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빠가 친구들과 놀러 갈 때도 따라가 오빠들이 노는 옆에서 혼자 놀기도 했다. 놀 때는 모른 척하다가도 집으로 올 때면 꼭 나를 챙겨서 왔다. 안 놀아주면 따라다니지 않을 거라며 그리도 외면하다가도 잠시라도 안 보이면 오빠는 나를 찾았고 집으로 올 때면 꼭 함께 와 주었다.
술 드신 아버지가 매를 들면 오빠가 집 밖으로 달아났다.
아버지 주무시면 들어오라는 엄마의 귀띔으로 10살쯤 먹은 뒤부터는 종종 아버지를 피해 나갔다. 그러면 오빠 혼자 가는 것이 안쓰러워 나도 따라갔다. 오빠는 그런 나까지 챙기느라고 귀찮아하면서도 밤에 나를 잃어버리기라도 할까 봐 꼭 손을 잡고 다녔다. 추운 겨울에는 옆집 창고에 쌓아둔 짚더미로 돔을 만들어 그 속에 나를 앉혀 놓고는 아버지가 주무시는지 살피러 가기도 했다. 혼자 있는 게 무섭다 하면 금방 갔다 올 거라며 울지 말고 조금만 기다리라고 했다.
어느 순간도 내가 울면 오빠는 곧 나타났다.
오빠가 야단치는 경우가 아니면 누구도 나를 울리면 안 되었다.
7살 때는 친구들이랑 냇가로 수영하러 간 오빠를 따라가 오빠들이 없는 위쪽에서 혼자 놀다가 물속에 미끄러져 물을 실컷 마시고 기절한 적이 있었다. 아래쪽에서 친구들과 놀던 오빠가 떠내려 오는 나를 발견하고는 오빠 친구들과 들어서 둑에 거꾸로 엎어놓았다. 뱃속에 가득 찬 물은 중력을 타고 입 밖으로 쏟아져 나왔다. 그러면서 숨통이 트여 살아났다. 그때 오빠는 11살이었다.
그 후로도 많은 시간들을 오빠를 졸졸 따라다니며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년이 되어서는 오빠가 직장을 잡아 인천으로 오면서, 오빠보다 먼저 사회에 나가 안내양을 하던 내가 일을 그만두고 공부하겠다 했을 때 처녀가 혼자 있으면 안 된다면서 오빠와 함께 기거하도록 해주었고 월급 타면 친구들과 밥 사 먹으라고 용돈을 주기도 했다. 결혼 초 남편 때문에 속이 상하다고 말하면 단박에 쫓아와서 남편을 혼내주기도 했다. 남편은 지금까지도 오빠를 어려워하고 오빠한테 이를까 봐 내게 불만이 있어도 혼자 삭이곤 하는 것 같았다.
내가 어려울 때마다 어떻게든 나를 도우려고 애를 쓰던 오빠는 20여 년 전부터 도매시장에서 장사를 했다. 그때 마침 다단계를 하다 힘들어져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내게 오빠 가게를 내어주며 기회로 삼게 했다.
질병 때문에 시장을 떠날 수밖에 없었을 때 누구보다 가슴 아파했고, 병이 다 나았을 때 누구보다 기뻐했다. 6년 전에는 또다시 돈 벌 수 있는 좋은 기회라며 도매시장에서 한 품목을 팔 수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그렇게 다시 오빠와 한 시장에서 수시로 서로의 근황을 살피며 산 지 6년이 되었다.
내가 하는 장사는 거의 독점이라 금방 자리를 잡아 나는 형편이 피었는데, 오빠는 오랫동안 해온 장사이면서도 수급을 맞추지 못해 고전을 면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면서도 내가 잘되기를 바라는 오빠는 매일 내 일에 신경을 써주고 "동생이 해초류를 파니까 필요하면 동생한테 전화 해" 라며 떠나기 전까지도 오빠의 거래처에 말하곤 했다. 상인으로 보기 드문 ‘욕심 없는 사람’이라는 이미지로 인해 오빠의 거래처는 자연스럽게 우리의 단골이 되어 주기도 했다.
그랬던 오빠가 떠났다.
언제든 든든하게 뒷배가 되어 주었던 오빠가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하고 떠났다.
오빠는 천성적으로 건강하다고 자부했었다. 정말이지 감기 한번 걸린 걸 본 적이 없다. 그랬던 오빠에게 재작년 병원의 오진이 있었다. 폐암이라고 했다. 돈복은 없어도 건강복은 있다며 하늘에 감사하기도 했던 오빠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망설일 것도 없이 오빠를 입원시켜 수술을 받게 했는데 떼어낸 폐조직이 검사 결과 암이 아니라는 거였다. 말도 안 되는 소식 앞에서도 오빠는 긍정적이었다. 건강한 말년을 보내기 위한 액땜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그 후 건강을 회복하고 많이 달라진 모습을 보여 주었다. 조금 더 벌겠다고 악착같이 일만 하던 오빠가 모임에도 나가고, 등산모임도 가입하여 매주 산에 다니고, 술을 끊고 담배도 줄였다고 했다. 얼굴도 피었고 사는 모습이 좋아 보여 오빠를 걱정하던 내 마음도 편해졌다.
지지리도 가난한 집에 태어난 우리는 굶기도 같이했고, 보리밥도 같이 먹었고, 시래기 죽도 함께 나누어 먹으며 자랐다. 좋은 게 생기면 꼭 불러 주었고, 내게 좋은 일이 생기면 오빠는 돌아다니며 자랑을 했다.
그날 아침, 그날도 오빠는 힘이 넘쳤다. 주말엔 친구들과 어느 산에 가기로 했다며 신이 나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나도 행복한 미소를 머금고 왔다. 그리고 다음날 새벽, 평소처럼 장사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 오빠를 보러 갔다. 오빠는 보이지 않았다. 옆에 상인분이 "술 먹고 잠들었나 봐 경매시간에도 안 오고 전화도 안 받네"라고 했다. 오빠가 그럴 사람이 아니었다. 오빠 집으로 뛰어갔다. 운전을 하며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전에는 아니었지만 이번 만큼은 제발 어디 가서 술이 떡이 되어 못 나왔기를 바랐다.
비번을 누르고 들어간 오빠 집에 오빠는 자고 있었다. 이미 깊은 잠이 들어 흔들어도 가슴압박을 해도 꿈적도 하지 않았다. 바로 도착한 응급대원들도 고개를 저으며 나갔다. 심정지 된 지 5시간 정도가 지났다며 아무것도 시도하지 않는 그분들이 너무 원망스러웠다. 금방 잘 잤다며 일어날 것만 같은 오빠를 병원에서 와서 들것에 실어 나갔다. 일어나라고, 목이 터져라고, 외쳐도 오빠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게 오빠를 보냈다. 몇 번이나 나를 살려 주었던 오빠를 나는 살릴 수 없었다.
사람들은 어쩐 일이냐며 걱정을 해주었지만 내 귀에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불러도 불러도 대답도 없고, 울어도 울어도 나를 달래주던 오빠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며 힘 내라고 했다.
남들이 힘든 일을 당했을 때 나도 쉽게 하던 말이었다.
그러나 그 말이 얼마나 공허한 말인지를 이제 알았다.
오빠의 잔소리 말고는 내게 위로가 될만한 것은 없었다.
아프다. 정말 너무 아프다.
밥 먹고, 화장실 가고, 누군가를 만나고, 위로를 받아야 하는 살아있는 나 자신이 한 스럽다. 오빠가 없어도 아무 일 없었던 듯 무심하게 흐르는 시간들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오빠가 남기고 간 흔적들 정리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받아들여지지가 않는다.
그래도 살아야 한다. 장사하던 사람이라 정리할 것이 너무 많다.
오빠의 좋은 이미지 그대로 보내 드리려면 정리도 말끔하게 해주어야 한다.
나만 바라보는 조카들 보며 이를 악물고 힘을 내기로 했다.
오빠가 살고 싶었던 말년, 그러나 누리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그 이후의 시간들을 내가 모두 누리며 살 것이다. 언젠가 다른 세상에서 오빠를 만난다면 "네가 오빠 대신 조카들 보살피고 잘 살아주어서 고맙다"라며 환하게 웃어줄 오빠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렇게 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