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찬모 초대전, 선(禪,Meditation)
강찬모 초대전, 선(禪,Meditation)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 7월24일(수)-7월29일(월)
한국화가 강찬모 초대전이 인사아트프라자 갤러리 1층 그랜드관에서 7월24일(수)부터 7월29일(월)까지 열렸다. 선(禪,Meditation)을 주제로 한 전시인데, “히말라야(Himalayas)”를 그린 작품들이다. 갤러리 1층 전체를 채운 그림들을 처음 마주한 독자들은 매우 큰 충격을 받을 수도 있다. 장엄하고 거대한 히말라야의 모습과 밤하늘을 가득 채운 셀 수도 없는 오색찬란한 별들을 그린 작품들을 보는 순간, 경이와 놀라움 그 자체를 체험하게 된다.
무한한 느낌을 주는 가장 선명하고, 가장 강렬한 “파란색”, 여기에 대비하여 빛나는 “금빛”의 단순한 조합이, 짙은 어둠의 색으로 처리한 산악(山岳)의 형체 위에 솟아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 장면을 실제로 볼 수 없었을 사람들조차도 온갖 기억과 지식을 동원하고, 원초적인 상상력을 통하여 이 신비스런 기운을 온 몸으로 감싸 안고자 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또한 밤하늘에 꽉 들어찬 무수한 별들이 쏟아내는 우주의 영험(靈驗)함을 감당해내며 자신에게 내리 꽂히는 영혼과의 교감이랄까, 작가가 체험한 그 순간을 그려낸 작품 앞에서 담담히 작품을 분석하고 즐기기란 쉽지는 않을 터이다.
강찬모 화백은 2004년 히말라야를 처음 갔었을 때 겪은 충격적인 인상을 지금도 그려내고 있는 중이다. 그때 이후로 여러 차례 동일한 소재와 주제로 자신의 영적 체험을 표상화하는 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는 인상을 준다. 이 주제의 작품들은 혹, 가보지 못한 사람들은 쉽게 말하지 말라는 언급을 해도 할 말이 없을 만한 정신적 impact의 여운이 지금도 여전한 까닭일 것이다. 이처럼 강 화백은 자신의 인생관, 자연관, 또는 우주관을 바꾸어놓은 히말라야에서의 “영적체험”에 대한 깊은 감동을 담아내고자 대형화폭에 작품으로 승화시키고 있지만, 히말라야 현장과 비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 화백은 자신의 예술적 바탕과 그간에 연마한 온갖 표현비법을 총 동원하여 혼신의 노력으로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이렇게 20년 가까이 작업을 해오고 있고, 그때 체험하고 깨달은 ‘범신론적(汎神論的) 자연관’은 여전히 그를 사로잡고 있는 거대한 주제이며, 화두(話頭)인 것이다.
강찬모 화백은 히말라야의 산과 하늘을 ‘닥종이(닥나무로 만든 전통한지韓紙)’에 천연재료를 채색하여 그려낸다. ‘히말라야’라는 대자연과 우주의 기운을 표현하기 위한 자신의 방식이다. 닥나무로 만든 한지를 백반과 아교, 물을 섞어 바른 다음 말린 화판은 물감이 번지지 않으며, 방충과 방습효과가 있다. 여기에 조개가루와 천연 안료 등을 섞은 물감으로 채색을 한다. ‘조선시대 궁궐의 용상(龍床)뒤 그림’을 그리는 방식과 같다. 강찬모 화백은 처음엔 서양화를 전공하여 주로 유화를 그린 화가였지만, 후에 한국 고미술의 채색에 있어, 일본이 고구려 벽화, 조선시대 민화 등의 채색연구에는 우리보다 앞서있음을 알고 일본에 유학하여 채색화를 연구하였고, 한국채색화의 새 경지를 개척한 박생광, 천경자의 계보를 잇고 있다는 평가를 받는 한국화가이다.
누구나 자신만의 심적인 고통을 겪은 경험들이 있을 것이다. 히말라야를 그리는 화가로 변신한 강찬모 화백 역시, 과거에 스스로 “만신창이가 되어 지쳐있는 자신의 심신”을 달래고자 히말라야로 갔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곳에서 한밤중에 문득 잠에서 깨어나, “한순간에 절대공간과 시간 앞에 마주쳐 일체가 된 자신”을 경험하게 되었고, 나아가 그 경이로움 속에서 깊은 밤하늘의, 손가락하나 들어 갈 틈 없이 빼곡히 들어찬 별들이, 영롱하면서도 호롱불만한 별들이, 서로 부둥켜안고 사랑을 나누는 것을 목격하면서 눈물겹고도 신비로운 느낌을 받았으며, 무한히 따뜻하고 행복하였다고 하였다.
이렇게 2004년 히말라야에서 겪은 외경(畏敬), 그 자체의 “영적 체험”은 강 화백을 변화시켰다. 그 전까지는 “고독한 실존적 존재인 현대인”에 관심을 두었던 그가 그때부터 “영적 교감”의 체험을 그리기 시작하였고, “자연, 우주, 영원으로의 회귀”를 불러일으키는 “명상(冥想)”을 그리는 작가로 변화하였다고 스스로 고백하고 있다.
강찬모 화백은 히말라야의 웅장한 이미지를 매우 단순한 형태와 힘 있는 색채로 그려내고 있다. 히말라야의 ‘하얀’ 설산(雪山)과 ‘푸른’ 하늘과의 조화는 그가 받아들인 중심적인 인상이다. 즉 자연의 근원적인 모습을, 순수한 세계를 색의 대비를 통하여 초월적인 세계로 그려내는 것이다.
본래 “히말라야(Himalayas)”는 산스크리트어로 “Hima(눈) + a-laya(거처, 정주)”의 합성어로서 그 의미는 “눈의 거처” 또는 “눈이 사는 곳”이라고 한다. 하얀 색의 히말라야는 매우 근본적인 표현이면서, 밤에 목격한 하늘의 모습은 “짙푸른 청색” 그 자체이니 강화백의 채색은 그대로 순수하고 정직한 것이다. 다만 ‘태양빛을 받아 빛나는 설산’, ‘달빛을 받아 빛나는 설산’의 자태에서 강 화백이 받은 충격적인 감동을 담아내기 위하여 그림 속에 자신의 영혼(靈魂)을 담아내고자 할 뿐이다.
한편 필자는 강찬모 화백이 처음 히말라야를 보고 받은 인상은 무엇이었을까? 를 생각해 보았다. 그는 태고(太古)의 신비를 간직한, 정적과 침묵, 적막 속의 ‘태고의 땅’에서, “생명의 근원과 연결되어있을 비밀의 장소”와도 같은 그곳에서 인간의 욕망, 허위와 가식에 찌든 자신을 포함한 현대인의 안타까운 내면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어떤 “깨달음의 대상”을 경험한 것일까? 곧 그가 찾아 나섰다고 한 “설산(雪山)의 은자(隱者)”가 겪었을 “정신적 깨달음”에 이른 것인지 생각해 본다. 그 깨달음이란 어떤 것일까? 거대하고 경이로운 자연을 목격하고 그로부터의 충격적인 인상을 그려낼 뿐 아니라, 그 이후부터 “선(禪)”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내니, 선(禪) 수행을 통해 터득하고 깨달은, 인간의 번뇌를 떨쳐낸 “무아(無我)의 경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어떤 식으로 표상될 수 있는 것인가? 에 관심이 간다.
선(禪)이란 불교의 석가모니가 행한 해탈(解脫)과정과 상관이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부처께서는 먼저 육체적 고행을 통한 정신수행으로 해탈에 이르고자 했으나, 이때의 해탈은 사후에야 가능한 것이었다. 결국 ‘명상’을 통해 보리수 나무아래에서 해탈을 이룰 수 있었다. 강찬모 작가가 20년 동안이나 지속적으로 선을 주제로 히말라야 체험을 화폭에 담는 이유는 그런 과정과 다르지 않을 것이다. 강 화백이 히말라야에서 체험한 것은 어떤 언어로든 설명하기 어려운 시간과 순간들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강 작가는 그곳에서 온몸으로 받아들인 “영적 showering”을 통해 세속의 탐욕과 속된 쾌락을 씻어내고 새로운 자신을 세울 수 있었을까? 어쩌면 독자들은 그 모습을 기대할 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강 작가는 여전히 수행과정에서 벗어나지 않은 채 매달리고 있다. 아직은 그가 이르고자 하는 지점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각성 탓인가?
이번 작품들에서는 산악(山岳)의 비교적 아래 부분에 작은 집을 그려두고 있다. 하얀색으로 그려진 그 집의 색은 히말라야의 ‘하얀’과 동일하며, 가는 선으로 그린 그곳으로 향하는 길과 그 길 앞에 선 거북이는 아마도 작가가 더 깊은 깨달음과 함께 많은 이들에게도 힘이 되는 역할을 상징하는 새로운 징표는 아닌지 생각해 본다.
예술가는 자신이 체험한 것을 어떤 식으로든 독자들에게 전달하고자 하는 소임이 있기도 한 것이고, 이 부분에 대해서 더욱 스스로를 던져야겠다는 각성을 했다는 표시가 아닐까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그림은 삶이 힘들고 고통스럽다고 느끼는 사람들에게 구원이 되기도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작가 스스로 힘들고 절망스러웠을 때 히말라야에서의 영적 체험을 “명상”을 통해 터득해 가는 자신의 정신적 수행과정을 독자들에게도 전달될 수 있기를 기대하면서, 독자들도 간접적이나마 체험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 자신의 작업을 지속하고 있는 이유라고 한다면, 보다 더 절실하고 전달력이 확실하게 그것을 시각으로 표상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실천적인 의식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림이란 게 무엇이냐? 어떻게 해야 잘 그리는 것인가? 그것은 화가가 느끼는 것과 화가가 할 수 있는 것 사이에 서 있는, 보이지 않는 철벽을 뚫는 것과 같다.” 반 고호가 동생 테오 고호에게 보낸 편지에서 한 말이다.
외경심(畏敬心) 외에는 대체할 말이 없을 대자연과 깊은 심연의 우주 체험의 순간에 작가가 떠올린 “사랑”의 의미는 무엇인가? 우리의 사랑은 이미 인간이 체험한 그것들일 텐데, 웅대한 설산에서 한 밤에 경험한 사랑의 모습이란 대체 어떤 것일까? 작가는 어떤 상상으로 그 사랑을 느끼고 확인한 것이며, 대중들은 그것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강 화백의 작품 속에 이 사랑이 표현되었다면, 독자들은 어떻게 그것들을 읽어내야 작가의 체험과 비슷하게라도 공감하고 공유할 수 있겠는가?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새로운 해결과제를 가슴에 떠안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작가는 자신 뿐 아니라 독자들 에게도 “선(명상)” 속으로 들어오라는 은근하면서 강한 신호를 보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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