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에게 존재가, 칸트와 아인슈타인을 잊는 이야기

중력을 제거하면 환영은 걷히고 드러나는 본질

by 강하단

약하고 볼품 없는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 가능성은 서로 연대하는 길 밖에는 없다고 믿는다. 민중, 때로는 국가의 국민이란 모습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하지만 존재가 드러나는 길 하나가 더 있다. 존재를 가로 막고 있는 장벽을 걷어내는 것이다. 물론 그 장벽이 무엇인지 먼저 파악해야 한다.


'존재’가 모두 “존재하는 것”이 될수는 없지만, 존재하는 것 뒤에는 반드시 존재가 있다.


칸트(1724-1804)

쇼펜하우어(1788-1860)

바그너(1813-1883)

니체(1844-1900)

그리고 아인슈타인(1879-1955)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이란 책에서 지식으로 이어지는 12가지 개념을 제안했다. 12가지 개념 중 하나가 “존재”인데 엄밀히 말하면 “존재(Being)”가 아니라 “존재하는(Existence) 것”이다. 모임 후 참석했는지 기억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존재는 있었지만 존재하지는 못했다. 칸트는 이런 존재는 지식으로 연결되지는 못한다고 그의 12개념에서 말했다.


쇼펜하우어는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에 온 마음을 쏟은 염세주의 철학자였다. 염세주의를 오해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수를 위해 소수를 희생하는 것을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이는 공리주의와는 달리 단 한명이라도 희생되어서는 안된다고 믿는 신념이다. 100명으로 구성된 조직이 있다고 가정할 때, 예를 들어 90명, 99명이 행복해지기 위해서 10명, 1명과 같은 소수는 고려되지 않아도 된다는 믿음이 공리주의라면 단 1명이라도 소외되면 100명 모두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고 믿으면 염세주의 철학이다. 사회 “존재하지 못하는 존재”의 소중함을 쇼펜하우어는 강조한다.


쇼펜하우어와 개인적인 친분도 있고 사상을 공유한 사람이 바그너였다. 음악가 바그너가 어떤 철학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 수 있는 그의 저서가 없어 가름하기 어렵지만 쇼펜하우어가 죽은 후 쇼펜하우어의 사상을 니체와 많이 나눈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니체가 쇼펜하우어의 책을 읽고 사상을 이어갔겠지만 바그너와의 대화를 통해서도 사상의 깊이를 더했음은 분명하다.


니체는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저서의 “환영과 수수께끼” 쳅터에서 쇼펜하우어의 존재철학을 발전시켰다고 생각한다(물론 개인적인 생각이다). 니체는 진리의 길은 곡선이라고 하면서 곡선의 길로 들어가는 입구 파사드에 순간과 영원이라는 문구가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챕터 제목이 왜 “환영과 수수께끼”일까? 곡선이 만들어지고 순간과 영원으로 이어지는 원인을 중력이라고 니체는 말했다. 순간과 영원, 심지어 곡선이라는 진리의 길도 실은 중력이 만든 환영이었던 것이다.


순간과 영원의 조건은 시간이고, 곡선은 공간이 있어 가능하다. 순간과 영원을 나누고 직선이 곡선으로 변하게 하는 힘은 다른 아닌 중력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 모든 걸 가능하게 한 중력은 환영에 불과하다고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통해 니체는 말한다. 순간도 있고 영원도 존재한다. 직선도 있고 곡선도 존재한다. 그렇다면 순간, 영원, 직선, 곡선이 존재하기 이전의 존재는 무엇인가? 존재하기 이전의 존재 자체에 대한 철학적 질문이다. 존재하는 것들은 중력이 만들었는데 중력 이전의 존재는 실제로는 알 수 없다. 존재하는 것은 다름 아니라 중력이 만든 환영일 뿐이라는 니체의 철학이다.


니체의 중력을 걷어낸 본질적 존재에 대한 궁극적 의문을 물리학으로 풀어낸 과학자가 아인슈타인이었다. 그는 니체의 순간과 영원의 구별을 시간의 곡선화로 이해하고 특수 상대성 원리로 발전시켰다고 믿는다. 환영에서 벗어나려면 중력을 걷어내야 하는 것이다. 존재하는 것들 때문에 생긴 사회의 온갖 차별을 없애야 본질로 돌아갈 수 있는 것이다. 니체의 영원회귀 사상이기도 하다. 이 또한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이지만 칸트에서 출발해서 쇼펜하우어, 바그너와 니체를 거쳐 설명하고픈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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