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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카나 Oct 07. 2019

버틸 힘이 되어주는 장면들

오래 만났던 전 남자친구는 앳된 외모와는 달리 의외로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런 그 사람이 가끔 솔직하게 감정을 드러낼 때가 있는데, 그럴때면 내 마음은 순식간에 녹아내려 그 사람을 향한 애정만 남게 되었다.


함께 있을때 나는 늘 잠들기전 책 읽어주기/ 읽어주는 책 듣기를 좋아했다.

그 사람은 별로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가끔 내킬 때는 책을 읽어주었다.

조용하고 하늘이 잘 보였던 그 동네에서 함께 도서관으로 가서 각자 읽고 싶은 책을 골라 빌렸다.

그리고 북한산 밑의 기울어진 작은 원룸에서 때때로 서로의 책을 한 챕터씩 읽어주곤 했다.


그 사람은 듣는 것보다 차라리 읽어주는 걸 더 좋아했었다.

그 날 읽었던 책은 내가 빌렸던 오가와 이토의 옴니버스 단편 소설집이었다.

나는 옆으로 눕고 그 사람은 침대에 앉아 책을 읽어 주었다.

어린 소녀가 맛있다 생각하던 빙수를 할머니에게 가져다주는 과정을 세세하게 그린 내용이었다.

후지산을 닮은 빙수를, 치매로 입원한 사랑하는 할머니에게.

소녀는 온갖 애를 쓰고 드디어 할머니에게 빙수를 건넨다. 그리고 마침내 할머니가 빙수를 한 입 떠 드신다.


그리고 이어질 내용을 기다리고 있는데 읽어주던 목소리가 끊겨 버렸다.

스탠드불을 비춰 그 사람을 보니 세상에나, 울고 있었다.

순간 그 사람의 존재에 대한 엄청난 사랑을 느꼈었다.

나는 마구 웃으며 그 사람을 안아주었다.

우리 둘은 웃으면서 또 울었었다. 

나중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꼭 오늘밤의 에피소드를 말해줘야겠다고 했더니 그런 얘기는 영원히 묻어 두자고 멋쩍어하고 부끄러워 했다. 사랑스러운 밤이었다.



이 그림은 다른 날 그의 머리를 안아주었을 때의 우리 모습을 거울로 보고 스케치하다가 떠올라서 그렸었다.




그 후에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할 일이 더 많았지만 그 기억 하나로 나는 버틸수가 있었다.

지금은 비록 헤어져 각자 다른 삶을 살지만 그런 따뜻한 기억을 만들어준 그 사람에게 나는 아직도 감사하다.


그리고 나는 그 사람에게 그런 소중한 기억 하나 만들어 준 적이 있었을까 생각해도 잘 기억이 나지 않아 마음이 아프다. 










엄마가 하는 아버지에 대한 말은 99퍼센트, 아니 99.9퍼센트가 원망과 욕이다.

그리고 남은 0.1퍼센트가 바로 그 기억이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엄마가 수술을 하고 아팠던 적이 있었다.

심각한 수술은 아니었기에 엄마는 작은 방에 누워 쉬고 아버지가 우리 남매의 식사를 챙겨 주셨다.


그 날의 메뉴는 엄마가 전날 미리 끓여 둔 미역국에 밥, 깍두기였다.

엄마를 제외한 우리 세 가족은 낮은 상을 펴고 주방이자 거실에 둘러앉아 밥을 먹었다.

철 없던 나에게 그 날은 이상하게 밥이 맛있었다. 

미역국도 깍두기도 쑥쑥 들어갔다.

오빠와 내가 밥을 더 덜어서 냠냠 먹고 있는데 갑자기 눈앞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아버지가 밥을 드시다 말고 울고 계셨다.

조용히 눈물이 또르르도 아니고 감정이 복받쳐 흑흑 울고 계셨다.

오빠와 나는 멍하니 아버지를 바라봤고 아버지는 화장실로 잠깐 자리를 비웠던 것 같다.


엄마 방문을 끼익 열고 아버지 운다고 알려주자, 엄마는 아픈 와중에도 감동한 것 같았다.

그리고 엄마의 인생에서 그 기억은 꼭 한번 뿐인 엄마를 위해 아버지가 운 날이 되었다.

아직까지도 가끔 엄마와 나는 그 얘기를 나눈다. 


엄마는 그 얘기를 할 때만큼은 웃으신다.












내게 두고두고 마음 아프게 하는 영화 장면이 두가지 있는데 그 두 편 모두 이안 감독의 영화다.

그 아픔은 날카롭지 않고 오히려 뭉뚝한데도 시간이 지날수록 깊이 스민다.


한 장면은 브로크백 마운틴에서, 에니스가 피묻은 셔츠들을 뒤늦게 발견하고 그것들을 가만히 안고 우는 장면.


다른 한 장면은 라이프 오브 파이에서, 파이가 살기 위해 물고기를 죽이며 죽어! 죽어! 하고 내리치다가 마침내 생명이 끊어진 물고기를 보자 눈물을 가득 흘리며 미안해, 미안해, 하고 사과하던 장면.


가슴이 메마르고 또다시 세계로부터 외면당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는 그 장면들을 떠올린다.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아파진다.

그리고 그 힘으로 다시 가슴을 촉촉하게 만들어 일상을 살아 나간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힘이 되는 창작물.

나도 그런 창작물을 만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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