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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시골서재 강현욱 Sep 22. 2022

혼자 보는 남자.


나무에 가지런한 뿌리를 내린 이끼들은  익은 카스테라처럼 부드러웠으나, 나의 손끝은 이끼를 넘어 나무의 단단한 살결로 흘러들었다. 서러운 어떤 것들과 행복한 그런 것들이 섞여 손끝에 밟혔다. 나무에게 이끼는 허락을 구하지 않았을 것이고, 나무 또한 그저 자신을 내어주었을 것이다.  그랬냐고 물어본다, 나무는 '나는 나무이니까' 대답하였을 것이다.

그래. 그는 아픔 위에서 싹을 틔워내는 행복을 알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는 나무이니까. 그런 날이 있다.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과 고통들이 약속을 하기라도 한 듯, 태풍의 중심처럼 한꺼번에 밀려드는 그런 우울함에 빠져 허우적 거려야 하는 . 어머니의 말, 사랑하는 친구의 말, 아끼는 후배의 . 이런 말들이 체에 걸려지지 않은 채,  것의 몸으로 나의 문을 두드렸고, 그날의 나는 문을 열어야만 하였다. 웅성거리는 그들 속에서 그들의 말들은 웅웅거렸지만, 묵묵히 들어내었고, 형체를 더듬거렸다. 슬픔을 지우지 못한 그들은 흔적을 여기저기 남겨두었으나, 쓸어내거나, 닦아내지 않았다. 언제든 문을 두드리라 말하고는, 배웅을 하며, 조용히 문을 닫았다. 닫혔으나, 닫히지 않은 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래. 그런 날은, 불이 꺼진 방 구석에서 홀로 켜져 있는 TV처럼, 그저 혼자 울음을 뱉어내는 일이 옳은지도 모르겠다. 시도 때도 없이 흐르는 눈물들은 이상하게도 사랑하는 이들 앞에서는 길지도 않은 목구멍 넘어오지 못하였다. 전화기 건너편에서 연약한 그의 울음은 아득하게 흘러왔지만, 주머니 속 어딘가로 핸드폰을 깊이 쑤셔넣고 나서야 비로소 나의 복받치는 울음은 시작될 수 있었다. 하지만 울음을 그칠 수 있는 방법을 이제는 잘 알고 있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나무들을 돌보면, 고요함과 단단함이 찾아 온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고요함은 깊었고, 단단하였다.


그런데 그날의 난, 측 전조등을 켜고, 우측 차선으로 핸들을 꺾어서는 어리둥절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이들의 슬픔을 뒤로 하고 찾아간 곳이 영화관이라니.

늦은 시간 영화관을 혼자 찾은 나는 잘못 놓인 과자 부스러기를 따라간 헨델이었다. 그레텔이 없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그때 나는 왜 영화관을 찾았을까. 사람들의 격한 탄식과 울음들에 위로받고, 공감되고 싶어서였을까. 아니었다. 나와 그들의 울음은 낮과 의 간극만큼이나 결이 달랐다. 사람들의 체취와 36.5도온도가 필요해서였을까. 그것도 아니었다. 사람들의 열기는 그저 낯선 이의 웅성거림 만큼이나 가뭇없이 사라질 뿐이었다.  시간의 영상조차 가위로 잘게 잘게 잘라버려 도저히 다시 붙여낼 없는 조각들이 되어버렸고, 딱풀은 말라버렸다. 스크린이 까맣게 아웃되고, 노란 조명들은 어서 나가라며, 재촉하였다. 사람들은 대피하듯 빠져 나갔고, 빨간 의자에 몸을 깊숙히 쑤셔박은 나는 눈 앞에 펼쳐진 허무한 광경을 우두커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결이 다른 울음도, 달큰한 체취도, 미지근한 온기도, 어느 것 하나 남아있지 않은 그곳에서 나는 홀로 남겨졌다. 청소하는 소리만이 귀를 맴돌며, 나의 몸을 끌어당겼다. 공허함이 사람을 먼지 위태워 허무의 공간으로 날려버릴 수도 있음을 이제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곳에서의 시간과 기억을 잃어버렸고, 무엇을 바라였던 것인지도 잊어버린 채, 두고 검은색 지갑만이 빨간의자에 덩그란히 놓인, 그런 날이었다.


생각보다 잘 자라준 고구마들. 기특하였다.

 늦은 후회들을  좌석에 태운 채, 시골서재로 달렸지만, 그날부터 난, 글을 쓸 수도, 책을 읽을 수도 없었다. 번잡하다 여겨지는 가을바람만이 나부꼈고, 흔들리는 촛불만이 아슬아슬하게 기립하여 서성였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문득 서재에 꽂혀있던 '해밍웨이''노인과 바다'꺼내어 독서등 아래로 데려갔다. 청새치에 대한 노인의 간절함은 그의 고독함과 외로움을 낚시 밥에 불과한 것으로 만들어 버리기에 충분하였다. 그는 혼자서 바다를, 그리고 청새치를 바라보며, 꿈을 꾸었을 것이고, 희망을 품었을 것이다. 삶에 의미를 부여해 나가는 그런 단단한 꿈을 말이다. 그래서 그는 패배하지 않았고, 그의 공간은 깨뜨려지지 않았다.


'인간은 패배하도록 창조된게 아니야.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패배할 수는 없어.'

 - '해밍웨이', '노인과 바다' 중. -


청새치를 보기 위해, 밭을 갈고, 시금치 씨앗을 뿌렸다. 고구마를 조금 캐어내었더니, 꽤나 그럴싸한 녀석들이  자리에 마알갛게 드러누워 있었다. 비로소 숨이 쉬어졌다.

그랬다. 군중들 속의 나는 고독과 공허의 틈새를 뚫고 나가지 못하였지만, 언제나 자리에 있어주는 것들과 그들을 통해 나의 의미를 발견해 나가는 일들 앞에서는 고독함공허함은 황급히 달아나 버렸다. 그들이 달아나버린 자리에는 이내 단단함으로 채워지며, 하얗게 굳은 살이 붙어갔다. 고요함 속에서 나를 돌보자기만의 공간 평온강건으로 자신을 이끈다는 걸, 가끔 잊는다. 온전히 나로서 존재할 수 있는 시간들, 오롯이 나 하나로 맑아질 수 있는 시간들. 이러한 시간들이 삶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 주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화살을 쏘아준다. 물기 먹은 거울을 닦아내니 그 속에 한 사람이 서있었다.

지친 듯 보였지만, 단단한 미소가 어울렸다.


'두두니' 작가님의 '몽글몽'

서글프게 사라지고 잊혀지는 것들이 서러웠고, 나의 존재도 사라지는 바람을 타고 흩어지는 것만 같았다. 펜 끝에 문장을 걸어 나를 건져올렸고, 나무들이 나를 살아가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리고 그 믿음의 유효 기간은 정해져 있지 않았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분들의 책이 하나 둘, 도착하였다. 만져지는 작가분들의 이름들에서 자부심이 흘러나오는 목덜미를 볼 수 있었다. 나 또한 선물처럼 날아들 기적의 청새치들을 낚기 위해 고요함 속에서 혼자 바다를 바라 본다. 다시 책을 보고, 나무를 보며, 그 너머의 숲을 보고, 저 멀리 달을 본다.

나의 공간은 오늘도 그렇게 확장되고 있었다.

'Rina ka' 작가님의 '헨리에타 마리아'

스스로를 위로하고, 위안을 부여해 주는 치유의 공간. 자기만의 방이 당신과 나, 우리들에게 필요하다. 언제나 후회는 더 사랑하지 못한 에서 찾아와 창을 넘어왔다. 가장 사랑해야 할 존재가 정작 자신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영원히 망각한 채,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삶에는 타인과는 나눌 수 없는 영역이 있기에, 자신을 더 잘 돌볼 수 있도록, 더 사랑할 수 있도록, 각자만공간으로 가끔은 뚜벅뚜벅 걸어들어갈 수 있기를 바라본다. 그곳에 들어가 한꺼풀, 또 한꺼풀 벗겨내면,  다른 자신이 서성이고 있을 것이다.

꼭 안아주어야 할 그토록이나 안쓰러운 자신이.

그래서 오늘도 나는, 혼자 나를 다. 빠알갛게 익어가는 한밤의 숯불과 하얗게 번져가는 달은 참으로 아름다웠다.

혼자 보는 시간 속에서 나는, 익어가는 나를 배워가고, 바라본다.

혼자 보기에는 아까웠던 추석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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