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은순의 개인전, “안은순 한국화전”
경인미술관 제6관 8월7일~13일
한국화가 안은순의 10번째 개인전이 지난 8월7일부터 13일까지 경인미술관 제6관에서 열렸다. 한국화는 역시 산수화가 제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날씨 탓인가 싶지만, 한 여름에 산수화를 감상하는 일은 매우 적절하고 어울려 보일 뿐만 아니라, 오랜 전통의 문인산수화는 우리의 마음과 정신을 편안히 감싸며 기대게 한다. 올 여름처럼 그 어느 해를 비교할 수 없을 만치 극심한 더위를 경험할 때는 특히 생각나는 것이 산(山)과 수(水)이다. 예부터 인자(仁者)는 산이요 지자(知者)는 물이라 했지만(仁者樂山 知者樂水), 지금 이 더위에 누가 인(仁)이니 지(知)니 하며 가리겠는가? 이런 때 산천경개(山川景槪)를 그린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는 누구든 그대로 빠져 들게 할 대안이 될 성싶다.
전시된 안은순 화가의 작품들은 4계절을 모두 담아내고 있는데, 산수를 그대로 그려낸 여름의 경치는 도심 한 복판에서 산천경개를 대신할 수 있는 것이니, 또한 겨울이나 가을, 또 봄이라 해도 계절감각을 표현하며, 명경지수를 담아내어 복잡하고 혼란스런 현실을 떠나 시원하고 홀가분한 자연 그 자체를 보여주고 있으니 어느 작품에서건 지금의 계절에서 느끼는 자극적인 것들과는 분명 거리를 두기에 충분하다. 한국화를 즐기는 이유 중에 이런 식으로 ‘마음으로 읽는 피서’를 포함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본다. 예부터 그림을 가까이 해온 우리의 선현들은 자연과 현실을 구분하여 필요한 경우 이를 적절히 활용하는 지혜를 보이기도 하였는데, 실제로 현실을 떠나 자연에서 이상적이고 바라던 욕구를 충족하는 ‘사의(寫意)’를 표현하고자 하였다. 아무튼 한국화를 즐기는 방법 중에 이와 같이 직관적으로 첫 눈에 넉넉하고 여유롭고 편안하며 또 마음이 시원해지는 경험을 하게 되니, 누구라도 그림의 뜻이나 깊이 있는 예술세계를 따지기 이전에 그런 생각을 하는 것은 자연스러울 법하다.
안은순 화가의 진경산수화는 문인산수화를 지향한다. 과거 문인화가들이 실경(實景)을 보고 그대로 그리기 보다는 자신의 내면에서 재해석하여 자신이 꿈꾸고 이상적으로 생각하는 자연을 재현하였듯, 안은순 화가도 자신이 소요(逍遙)하고 유람한 풍경들을 그저 보고 다녀온(소견消遣) 공간을 그대로 그려낸 것이 아닌 스스로 그 안에 들어가 거닐고 놀며 하나가 된 세계를 그리고자 하고 있다. 본래 산수화는 이상향이나 동경의 대상을 그린 그림들이다. 군자(君子)는 직접 산수(山水)에 몸담을 수 없었으니 그림으로 자신의 마음 속 생각을 실행하려 한 것이다. 그러는 중에 인간의 내적 진리를 추구하고 자유분방한 태도로 자기표현을 중시한 의도가 드러나는 것이다.
한편, 관람자들은 한국화에 대한 어느 정도의 안목이 없다면 제대로 한국화를 감상하기 어렵다고 느끼는 것이 인지상정일 듯하다. 물론 이것은 서양화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일 테지만, 한국화가 가진 고유의 정신과 그를 표현하는 기법이나 법칙 등은 시간적 거리 탓을 하지 않더라도 다소 그림과 자신 사이에 어떤 벽이나 거리감이 있어 보인다. 따라서 관람자들은 내적으로 어느 정도의 ‘낯 섬’이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작품을 대하게 되면 직관적인 반응을 느낄 뿐인 경우가 많게 된다. 따라서 더 이상 그림을 통해 읽어내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찾아내지 못하면서, 그저 오래전의 방식이거나, 과거의 선현들만의 비법으로 여기면서 다가가기 어려운 것으로, 그리고 자신과는 명확한 거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식으로 작품을 대하려는 태도를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것이 대부분의 관람자들이 한국화를 대하는 태도일 성 싶다.
그러나 관람자들의 이런 태도가 터무니없는 것은 아닌 것이 분명 한국화에는 알아야 할 무언가가 있기는 하다. 그래서 전통적 회화를 포함하여 그를 계승하고 있는 현대의 한국화조차 특유의 정신과 철학이 있고 그를 표현하고자한 화가들의 비법이나 기교가 있으니, 이것들을 사전에 이해하고 있다면 보다 쉽고 친숙하게 한국화를 감상할 수 있게 될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고 보면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말은 한국화를 감상하고자 할 때 매우 적절한 언사가 아닌가 한다. 오래전 유홍준 교수가 쓴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라는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어 ‘장안의 지가(紙價)’를 올리면서(?), 우리나라에 문화유적을 답사하는 붐을 불러일으킨 적이 있었다. 그때 유 교수는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라고 말하며 “아는 만큼 보인다”라는 멋진 말을 우리에게 알려주었었다. 이는 문화유산에 대한 안목을 얻는 방법을 이르는 말이니 어느 때를 막론하고 적절하다 할 것이다. 이처럼 전통회화의 맥을 잇고 있는 한국화를 감상하기 위해서는 다소의 기본 지식을 이해하거나 익히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인지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한국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음의 몇 가지는 알아둘 필요가 있을 듯하다. 그 하나는 북송 때의 화가 「곽희」의 《산수화론》이다. 「곽희」는 현실의 자연경치에 얽매이는 사생적인 산수화를 이상화된 ‘마음속의 산수화’로 끌어올린 선각자이다. 실경에서 받은 감명을 강조하기 위해 과장과 변형을 통해 표현하고자 하였다. 이를 「곽희」의 “임천지심(林泉之心)”이라 한다. 「겸재 정선」은 이에 대해 “좋은 경치를 감상하고 그릴 때는 사람의 마음으로 보아서는 아니 되며 ‘숲과 샘의 마음’, 즉 ‘순수자연의 순수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오늘날의 진경산수화를 대하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관점이라 할 것이다. 또 하나는 “삼원법(三遠法)”이다. 원근법, 또는 투시법을 의미하며, 화면의 구도와 시점관계에 따라 “고원(高遠, 높게 올려다 봄)”, “심원(深遠, 산 앞에서 산의 뒤를 봄)”, “평원(平遠, 가까운 산에서 먼 산을 평행하게 봄)” 등의 3가지이다. 그리고 한국화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정신과 태도”에 대한 것이다. 즉 “훌륭한 예술품에는 반드시 그것을 만든 사람의 훌륭한 정신이 깃들어 있고, 그 시대적 상황이 반영되어 있다. 우리는 예술품을 통하여 사람과 시대의 정신을 만난다.”(오주석 평론가) 이러한 뜻을 기억하면서 “옛사람의 눈으로 보고 엣 사람의 마음으로 보려는” 태도를 갖게 된다면 충분히 작품과의 교감은 어느 정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산수화를 그리는데 사용하는 준법이 몇 개가 있는데, 산과 바위를 그릴 때 주로 사용하는 준법인 “부벽준법(斧劈皴法)”, “운두준법(雲頭皴法)” 등을 이해할 수 있다면 작품을 이해하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될 것이다.
안은순 화가는 여류 한국화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전시작품들은 정통의 문인산수화의 화법이나 정신을 따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의 한국화는 남종화, 또는 남종문인화의 화맥이 존속하면서 현대에까지 유지되는 형편이고 보면 오늘날의 화가들이 그것을 따르는 것은 매우 자연스런 일일 것이다. 그러나 과거의 문인들의 그림은 다소 자신들의 이상이나 비현실적인 가치를 높이 숭상하는 마음과 선비로서의 자존이나 위상을 그림에 표현하고자 하였기에, 그림 자체의 기법이나 표현을 중시하기보다는 그림의 주제나 내용의 뜻과 의미를 높이 추구하였다고 할 수 있는데, 이런 측면을 본다면 오늘날의 한국화가들 과는 다소 구별된다고 할 수 있다.
안은순 화가의 작품들은 다소 거칠고 과감한 느낌이 들기도 하지만, 정갈하고 단정하다. 틀이 크고 시야도 넉넉하지만 어느 수준의 질서는 지키려는 마음가짐이 전해진다. <북한산II>의 경우, 이런 태도가 잘 표현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자신이 서있는 위치(근경의 두 그루의 소나무와 한옥이 그려져 있는 곳)에서의 두 그루의 작은 소나무는 잘 자란 모양이 예의있고 올바른 선비를 상징하는 듯하다. 기품이 있으되 겸손하다. 그런 자세에서 눈앞에 펼쳐진 북한산을 올려다보는 시점으로 거대한 암산이라 할 만큼 웅대하고 장엄하게 거친 필선과 짙은 먹과 청색으로 채색하여 강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또한 원경에 잡힌, 그 뒤로 보이는 중첩된 산들을 농암을 조절한 담묵으로 처리하여 전체적으로 안정되고 여유로운 진경산수화를 그려내고 있다. 작가는 섬세한 선묘(線描)와 강열한 붓질을 병행하여 자신과 산이 함께 존재하는 공간에 있지만 결코 같지 않은 구분된 두 존재를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감정을 잘 다스리며 안정과 절제 속에서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담아내고자 한 수작(秀作)에 속한다 할 것이다.
작품 <비경>에서 안 화백은 자신이 서있는 초입의 소나무 숲을 근경에 배치하고 중경으로는 눈앞에 펼쳐진 주상절리와 기암절벽, 그 주변 경치의 세세한 풍광과 더불어 계곡을 이어주는 다리 건너 멀리 보이는 산 밑의 마을까지 매우 넓고 깊은 시야 속에 펼쳐진 자연 경치를 담아내고 있다. 먹선(墨線)과 담먹(淡墨)으로 처리했지만 원경의 산세까지 작가는 넉넉히 자연을 바라보는 여유를 화폭에 담고 있다. 그에게는 “비경(秘境)”이라할 모든 요소가 다 눈에 들어와 있다. 비교적 높은 지대에 펼쳐진 주상절리와 중첩된 산악과 계곡사이를 흐르는 물줄기까지 비록 멀리 마을이 있으니 현실세계와 동떨어진 곳은 아니지만 그에게는 특별한 체험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북한산I> <북한산 소견> <북한산성> <독바위> 등은 비교적 화폭에 담고 있는 내용은 간단하지만 강한 인상을 의도적으로 표현하고자 애를 쓴 듯하다. 필선이 부드럽고 섬세한 편이지만 붓터치가 때론 강렬하다. 짙은 먹을 과감히 칠하여 산세와 대상 자체를 범상하지 않은 기운이 느껴지도록 의도하고 있다. <북한산 소견>은 매우 강렬한 이미지를 전달하고 있다. 북한산에 대한 “외경심(畏敬心)”이 느껴진다. 멀리서 바라다 보이는 북한산의 웅장한 자태와 아래 부분에 그려진 작은 나무들로 그려진 숲은 작가의 시점이며 작가가 서있는 지점인데, 이때 올려다 보이는 북한산의 모습이 위압적이다. 그리고 그 뒤로 펼쳐진 먼 산은 푸른색의 담묵으로 처리하였다. 그림의 중심이 되는 북한산은 최대한 짙은 녹색과 먹을 과감하게 칠하여 산의 위세를 드러내고 있다. 소박하고 잔잔히 시작한 작품일 테지만 매우 강한 Impact를 전달하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독바위>는 다소 과장된 이미지가 전해진다. 필자가 아는 그 장소라면 그다지 강한 산세와 거친 산악일 만큼 거대한 산이라고는 할 수 없겠으나, 작가는 나름대로 강렬한 인상을 받았거나 그렇게 표현하려는 의도를 가졌을 것이다. 아무튼 집중적으로 독바위 전체를 화폭의 중심에 배치하여 짙은 먹과 진한 녹색을 채색하여 단순하지만 규모있는 암산(巖山)으로 그려냈다. 먹과 진녹을 사용하면서 세밀한 채색과 터치를 통해 그리고 정교한 선묘(線描)로 조화로운 수묵산수화를 완성한 것이다. 그림의 크기가 작아서 망정이지 크기를 보다 키웠다면 매우 강렬한 인상을 주었을 작품이라 할만하다.
필자는 작품 <봄>을 현대 한국화의 유연하면서 재해석이 가능한 상징적인 작품으로 지목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 개인적인 판단이며 평가이지만, 기존의 문인산수화가 지향하는 정신을 유지하면서 새로운 전망을 제안하는 작품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실과 자연이라는 구분된 두 세계를 인정하면서, 이를 앞부분의 노란 유채꽃밭과 뒷부분의, 너른 개천에 접해있는 마을과 개천 건너 산을 원경으로 나눈, 기존의 산수화와는 다른 구도의 작품으로 일반적인 현대화의 풍경처럼 보이지만, 노란색을 다소 이상적인 이미지로 구분하고 사람이 사는 마을을 뒷부분에 배치함으로써 희망적이고 평안한 삶의 공간으로 이미지를 상승시키려는 의도를 읽을 수 있다. 문인산수화처럼 물길이나 계곡으로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꽃밭을 지나 작은 길을 통해 마을로 이어지도록 함으로써 두 세계가 서로 연결될 수 있다는 암시를 보여주는 기분 좋은 그림이다.
기본적으로 산수화에는 물과 산이 동시에 등장하게 되는데, 물은 현실과 이상을 경계로 나누는 의미가 있다면 이를 이어주는 것은 다리이다. 다리는 두 세계의 경계가 되는 지점인 셈이다. 안 화백의 작품에도 다리는 수시로 등장한다. 다리 건너에는 그럴 듯한 정자도 눈에 들어온다. <원흥정(구례>, <관음폭포(내연산)>, <독주암(설악산)>, <용소삼거리(설악산)> 등은 안 화백이 실제로 실경을 관찰하고 과거 문인들이 추구하려는 이상과 현실에서의 갈등을 그림으로 표현했듯이 그런 심정으로 대상을 대하며 마음속의 일렁임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그러면서 이처럼 그림으로 표현할 수 있는 이상향에 대한 내면의 추구심(追求心)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는 안 화백이 과거 선비 문인의 정신과 태도를 추체험(追體驗)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다만 안 화백의 작품 안에는 사람이 없다. 사람을 등장시켜 자신이 됐든 누군가를 대신하든 그림 속의 사람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과 이상을 대리 표현하고자 한 문인화의 사의(寫意)를 비교할 때 차이가 있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즉 자연과 자신이 일체가 되려고 노력한 문인화가들의 정신을 돌이켜 볼 때 생각해 볼만한 부분이다.
그러나 「소동파(東坡 蘇軾)」가 “사람하나 없는 텅 빈 산에/ 물은 흐르고 꽃은 피네” “空山無人(공산무인) 水流花開(수류화개)” 라고 노래한 뜻과 일치하려는 것이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러나 안 화백의 작품에서 유일하게 사람이 등장하는 작품이 있다. 작품 <비경>이다 주상절리가 높이 펼쳐져 있는 기암절벽의 계곡 밑으로 흐르는 물줄기, 작가가 <비경>이라 이름 붙인 이 경치에 취하여 자신의 의취(意趣)를 드러내고자 이젤을 펼친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넣었다. 화가와 그 일행인 두 화객(畵客)는 자연과 잠시나마 일체가 되고자 하였다는 것을 그림에 담아내고 있다.
안은순 화백은 이번 전시를 통해서 기존의 수묵산수화와는 다른 변화를 추구하고 있다. 주로 먹을 사용하여 농담(濃淡)으로 붓을 이용한 준법(皴法)으로 그려내며 자신들의 이상과 정신세계를 표현하려 한 문인화와는 그 결을 벗어나고자 한다. 즉 현대적 감각으로 수묵에 제한 받지 않으며 다양한 채색을 이용하여 산수화에 변화를 주고자 하였는데 이는 작가가 본 것을 마음으로 재해석했던 과거의 발상과 다른 것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즉 색채로 재해석하거나 전체적인 이미지의 완성을 위한 혁신적인 시도로 읽을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기교중심, 즉 ‘형사(形似)’를 중시하여 그리는 것과는 다른 문제이며 다만 보다 새롭고 다른 자연의 실체를 찾고자 하는 노력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실경을 관찰하고 그것을 화가의 눈과 마음으로 재해석하여 그려내는 것이 진경산수화라고 한다면, 진경이란 실제의 경치 그대로이기도 하지만 화가가 원하고 찾고자하는 내면의 이상적인 경치일 수도 있는 것이기 때문에, 올바른 표현을 위한 새롭고 의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부용대>, <꿈>과 같은 작품은 한지와 먹을 사용한, 한국화의 재료와 기법으로 그려냈지만, 현대적 이미지를 상징과 생략, 은유 등으로 작가정신을 에둘러 표현하고자 한 추상적 메시지를 담은 실험적 작품이라 할 만한데, 이번 전시를 통해 얼마든지 한국화의 범위와 영역을 확장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던 듯하다.(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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