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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갤러리 산책가는 날.16

김희국 개인전 - 자연을 진심으로 대하는 기쁨의 교감

by 강화석 Oct 03. 2024

경인미술관 제6관 /2024 08 21 ~ 08 27.     


ㅡ자연을 진심으로 대하는 그림 속 기쁨의 교감

     

김희국(金熙國) 화가의 개인전이 경인미술관 제6관에서 8월 21일부터 27일까지 열린다. 자연의 다양한 경치를 그린 수채화전이다. 그런데 필자가 그동안 봐왔던 그림들과는 다소 다른 느낌이 전해진다. 작가의 작품들에서 무언가 독특한 분위기가 감지되는데, 작가 특유의 기법이나 화풍에 대한 것이 아니라, 대상을 대하는 태도, 그림을 그리는 자세가 작가의 정신적 바탕을 반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로 수채화는 “단순화”를 지향하는 편이다. 그러나 김 작가의 수채화는 그 반대이다. 그렇다고 복잡하다는 것은 아니다. 기존의 수채화와 다른 무언가가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고, 작가가 의도적으로, 또는 작가만의 방식으로 달라 보이는 수채화를 그리고 있다는 암시이기도 하다. 그러면 다르게 보이는 “그것”은 무엇인가?

수채화는 특성상, 대상을 어느 정도 과감히 생략하거나, 물감과 물을 사용하며, 표현의 강약을 조절하기 위해 바라본 대상에 대해 선택적 주목을 하기 일쑤이다. 또는 어느 부분은 외면하거나 소홀히 하면서 전체적인 구도나 표현상의 의도를 선별적으로 판단하여 취사선택하기도 한다. 그런데, 김 작가는 그것을 고려하지 않고 자기만의 방식을 고집하는 듯하였다. 즉 그리려는 대상을 선택할 때,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온 것들과의 관계를 우선하면서 그것들과 소통에서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무엇이든 의미 있는 요소로서 대하려 한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필자의 과도한 몰입일 수도 있으나, 전시된 작품들에서 그러한 분위기가 전해지니 필자의 감정자극에 남다름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화가는 자신의 의식과 기술을 통해 바라본 대상을 자신의 내면으로 걸러내어 화폭에 새로운 대상으로 재현하는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앞에 보이는 대상 그대로를 그려내는 것이 아닌 자신의 의식이 담긴 이미지를 그리는 것이다. 그런데, 김희국 작가는 자신의 작가노트에서 “아무런 생각 없이 그저 느끼는 대로 그림을 그렸습니다./그렇게 그냥 그렸습니다./그리는 매 순간은 그랬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그가 그려낸 것은 자신의 의식을 앞세우지 않고, 또 “아무런 생각”도 따르지 않으며, 내면이 이끄는 대로 그렸다는 의미로 이해된다. 이 말은 필자가 인지한 부분과 배치되는 발언일 뿐 아니라, 필자의 인식이 전혀 엉뚱하다는 뜻이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다른 의미로 작가의 작업태도가 평상시의 상태가 아닌, 마치 “무아의 상태(무아의 경지)”와도 같이 그리는 대상인 자연과 자신이 일체가 되는 상태에서 그렸다는 뜻으로, 또한 대상에 대한 어느 정도의 거리에서 그림으로 ‘그저’ 재현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작가와 자연이, 자연과 작가가 서로 교감하거나 공유하는 지점이 꽤나 넓은 상태에서 작품이 탄생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는 필자의 생각을 고집하고 싶어졌다. 이것은 작가들이 그림을 그리면서 추구하려는 이상적인 상태이기도 하며, 자연을 이상적인 대상으로 여기던 옛 시절의 정신과도 일치하는 생각이기도 한 것이다. 

김 작가의 “아무런 생각이 없이”란 대상에 대한 긴장이나 대립적인 관점을 회피한다는 의미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는 자연에의 동화(同化)를 의식하면서, 대상과의 동화과정에서는 언제나 세심한 관찰과 깊은 통찰을 동반하지만, 진심어린 시선으로 자연을 보고 있다고 여겨졌다. 그래서 눈에 확연히 띄는 것 보다는 은근하고 감춰져 있는 것들, 흔하여 지나칠 수 있거나 소홀히 할 수 있을 소소한 것들, 그것들의 움직임을 바라보고자 한다는 생각이다. 

작가는 무엇이든 소중하고 무엇이든 함께 하며, 전체를 만들어 가는 데 어느 것 하나 빼고 지나칠 수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그 때문에 그간에 강조의 미학으로 오히려 생략되고 단순화됨으로써 볼 수 없었던 것들을 그대로 놔둔 체, 지키고 보여줌으로써, 그 만큼 더 대상은 풍요롭고 알차게 되며, 따라서 보다 더 나아지거나 새로운 미학의 모습으로 보여 질 수도 있게 된다.        

김희국 작가의 “봄”은 대개의 작가들이 그린 “봄”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다는 느낌을 준다. 은근하면서 관조하는 느낌이 전해진다. 봄이 주는 갑작스런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새로운 시작이나 탄생의 의미를 앞세우니 그 속마음이 그대로 노출되듯 봄을 그린 작품들은 일관되게 그 절정의 순간이나 급격한 창조적 순간을 주목하는 것이 보통인데, 김 작가는 그렇지 않다. 은근하고 다소는 감추고 드러내길 주저한다. 개화의 순간이 빛날지언정, 곧 사라질 순간이 다가온다는 예상을 동시에 하면서 마음조차 다스리려는 듯이 조절을 하고자 한다. 그래서 마구 드러내는 것을 절제하면서 서서히, 은근히 보여주려는 듯한 인상을 준다. <벚꽃>, <벚꽃II>, <봉정사의 봄> 등은 봄이 한창인 때의 모습일 텐데,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아 보인다. 그러나 작품안의 그려진 것들은 이미 절정 상태이거나 마음껏 활짝 피어 있다. 그래서 봄의 모습이 꽉 차있으나, 색채로서는 강렬하지 않다. 김 작가의 “봄”에 대한 해석과 그의 작품만의 독특함이라 할 것이다. 아무튼 이런 은근하면서 산뜻하고 나름 흥이 나는 새로운 “봄”의 그림은 작가의 정신세계가 만들어낸 고유의 창조적 발상일 것이다.  

<직지사>로 향하는 숲길의 오래된 소나무에 비치는 햇빛은 소나무의 가는 잎 마디를 빛나게 하여 나무가 환하게 살아 꿈틀거리게 하는 듯하다. 작품 <솔>은 어떤가? 오후의 한 풀 꺾인 햇살에 소나무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다. 그저 소나무 숲의 소나무 두어 그루를 그렸을 뿐인데, 묘한 분위기 속에서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힘이 넘치고 있지 않은가? 단순한 자연의 일부를 뚝 떼어내 화폭에 담아내면서도 소나무의 고고하고 의젓한 모습과 함께 자연 그대로의 멋을 은근히 느끼게 해주고 있다.

<아침햇살>, <못>, <수련> 등의 작품들은 비록 소품으로 구분될 일상의 풍경에 불과할 지라도 작가는 그 대상에 시간을 들여 침잠한 끝에 그것으로부터의 이야기를 추적하고자 하는 심정으로 작품을 그려내고 있다. 따라서 일상적으로 보는 풍경이 아닌 심경의 변화나 자극을 동반한 신비한 작품으로 분위기를 바꾸어 놓는다. 어느 정도는 환상적으로 느껴지니 그림이란 단지 작가가 재현한 자연의 모습에 그치는 것이 아닌 자신을 담아낸 ‘혼돈의 재구성’으로 완성된 창작물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작품을 보는 이들은 새삼 특별한 감흥에 젖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작가는 “가을”의 허전하고 처연한 분위기속에서도 밝고 경쾌한 빛과 리듬을 찾아낸다. 그리고 요란하지 않은 바람을 등장시켜 가을의 들꽃과 들풀들의 가벼운 군무를 보여주며 생동감과 더불어 거친 야생의 자연일망정 우주질서에 순응하며 세월 견디고 지낸 것들을 편안히 조망하는 것이다. 또한 그의 숲은 어둡고 침울하지 않다. 어느 틈으로든 스며든 빛을 통해서 드러날 것들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런 자연을 향한 작가의 마음과 태도는 그 어떤 계절의 숲이라도 늘 밝게 빛이 들이치며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리고 한겨울이거나 늦가을에 다 죽은 듯한 자연의 생물들에게 여전히 희망과 기대를 남겨두고 있다. 따라서 눈길에 남아있는 발자국에서 누군가 남기고 간 발자국의 사연을 떠올리며 그 소리를 읽어내려고 한 것이나, 제 역할이 끝난 연(蓮)과 그 잎들을 화폭에 담으며 ‘내일’을 기대하는 작가의 내면을 통해 작품들은 관람자들의 시선을 잡아끌며 회심(會心)의 시간을 갖게 한다. 

<힘찬 항해>, <우리 같이>, <나홀로> 등은 바다의 파도와 더불어 강인한 어부들의 활동, 그리고 바다 새들의 역동적인 움직임 등 활기 있고 에너지가 넘치는 요소들이 화면 가득 채우고 있다. 이는 움직임이 없거나 작은 미동 정도일 자연 산수의 풍경과는 확연히 다른 대상이다. 이런 장면들을 동시에 그려내고 있다는 것은 작가의 마음속 역동성이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표시이면서 자신 주변의 수많은 대상들을 자신의 창조적 안목으로 조형화하겠다는 예술가로서의 기본자세일 것이다. 그러나 이런 바다 그림에서도 작가는 특유의 섬세함과 움직임이 빠르고 놓치기 쉬운 여러 요소들의 변화들조차 매우 꼼꼼하고 철저하게 담아내고 있다. 그의 시선은 여지없이 대상을 소홀히 하지 않고 있으며, 자신의 성정이 그대로 담기고 있다 할 것이다.      

<엉겅퀴>, <호박꽃>은 누구라도 주목하지 못했을 대상이다. 정물인 듯, 풍경인 듯   그러나 살아있는 것들이니 자연의 일부이고, 눈에 띄기 어려우니 스쳐 지나쳤을 것들이 이리 화폭에 옮겨지니 아름답게 살아난다. 뒤 섞여 있는 것들 속에 이것들을 중심으로 그려 내려면, 세심하게 관찰하고 정교하게 정성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엉겅퀴 뒤로 여러 풀들은 비록 조연으로 물러났지만, 분명 그 장면은 엉겅퀴를 위한 자연의 양보 겸 추대였을 것이고, 이를 연출한 작가의 심미안이 멋지다는 생각이 든다. 이는 <호박꽃>도 마찬가지이다. 강렬하게 도드라지지도 않지만, 꽃과 잎사귀들이 서로 잘 짜 맞추어 멋진 문양을 만들어 내듯 작가는 작은 것을 주목하여 크게 키워내는 자신의 역할을 해내고 있으니, 이것은 작가가 자연과 하나 되어 이루어 낸 아름다운 협업이거나 조화라고 할 수 있다. 

그림으로부터 얻는 것은 무엇인가? 아름다운 풍광으로부터의 경탄, 그로인한 기억과 상상으로 비롯되는 환상적인 기대감, 그저 적당한 거리에서의 ‘그림’으로가 아닌, 그 안의 풍경이나 대상과의 교감이나 일체감을 느낄 수 있다면, 그것을 그려낸 예술가의 깊은 감동의 순간과 과정을 함께 함으로써 최소한 대리만족이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것이 “그림속의 기쁨”이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이 알고 있는 아름다움에 대한 지식 또는 기억과 연상되는 이미지 속에 구체적으로 시각화되는 그림으로 또 다른 환희와 즐거움은 커지게 되는 것이다.  

 

반 고흐도 자연을 중요한 대상으로 여겼다. 자연을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자연과 하나가 된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엔 자연의 저항에 직면하지만 자연을 진지하게 생각할수록 자연과 하나 됨을 경험하였는데, “자연과 정직한 화가는 하나”라는 말은 고흐의 자연관이었다. 그러나 고흐는 “자연을 움켜쥐어야 한다.”거나, “두 손으로 힘껏 붙잡아야 한다.”고 말하였는데, 이는 김희국 작가의 자연관과는 정서상 다른 것이다. 김 작가는 자연을 경이롭게 그리고 진심으로 다가가려는 따뜻하고 인간적인(?) 품성으로 자연을 대하면서 자연에 다가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그의 내면과 감성이 작품 속에 자리하고 있고, 그래서 그의 작품들을 오래 바라볼수록 그것을 곰 씻게 되니 마음이 편안해 진다. (강화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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