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

부제 : 21세기에 만학 이야기를 전하는 20세기 샐러던트

by 강효숙

82. 잊지 못할 사랑


가을만 되면 문득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낙엽이 흩날리는 소리에 마음이 저릿해지고, 눈이 소복이 쌓이는 겨울이면 그리움은 더 깊어진다. 그 사람은 이제 곁에 없지만, 내 안의 한 조각으로 여전히 살아 있다.

그때의 사랑은 서툴렀다. 표현하는 법도 몰랐고, 지켜내는 힘도 부족했다. 그러나 그 서툰 속에는 계산 없는 순수함이 있었다.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은 치열하면서도 투명했고, 나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기고 싶은 헌신이 담겨 있었다.


세월이 흘러 돌이켜보면, 우리는 너무 미숙했기에 함께할 수 없었다. 그 미숙함이 그 사랑을 아름답게 빛나게 한 것이 아닐까. 지금의 나로는 다시는 가질 수 없는, 오직 젊고 순수했던 시절만이 품을 수 있는 투명한 감정이었다.


헤어진 뒤에도 그 사랑은 나를 울게 했고, 한편으로는 나를 자라게 했다. 아픔이 곧 성숙이 되었고, 여운은 곧 추억이 되었다. 사랑은 결국 내면을 비추는 겨울이었다. 그 사랑을 향한 열망 속에서 미숙한 나를 깨달았다. 한 사람을 온전히 믿고 사랑했던 순간이 있었음을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일까.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마다, 눈 내린 길을 걸을 때마다, 나는 미소 지으며 속삭인다.


가을의 바람은 언제나 지난날을 불러낸다. 한때 내 삶을 가득 채웠던 그 사랑을 떠올린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내 마음속 깊은 곳에 남아 있다. 돌아보면, 사랑은 단순히 한 사람을 향한 감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내 안을 비추는 거울이자, 삶의 의미를 질문이었다. 사랑을 통해 나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을 처음으로 성찰했다. 그래서 그 사랑은 비록 끝났지만, 내게서 사라지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져 온 것이다.

이제 나는 안다.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내 안에서 성숙으로 이어지는 과정임을 그 과정에서 얻은 기쁨과 상처, 그리움과 성찰은 모두 나를 키워온 자양분이 되었다.


가을이 되면 도시는 다른 얼굴을 한다. 바람에 흩날리는 은행잎이 인도를 물들이고, 카페 창가에 앉아 있으면 노란빛의 잎들이 유리창 너머로 흘러내린다. 그 장면 속에서 나는 늘 그 사람을 떠올린다. 삶의 무게는 생각보다 컸고, 우리에겐 지켜낼 지혜와 용기가 모자랐다. 결국 그 길의 끝에서 우리는 멀어졌지만, 떠난 자리에는 허무 대신 오래도록 지워지지 않는 흔적이 남았다.


세월이 흐른 지금, 그 사랑은 추억의 한 페이지로 자리 잡았다. 도시의 가을 거리를 걸으며, 바람에 실려 흩날리는 낙엽, 저마다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내려온 나뭇잎이 인도 위를 수놓는다.


가을이 오면 내 마음은 늘 하나의 악보가 된다.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은 음표처럼 인도 위에, 쇼팽의 [이별과] 첫마디가 흘러나오면, 내 안의 감정은 서서히 단조로 물든다. 흐르는 선율은 마치 우리의 사랑이 그리움으로 바뀌던 순간을 닮았다. 화려하지 않았지만 진솔했고, 완전하지 않았지만 진심이었다. 피아노의 진행이 공기 속에 흩어질 때마다, 나는 그 시절의 눈빛과 목소리를 떠올린다.


지오다노의 [Caruso]가 울려 퍼질 때면, 노래는 크레셴도처럼 점점 고조되어 마침내 절정에 이른다. 그러나 그 뜨거운 고백조차 침묵 속에 사라진다. 우리의 사랑도 그랬다. 벅차오르는 감정은 있었으나, 세상의 무게 앞에서 결국 디미누엔도처럼 서서히 희미해졌다. 화음에 도달하지 못한 채 멈추어 버린 곡, 그 미완성이, 내 삶 속에서는 오히려 가장 오래 남는 선율이 되었다.


사랑은 음악처럼 흐른다. 연주가 끝난 뒤에도 남아 있는 것은 여운이다. 음이 사라진 자리에는 침묵이 깃들지만, 그 침묵조차 내면을 울리는 소리가 된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끝은 공허가 아니라 성숙의 울림이었다.

나는 이제 안다. 사랑은 완벽한 화음을 이루지 못했을지라도, 그 흔적은 내 삶을 풍성하게 하고 내 마음을 깊게 만들었다. 그 순간 울려 퍼진 진심, 그리고 시간이 흘러도 꺼지지 않는 잔향처럼,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는 조용히 속삭인다.


“사랑은 끝났지만, 그 사랑의 음악은 내 안에서 지금도 계속 연주되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 순간을 담고 인생을 담는 추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