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연순의 개인전, “나 여기 서있네(I’m Standing here)”
김연순의 개인전, “나 여기 서있네(I’m Standing here)” -인사아트프리자 갤러리 2층 8월7일~13일
“사과”를 대상으로 그린 서양화가 김연순의 개인전이 8월7일부터 13일까지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2층에서 열린다. 오직 “사과”만을 그린 작품들이 2층 전시실 전체를 가득 채우고 있으니, 마치 어느 사과 과수원을 이곳에 옮겨온 듯하였다. 근래에 사과를 그린 작가들을 간혹 보기는 했으나, 이처럼 사과만을 소재로 선택하여 집중적으로 작품화한 경우는 볼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사과그림들은 나무에서 수확한 상태의 정물(靜物)이 아닌, 대부분 나무에 매달려 생장(生長) 중인 ‘싱싱한’ 사과들이었는데, 생기와 생동감이 살아있는 사과를 통해 작가는 자기만의 메시지를 전하려는 듯하였다. 또한 전시의 주제와 작품이름이 모두 “나 여기 서있네(I’m Standing here)”였는데, 당연히 특정한 주제의식을 드러내는 전시라고 할 수 있었다.
필자는 우선 “왜 사과인가?”, “사과에 담긴 의미와 이유가 혹 개인적인 사연과 관련이 있는 것일까?”를 생각해 보면서, 이미 알려진 ‘유명한 사과들’에 대해 떠올려 보았다. 즉 프랑스의 화가 모리스 드니(Maurice Denis)가 언급한 역사상 유명한 3개의 사과가 그것이다. 첫 번째는 “선악과(善惡果)”인 「이브(Eve)」의 “사과”인데, 이미 성경(聖經)을 통하여 유명해진 “원죄의 사과”로서 ‘달콤하지만 치명적인’ 과일로서의 사과이다. 둘째로는 영국의 과학자 「아이작 뉴턴」이 ‘만유인력의 법칙’을 발견한 ‘중력’의 “사과”이며, 세 번째는 ‘근대미술의 아버지’로 일컬어지는 「폴 세잔」의 “사과”이다. 주지하듯 세잔은 인상주의를 지향하면서도 기존 방식과 다르게 사과를 그렸다. 즉 기존에는 사과의 기본 색에 빛과 그림자, 반사광 등으로 사과처럼 보이게 그렸으나, 세잔은 사과를 입체적으로 둥글게 표현하기 위해 물감을 섞지 않고 순색으로 붓질을 하여 그리는 등,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하면서 피카소나 마티스 등에게 큰 영향을 미친 화가로 평가되고 있다.
이러한 생각을 해보면서 이 작가는 왜 “사과”에 올인(All in)하다시피 작품을 그려내고 있는지가 궁금하였다. 그리고 30여점이 넘을 작품들이 모두 같은 제명(나 여기 서있네)인 것은 단순히 연작의 의도보다는 작가의 구도적인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과 더불어 철학적 명제처럼 보이니, 중의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작가의 담론과도 같다는 유추를 하게 하였다.
한편 살펴보니 대부분의 작품들이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려졌지만, 목화솜과 양모 솜을 이용하여 사과 형태로 만들고, 그것을 여러 개의 아크릴로 만든 4각형 통속에 각각 넣은 뒤 그 4각형의 통을 바닥에 고정시킨 실험적인 설치 작품들과 마치 사과인 듯 물감으로 그려낸 작품들이 섞여있었다. 이런 식으로 나름 다양하게 표현형식을 실험하듯 작업한 작품들이 여럿 전시되어 있었는데, 작가에게 들어보니 이번 전시 작품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사과 유화작품을 그리기 이전에 이와 같이 목화솜과 양모 솜을 통해 사과형태를 만들어 설치작품을 주로 하였으며, 사과를 직접 유화로 그리기 시작한 것은 7년 전부터라고 하였다. 따라서 이번 전시는 과거에 해왔던 작업과정의 일부와 새로 시작한 유화작업의 결실들이라 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사연과 개인사를 간직하고 있다. 작가에게도 자기만의 그런 스토리텔링이 있었고, 그런 시기에 그의 가족을 감싸며 아늑함과 따뜻한 기억을 갖게 해준 “솜”이라는 소재와 ‘사과’의 형태가 작가의 작업에 매우 적절하다는 모티브가 있었을 것이며, 그런 과정에서 사과를 오브제(objet)로 하여 화폭에 담거나 그려보고자 하는 계기가 생겼을 것이고, 오늘의 전시는 그 한 단락이 되는 셈이었다. 아무튼 「모리스 드니」가 언급한 유명한 사과와 직접 관련은 없더라도 김연순 작가에게 사과 스토리는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눈에 보이는 것의 현존(現存)과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의 견고함은 서로 영혼의 사랑을 다투며, 보이는 것의 공허함과 보이지 않는 것의 부재는 영혼의 혐오를 유발한다.” 라고 한 프랑스의 철학자 「블레즈 파스칼(Pascal)」의 말이 기억났다.
김연순 작가가 화폭에 재현한 사과는 자신의 삶의 여정에서, 또는 자신의 삶에 대한 담론에서 생명력으로서의 상징적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혹시라도 그가 겪었을 불우함의 징후조차 내색하거나 언급함이 없더라도 이처럼 밝고 찬란하게 표현해 내고자 한 것은 스스로 치유하려는 강한 의지의 소산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런 고난과 극복의 과정을 견뎌낸 사과를 통해 작가는 “자기만의 사과”를 만들어 가고 있다. 오늘 날에도 모리스(Maurice)의 사과만이 아닌, 세기적 디지털 혁신기업 《APPLE》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의 ‘사과’가 존재하는 것처럼, 머지않아 「김연순」의 ‘사과’도 존재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충분히 해 볼 수 있는 것이다.
김연순의 사과에 대한 몰입은 사과의 원천에 대한 ‘재생산’이라 할 수 있다. 즉 사과는 사과로서의 본질이 있고, 형태와 색채로 재탄생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사과의 존재에 대한 재해석이며 새로운 인식에의 확대 재생산인 셈이다.
목화솜을 탈 때 가볍고 깨끗한 솜 덩어리들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솜에 섞이는 다양한 색을 통해 작가는 자신의 상상과 따뜻한 마음을 담아 온갖 종류의 솜 덩어리를 창조해 낸다. 이 과정에서 작가는 유년인 듯, 현재인 듯 자신의 생활 속에서의 꿈같은 상황을 구상해 내는 것이다. 마치 “목화솜을 타는 집(솜틀 집)”에서의 체험을 “꿈을 타는 집(꿈의 집)”으로 만들어 가면서 새로운 생명력의 의지가 솟는 순간으로 조형화하는 것이다. 이처럼 솜틀집에서의 체험과 꿈꾸는(Dreaming) 과정에서 사과의 모양이나 색채를 연상하며, 솜 덩어리와 사과를 동일시하는 순간을 경험하는 것이다. 당연히 사과의 유용성과 상징성은, 솜 덩어리와 전혀 본질이 같지 않다고 해도, 연상되고 체감(體感)하는 것은 다르지 않다는 인식인 셈이다.
작가는 엄마의 딸에서 엄마로 성장해온 그 과정에서 있었던 숱한 이야기들 - 때론 슬픔, 실망, 또는 분노도 있었을 것이고, 반대로 이해, 용서, 화해, 사랑 그리고 그러는 중에 느낀 더 성장하고 강해진 자신에 대한 인식과 신뢰, 그리고 기대까지, 자신을 살아있게 한 요소들을 포함하는 것들 - 을 이해하고 정리할 수 있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사과는 자신에 관한 스스로의 담론과정에서 늘 떠오르던 것을 대신할 만하다고 여겼을 것이고, 그 사과는 어릴 적 기억속의 목화솜으로 출발하여 아스라하고 따뜻하고 포근한 감각과 기억은 점차 그것에의 내면이 견고해 질수록 겉으로 드러나는 사과의 현존과 더불어 영혼에의 가치와 숭고함은 커져 갔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연순의 사과는 “살아있는 사과”이다. 사과나무에서 사과를 따는 순간 그 과실은 생명의 줄기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된다. 더 이상 살아있는 생물이 아닌 셈이다. 김 작가는 이런 이유에서 반드시 사과나무에 달려있는 사과를 그리고자 한다. 이것은 “인간정신에의 회귀”를 의미하는 것이다. 어린 시절 엄마 품에서의 기억을 현존하고자 하는 노력이다. 엄마 품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도 따뜻하고 편안했고, 온 가족이 목화솜 이불속에서 옹기종기 모여 함께 하며 어떤 경우에도 든든하고 아늑했으며 살아있음으로서 생기가 돌았던 기억, 그 사랑의 원천을 떠올리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로부터 출발하여 김 작가는 목화솜과 양모 솜으로 사과를 재현하였고, 이제는 유화로 사과를 직접 그려낸다. 도구와 방식은 다르지만 원천은 그대로이다. 따라서 사과역시, 가족의 생명력이 살아있고 이어져 있듯, 사과나무에 연결되어 있는 살아있는 사과여야 하는 것이다.
김연순 작가는 이렇게 오랜 성찰과 자기에 대한 스스로의 담론을 거친 끝에 이제는 달라질 시기를 맞이하고 있는 듯하다. 자연스럽게 개안이라도 된 듯 그에게 너른 시야 속으로 많은 것들이 들어온다. 더불어 그간에 간직하고 다듬어왔던 여러 이야기들을 화폭에 담아내고자 하고 있다. 눈에 보이는 현존(現存)과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내면에 견고하게 자리 잡은 마음과 정신, 그것들은 오랜 시간 김 작가의 내면에 쌓이며 시간을 두고 숙성되며 때를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이제는 그것들이 작품으로 드러나며 세상과의 소통을 기대하게 한다. 그 표현의 방식은 비록 기존의 수많은 작가들이 시도했던 것이라 해도 무슨 상관이 있으랴. 김 작가는 이번 전시된 작품들 중 특별하게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구분되는 작품을 선보였다. 그 작품은 다시점(多視點) 기법을 통해서, 그리고 다차원의 시.공간적 요소들을 한 차원으로 담아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은 환상적이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준다. 그 화폭 안에 담긴 스토리들이 따뜻함을 담고 있어서이기도 하지만, 애초에 충만한 감성이 바탕에 깔려있으니 직관적으로 그것이 먼저 전달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어쩌면 김연순 작가만의 방식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필자는 김연순 작가의 이번 전시는 그동안 해온 작업의 결과를 정리하는 기회이면서 자기의 길을 스스로 확인하는 기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구태여 이 길이어야 하는가?’를 그동안 꾸준히 암시하거나 예시하면서 스스로의 자기담론을 즐겨왔다면, 앞으로는 그것을 외부로 드러내고자 하는 심사를 정했다고 예상할 수 있을 듯하다. 곧 눈에 잘 보이지 않는 내면의 견고함을 통하여 드러난 것과의 조합을 보다 잘 이루려고 하는 순간, 자신의 영혼은 더욱 밝게 빛나게 되리라는 것을 작가는 그동안의 과정을 통해 알게 되었으리라는 예상을 해본다. 따라서 작가에게 이번 전시는 매우 중요한 전환의 의미를 갖게 될 것이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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