 죽이 아저씨는 이미 생각이나 하고 있었던 듯 조금도 당황한 빛이 없었다.
“달님아! 시간이 없어 이야기를 다 못하겠구나. 이대로 함께 갈 수도 없고. 내가 저놈들을 유인할 테니 너는 강을 따라 죽 내려가라. 그러면 중씰한 두 사람이 배를 대고 있을 게다. 그들이 너희를 안전한 곳으로 데려다 줄 테니 걱정 말아라. 달님아! 꽃님이를 잘 챙겨주기 바란다. 내가 살아 있으면 곧 만나게 될 것이지만. 만약 안 오면. 아니다! 다 운명인 것을. 연연하여 무엇 하겠니. 이제까지도 잘 살았거늘…, 너희들만 무사하면 됐지. 어서 가라.”
죽이 아저씨의 음성은 낮았지만 단호했다. 순간 죽이 아저씨 눈에 맑은 달빛이 다시 내려앉았다. 죽이 아저씨는 잠시 꽃님이를 보는가 싶더니 와락 끌어안았다.
“고맙다! 꽃님아! 그러면 그렇지, 내 이미 짐작하였다만.”
그리고는 알 듯 모를 듯한 말을 하며 달님이 손을 끌어 꽃님이 손에 쥐어 주었다.
“달님아! 꽃님이 잘 부탁한다.”
달님이가 무어라 말할 틈도 없이 죽이 아저씨가 갈대를 헤치며 냅다 몽고군들 쪽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놈들! 여기다! 내가 고려인 죽이다!”
달밤 차디찬 허공으로 죽이 아저씨의 음성이 차갑고도 무겁게 튀어 올랐다. 바짝 얼어붙은 겨울밤을 깨는 우렁찬 소리였다. 거의 동시에 몽고군 들의 외마디 소리와 아우성이 달님이의 귀에 들렸다.
달님이는 꽃님이의 손을 잡고 달빛 아룽거리는 강가를 따라 아래로 뛰기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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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뒤 달님와 꽃님이는 죽이 아저씨가 말하는 뱃사람을 만났고, 그 배를 타고 이 강화도의 김준의 집으로 들어와 기생이 되었다. 김준은 죽이 아저씨가 오지 않는다며 달님이와 꽃님이가 노비로 살든지, 아니면 달님이에게 기생이 되라고 강요하였다. 죽이 아저씨에게 배와 사람을 빌려 주었으나 오지 않으니 달님이에게 그 값을 치르라고 한 것이었다. 달님이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강화도는 딴 세상이었다. 여인들은 대단히 비싼 중국산 비단 옷을 입었고 사치스런 치장으로 몸을 감쌌다. 저고리 위에 치마를 입고 그 위에 소매 없는 반비라는 겉옷을 걸쳤다. 허리에는 오색 비단끈에 맵시 있게 쟁그랑거리는 금방울을 달아 꾸몄고 비단으로 만든 향주머니도 찼다. 얼굴에는 미인수를 바르고 분가루를 칠하고 머리에는 다리라는 가발도 얹었다. 이 다리는 백정들의 머리카락을 모아 만들었다. 저 다리는 부역 나간 남편의 식량을 대기 위해, 혹은 식구들의 곯은 뱃속을 위해 잘라 판 머리였다. 이 머리에 비단으로 만든 몽수라는 검은색 너울을 썼다. 아이들은 단단한 강엿을 입에 달고 살며 끼니때마다 감주도 먹었다.
백정들의 남루한 삶은 제 몸조차 가리기 어려웠다. 하루에 한 끼조차 때 꺼리를 찾지 못해 배를 곯는데 권세가들은 하루에도 연화무늬나 학이 그려진 비취색의 청자에 담아 만금어치를 먹어치웠다. 여기저기 그득히 온갖 맛난 음식을 차려놓고 하인들도 술에 취해 비단요에 토악질을 해 놓고 말이나 개들조차 살이 피둥피둥 쪘다.
벌써 한 해가 지나 그맘때가 되었다.
참 길고도 무서운 밤이었다. 달님이는 ‘그날도 희읍스름한 달빛이 저렇게 밝았지’하며 긴 한 숨을 들이쉬었다.
어느새 나왔는지 꽃님이가 달님이 손을 꼭 잡고 한 손에 비녀를 내보이며 쳐다보았다.
“죽이 아저씨는?”
그날 이후로 꽃님이는 비녀를 손에 꼭 움켜쥐고 다니며 혼잣말처럼 죽이 아저씨를 찾았다.
그러나 죽이 아저씨는 지금껏 오지 않는다. 달님이는 꽃님이에게 준 부러진 비녀 두 개는 무엇을 말하는지 궁금하였다. 무어라 글자가 적혀 있었지만 달님이는 글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달님이는 가만히 생각해 보니 오늘 배운 노래가 제 신세와 다를 바 없었다. 떡전거리에서 정월을 보내고 달래꽃지짐을 해먹고 수릿날엔 엄니가 익모초 삶은 물을 억지로 먹여 여름 더위를 막으려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아! 돌이는 지금쯤 어디서 무엇을 하고 지낼까? 또 곰이 언니와 엄니는 어디에 있는지? 아니 모두 살아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달님이의 생각은 끝 가는 줄 몰랐다.
달님이는 내일이면 기생으로 이 노래를 불러야한다. <동동>이라는 노래인데 ‘동동’은 북소리이다.
덕은 뒤에 바치옵고, 복은 앞에 바치옵고
덕이여 복이여 하는 것을 바치러 오시어요.
달님이가 알던 속요에는 없는 노랫말이었다. 원래 이 노래는 다달이 노랫말을 붙인 달거리체이다. 팔관희의 백희가무를 위해서 궁에서 바꾸어버렸다. 원래 달거리체는 그 옛날부터 불려 왔다하니 오래되긴 꽤 오랜 노래기에 이 땅에 사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안다. ‘동동’이란 북소리는 심장과 맥이 뛰듯, 사람들의 온 몸을 자극하고 생기를 넣어주었다. 오늘 기생어미는 이 노래를 달님이에게 가르치며 궁중에선 아박춤이라고 불린다고 했다. 그러니 전처럼 부르지 말고 우아하게 불러야 한다고 꽤나 구박을 주었다.
정월 냇물은 아아! 얼고자 녹고자 하는데
세상 가운데 태어난 내 몸은 홀로 지내지요.
2월 보름에 님의 모습은 높이 켜 놓은 등불 같고요.
만인을 비추실 모습이시어요.
3월 지나며 핀 아아! 늦은 봄 달래꽃이여
남이 부러워할 모습을 지니고 나셨어요.
4월을 아니 잊으시고 오신 꾀꼬리 새여
무슨 일로 임은 옛날의 나를 잊으셨는지요.
5월 5일 수릿날 아침 약은
천년을 길게 사실 약이라 바치어요.
6월 보름에 벼랑에 버린 빗과 같은 신세여
돌아보실 임을 조금이나마 뒤따르고 싶어요.
7월 보름에 백가지 음식을 진열하여 두고
임과 함께 살아가고자 하는 소원을 빌어요.
8월 보름은 한가위 날이지마는
님을 모시고 지내야만 오늘이 진짜 한가위 날이어요.
“음, 음”
목이 막힌다. 늘 흥겹게 부르던 노래였다. 목소리를 낮추어 입술만 달싹이며 우아하게 부르자니 흥이 날 리도 없다. 그래도 2월의 달놀이, 5월의 단오놀이, 6월의 유두놀이, 7월의 중원놀이까지는 별고 없이 넘어갔으나 또 8월의 한가위놀이에 와서 목소리가 걸렸다. 달님이는 연습 중에도 몇 번이나 이 8월의 노래에서 틀려 기생어미에게 잔소리깨나 들었다.
달님이는 ‘오월 농부 팔월 신선이라던데---’ 라고 혼잣말을 하고는 3-4월이면 화전놀이를 하고 농악을 치던 떡전거리를 떠올렸다. 그때는 꽹과리와 북, 징, 장구만 있어도 마을 사람들은 덩더쿵 흥을 냈었다.
기생어미는 궁궐에선 피리・소금・대금・해금・아쟁・장구・북・박과 같이 합동으로 연주해야 한다며 매몰차게 눈을 흘겼다. 달님이는 ‘백정들의 삶은 고단하기만 한데, 백정들이 살기위해 부르는 노래는 참 호사한다’는 생각이 들어 잠시 동안 멍하니 벽만 바라보았다.
9월 9일 중양절에 약이라고 먹는 국화
꽃이 집안으로 드니 계절이 깊어만 가요.
10월에 잘게 썬 보리수나무 같은 내 신세여
꺾어버린 후에 이것을 지니실 한 분이 없어요.
11월 살고 있는 토방 자리에 한삼을 덮고 누워
고운 이를 놔두고 따로 지내 슬픈 일이어요.
12월 분지(산초)나무로 깎은 소반 위에 있는 젓가락 같은 내 신세여
임의 앞에 들어 사랑을 보이니 엉뚱한 손님이 젓가락을 쓰네요. <동동>
달님이는 겨우 노래를 끝마쳤다. 자신의 신세가 그야말로 꺾어진 보리수요, 벼랑에 버려진 빗이요, 소반 위의 젓가락 같았다. 동지섣달 추위라지만 돌이가 있다면 여름에 입는 한삼을 덥고 누운들 어떻겠는가마는 지금은 살아있는지조차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